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회의 사회 환원, 왜 궁지 몰린 재벌이 생각나지?
어느 교회의 사회 환원, 왜 궁지 몰린 재벌이 생각나지?
  • 최태선
  • 승인 2010.01.24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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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14) 모두 함께 부를 '새 노래'를 위해

한국에서 얼마 전 교회 건물을 짓기로 한 교회의 목사님이 기자 간담회를 열어 예배당 건축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건축 기간 동안 십일조에 해당하는 120억 원을 사랑 실천과 사회 섬김에 사용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번 아이티 지진 구호금으로 100만 달러를 책정하고 일차로 우선 10만 달러를 보내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정 투명성을 높이고 지역 개척 교회와 미자립 교회를 위한 대출 지원도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대형 교회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자기 배만 채우는 대형 교회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여 년 전 한 교회의 목사님이 '이삭줍기'라는 헌금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삭줍기 헌금은 레위기 19장 9절에 기록된 밭모퉁이의 곡식을 거두지 말며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아서 가난한 이웃이나 나그네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을 따라 지어진 이름으로 일종의 구제 헌금입니다."

처음에는 구제의 대상이 교회 밖 사람들이었는데 그분들이 점차로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어 그 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났다며 마치 낭패라도 당한 듯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 교회 모두 교회가 사회를 섬겨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투철합니다. 모름지기 좋은 교회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책임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야 할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올바로 구현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교회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나라이며 사회이어야 합니다. 두 교회가 실천하고자 하는 사회적 책임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분의 공의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비는 공의라는 갈라진 바위틈에서 자랄 때에만 꽃을 피울 것이다. 순전한 박애주의라는 습지대에 옮겨진 자비는 사람을 잡아먹는 잡초가 된다. 그 잡초는 산 이름만큼이나 다양하게 불릴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하다."(C. S. 루이스)

언뜻 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공의라는 토대 위에 세워지지 않은 자비란 별 소용이 없거나 오히려 더 해롭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걸 알아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참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사랑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일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내어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이 말하는 내용 또한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공의와 평등은 한 쌍입니다. 누구는 우월한 위치에서 도움을 주고 누구는 낮은 곳에서 위를 쳐다보면서 상대방의 호의만을 바라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공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상대방에게로 다가가(같은 인간들의 만남에서 내려감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필요에 따라 반응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상대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등이며 공의와 평등이 한 쌍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은 진정한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 고통이 있는가를 늘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는 제자에게 한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여정은 바로 한 거지가 빵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 다른 거지를 돕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가 거지임을 아는 것이 공의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 서면 우리 모두는 똑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평지입니다. 산마다 낮아지고,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해지는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난이란 단지 굶주리고 헐벗고 집이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쓸모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가난이 가장 큰 가난이다."(테레사 수녀)

돈으로 굶주리고 헐벗고 집이 없는 것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쓸모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진짜 가난은 도울 수 없습니다. 120억이라는 거액의 돈도 이삭줍기라는 뜻있는 헌금도 하나님의 공의에는 미치지 못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돈을 내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를 실천하겠다는 발표에 존경심이 일어나기보다는 마치 법정에서 궁지에 몰린 재벌 총수가 사회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희사하겠다는 선언을 할 때 느껴지는 황망함이 느껴지고, 교회 밖의 사람들을 골라 사회를 섬기려한다는 이야기에서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말하는 이의 도덕적 우월감이 느껴지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다른 교회들을 향한 질책으로 느껴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공의란 무엇보다 겸손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에 잠긴 채 우리는 평등하게 행동하고 자비를 사랑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공의는 행함입니다. 그것도 열정을 가지고 행해야 하는 자비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열심으로 행하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한 후에 겸손히 주인의 식탁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공의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공의는 온전함을 낳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공의는 평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사처럼 사용하는 샬롬의 의미입니다.

샬롬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서 서로를 돌보는 조화로운 공동체입니다. 샬롬에 거한다는 것은 공동체와 함께 직접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가식이나 꾸밈도 없는 진정한 기쁨과 참된 만족에서 터져 나오는 '새 노래'(계14:3)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그 '새 노래'를 부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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