'너무 가벼워진 세상을 향하여'
'너무 가벼워진 세상을 향하여'
  • 김기대
  • 승인 2010.01.07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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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읽고

슬라보예 지젝은 참 독특한 인물이다. 쉼 없이 써대는 그의 글들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고, 30세 연하의 속옷 모델과의 재혼은 주간지 가십으로도 손색이 없다(그녀는 지젝의 학생이었다). 스스로를 스타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뉴스와 논쟁의 중심에 서있다.

그러나 지젝은 결코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는다. 흔히 인텔리들이 빠지기 쉬운 무책임한 열림에 대해서 그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약한 사고를 단호하게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참도 잘 어울리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의 한계도 아프게 지적한다.

 

   
 
  ▲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이슬람도 그의 비판의 잣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무책임한 포용이 멋있어 보이는 지식 세계에서 쉽지 않은 용기다. 지젝이 기독교에 대해서 열려 있는 것도 독특함 중의 하나다. '장터에서 장기를 두는 장기 인형 밑에는 난장이가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난장이는 기독교이고 장기 인형은 역사적 유물론이다. 역사적 유물론이 역사의 전면에 나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기독교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뒤집는다. 난쟁이가 유물론이고 인형은 기독교다. 신학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하므로 신학이 역사적 유물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면 그 어떤 상대와도 대적할만하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철학과 사회학에서 뒷방으로 밀려 났던 기독교의 유산을 다시 도입하고 있는 최근 서구 철학의 흐름에서 지젝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지젝의 최근 저작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인류의 보편적 해방이라는 가치를 옹오한다. '자유'와 '평등', '평화' 같은 가치들은 거대 담론을 거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휘말려 사라져버렸다. 지젝은 인류가 해방의 대의(Causes)를 상실한 채 가치의 상대주의를 인정하고 거대 담론을 포기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안주한 것을 비판한다. 그래서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서려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가벼워져 버렸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기에 그것은 사탄의 징후라는 설교를 마다않는 보수 교회에서부터 양립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열림을 자랑했던 기독교인까지 모두 개별성에 매몰되어 버렸다. 개별이 우세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지만 그 안에 보편적 가치를 억지로 가두어둠으로써 우리 모두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가벼운 사고와 함께 교회는 온갖 데 간섭하는 가벼운 실천으로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거리의 노숙자에게 밥을 퍼주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왜 그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는지에 대해서는 선포하지 않는다. 신앙이 없는 이성적 근대인으로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을 마치 기독교의 대의인 것처럼 너도 나도 나선다. 개별적 실천에 가치를 두며 대형 교회를 비판하던 목소리들은 이웃을 위한 대형 교회들의 물량공세 앞에 힘을 잃는다.

다음에는 목회자의 납세 문제를 들고 나온다. 이 세금이 무기를 구입하고, 무상급식 예산을 빼앗아 개발에 퍼붓고, 바로 그러한 일에 내 돈이 기여하고 있음을 외면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기성 교회를 비판하다 보니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를 넘는 것에 대해 할 말을 잃는다. 여론조사만큼 절차적 민주주의의 좋은 구실이 어디 있겠는가?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개별적 가치에 함몰되다 보면 50% 이상의 여론 지지를 받는 이명박 대통령도 '옳은' 것인데 그것이 과연 기독교적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교회다운 교회, 신학다운 신학, 기독교다운 기독교는 옛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개별적 실천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안에 보편성을 가두어두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결코 기독교적인 책은 아니다. 대의를 찾다 보니 지젝은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 과거의 실패한 혁명들이 추구했던 여러 실패들을 거울삼자고 한다. 작은 개별성 때문에 대의를 잃은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아기를 목욕시킨 물이 더럽다고 해서 물만 버려야지 아기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젝은 여전히 위험한 학자이다. 그 대의의 옳고 그름을 누가 결정하느냐에 대해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의를 좇다보면 실패한 혁명들이 가졌던 전체성의 위험에 또 다시 빠지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바로 그 지점에 기독교는 응답해야 한다. 지젝이 결여하고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역사가 보편의 자리를 다시 차지할 수 있도록 교회는 대의에 충실해야 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에서 "여론에는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 대신 역사의 눈높이라는 차원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시 개별에 물든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눈높이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보수 교회에 대한 희망은 처음부터 가져본 적이 없지만 이른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기독교인들도 표현되는 외피만 다를 뿐 똑같은 논리적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기대 목사 / 평화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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