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주의', 선교의 줄기 어떻게 비틀었나
'콘스탄틴주의', 선교의 줄기 어떻게 비틀었나
  • 윌버트 쉥크
  • 승인 2010.01.0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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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선교를 넘어 예수의 선교로(3)…'역사 속에서의 교회'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주의(Constantianism)의 출현이 긍정적인 발전을 가져왔는지, 부정적인 발전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기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내린 결정으로 380년 데오도시우스 1세의 통치 아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이것이 교회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에는 의견들이 일치한다.

기독교는 사회의 주변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변화되었으며, 제국의 안정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가 기득권의 현상 유지를 위한 '수호자'가 되었다. 교회의 정체성에 있어서 이러한 큰 변화는 광범위한 함의를 갖게 되는데, 사실 유럽은 20세기까지 이러한 기독교국가(Christendom)로 알려졌다.

콘스탄틴 이후의 교회, 제국의 '위협'에서 '수호자'로
 
이와 같은 역사적 전개를 평가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갖게 되는 자신의 선교적 목적의식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전도의 본질은 변화되었다. 통치자의 관심은 유럽의 부족들을 진정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침내 기독교도인 왕에 의해 통치되는 땅은 기독교화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교회'의 의미를 생각할 때 영토권 개념이 연결되었다.

교회는 시민들을 목회적으로 돌보는 기관으로, 그리고 사회를 떠받치는 대들보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313년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소수였지만, 이제 교회는 국가 종교체제로서 국정 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주의적 정착이 가져온 장기적 결과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6세기까지 교회의 성직 계층이 부패한 것이 그중 하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로마 가톨릭의 몇 가지 실천과 교리들에 도전했는데, 특히 죄인인 인간이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거기에는 유럽이 기독교 문화라는 가정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지도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에 대해 내세웠던 비판 중의 하나가 프로테스탄트들이 선교 사역, 즉 선교사들을 기독교국가(Christendom)로부터 세상의 다른 곳으로 파송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무역회사'가 선교적 도구로 사용됐나?

16세기에 몇몇 프로테스탄트들이 유럽에서 복음전도를 하긴 했지만, 17세기가 되어서야 소수의 사람들이 기독교국가를 넘어서 선교사적 아웃리치를 하기 시작했다. 기독교국가 체제가 선교적 교회의 모델을 제공하지 못한 연고로, 이 시기의 선교 주창자들은 다른 문화와 이미 교통하고 있는 기관(organization)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무역회사가 그것이었다.

15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왕실은 교황으로부터 기독교국가의 경계를 넘어 탐험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세계의 다른 지역에 무역과 탐험의 목적으로 무역회사들을 설립하는 허가를 내주는 것이 유럽 군주들 사이에 점차적으로 공통점이 되었다. 

교황의 선례에 따른 이러한 특례에는 조건이 하나 요구되었는데, 무역회사들이 '사목(chaplains)'을 고용하여 유럽인들에게는 목회적 돌봄을, '이교도들(heathen)'에게는 선교적인 사역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역사가 보여주듯 무역회사들은 사목들이 유럽인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목회적 임무를 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사목들이 토착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거나 비협조적이었다.

선교를 기독교국가 바깥에서만 허가된 교회의 부수적인 활동(extraecclesial activity)쯤으로 보는 '기독교국가 체제적 선교관'은 그렇게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19세기까지 개신교 안에 지속되었다. 

글 · 윌버트 쉥크(풀러신학교 교수) / 번역 · 허현 목사(LA 이음교회)

윌버트 쉥크(Wilbert R. Shenk)는 미국 풀러신학교의 석좌교수로 선교 역사와 현대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기독교 윤리를 재구성한 존 하워드 요더의 영향을 받은 쉥크 교수는 바울이 선교의 원형(prototype)이라는 통념을 깨고, 예수가 선교의 원형이 되어야 함을 줄곧 강조해왔다. 당시 정치·사회·문화 속에서 '보냄 받은'(being sent) 선교사로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교회도 자신이 보냄 받은 상황 속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강조점이다. 저서로는 <선교의 새로운 영역>(Changing Frontiers of Mission), <Write the Vision>, <The Transfiguration of Mission> 등이 있다. 메노나이트 선교부 책임자, '미국 선교 사학' 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선교 이론과 행정, 실천을 겸비한 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번역자 주)

* 이 글은 <New Wineskins for New Wine : Toward a Post-Christendom Ecclesiology,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29, no. 2> (April 2005)에 실린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앞으로 8차례에 걸쳐 나눠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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