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위하는 것일까?
교회를 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위하는 것일까?
  • 최태선
  • 승인 2010.02.12 0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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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들(15)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선출이 주는 교훈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말라.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변화시켜라. 그리고 언제나 희망을 선택하라.  우리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예수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미친 생각이다! 우리가 예수와 다른 입장을 취할 때,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환상에서 깨어난다. 내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정말 문제다." (짐 월리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예수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는 것은 정말 미친 생각이라는 짐 월리스의 말은 결코 과격한 표현이 아닙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며 교회를 위하는 것이 예수님이나 하나님나라를 위하는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착각입니다. 짐 월리스의 표현처럼 그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용납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될 수많은 일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여지고 오히려 그것이 헌신이요, 희생이라는 자기 의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고하는 능력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보내는 사람들처럼 교회나 목사가 하는 일에는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참된 신앙이요, 거룩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교회라는 조직이 엄청난 독재의 권력이 되었다는 가장 큰 이유가 존재합니다. 엄청난 위력으로 짓눌러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누구든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면 '중이 절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야 한다'는 하나님나라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원칙 아닌 원칙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옳지 않은 점을 발견하고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이가 나타나면 독재 권력에 의해 여지없는 단죄의 칼날이 가해지고 억울하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절 싫어하는 중처럼 그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사고하기를 멈추고 신앙생활을 하든지 사고를 멈추지 않고 교회를 떠나든지 해야만 하는 가슴 아픈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진지한 사고를 통해 바른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는 믿음은 있지만 머리가 텅 빈 사람들, 혹은 뭔가를 알지만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단순히 이러한 현상을 악순환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중증의 골병이 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변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변화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말씀에는 하나님나라의 원칙과 교훈들이 넘치도록 충분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겸손하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면 만물을 소생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모두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고 그들이 마침내 온전한 이스라엘이 되었듯이(겔37장)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렇게 살아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의 선출 이야기는 독재의 권력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교회에 값진 통찰과 교훈을 제공해 줍니다. 소수였던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소외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소수인 헬라 파 사람들은 다수를 이루고 있던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였습니다. 그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 사도들은 공평한 구제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그 일을 담당할 일곱 명의 집사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뽑힌 일곱 명이 모두 소수인 헬라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수인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여기에는 권력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방식과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다수가 소수의 항변을 이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자신들의 권리와 권한을 포기함으로써 교회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것입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권력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허용된 권력이란 오직 섬김과 희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배를 단념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질서와 해체가 아니라 샬롬의 평화와 기쁨이었습니다. 온전한 주님의 통치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그들은 경험했던 것입니다. 섬김과 희생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더 큰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온전한 하나가 되어 누리는 하늘의 기쁨(Divine joy)이었습니다. 떨어져 나가거나 잃은 사람 없이 갈등과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사랑으로 힘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하나님나라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결과는 다만 당면했던 문제의 해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

결과는 안을 넘어 밖에까지 미쳤습니다. 심지어는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제사장의 무리까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그들과 합류하는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실현해야 할 참된 부흥의 모습입니다.

이런 길을 걷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습니다. 누가 그걸 모르냐는 것입니다. 한 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된다면 그때 자신도 합류하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참 외로운 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불가능한 길이요, 이상적인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바로 진정한 희망이 존재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은 인간에 의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의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우리가 현실 속에서 무력을 경험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어려움 속에 처한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의기소침해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진정 강함 속에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인 것입니다.

변화는 가능합니다. 꼭 신세대가 아니더라도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신세대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잘잘못을 깊이 깨달아 반성하고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부터 변화시켜나가는 것입니다.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을 폐기처분하고 섬김과 희생으로 우리의 책임을 감당해 나간다면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그 놀라운 부흥이 우리 시대에도 도래할 것입니다. 반드시.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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