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이티에 필요한 건 '친절함' 아닌 '민감함'
지금 아이티에 필요한 건 '친절함' 아닌 '민감함'
  • 김기대
  • 승인 2010.03.0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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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를 가다(5) 해법 찾으려면 역사부터

아이티의 역사를 보면 아이티의 해법에 조금 더 다가설 수 있다. 1791년 아이티는 몇몇 흑인지도자들의 지도 아래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승리는 흑인 지도자들의 리더십 덕분이기도 하지만 프랑스혁명(1789)의 와중에서 자코뱅파의 발언권이 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급진적 공화주의자로 좌파의 어원이 된 자코뱅파는 아이티의 혁명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혁명의 정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 이후 역사를 후퇴시킨 나폴레옹은 아이티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 아이티는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 앞에서 기가 막힌 작전을 전개한다. 진압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훗날 프랑스의 국가가 된 <마르세예즈(Marseillaise)>와 <사 이라(Ca Ira)>라는 두 개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 아이티의 흑인 지도자 투싸인트(Toussaint)에 의해 자발적으로 선포되었던 아이티 노예해방(1802년)이 최초의 노예해방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출처 : 위키피디아)  
 
<마르세예즈>와 <사이 라>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님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운동 가요였다. 프랑스대혁명 때 불리던 이 노래들을 아이티 독립군들이 합창했을 때 진압군 내면에 흐르고 있는 혁명의 정당성, 민중의 해방과 같은 계몽적 이성이 자극되었다.

따라서 나플레옹 군대는 진압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의 저서 <세 깃발 아래에서>에서 이 사건을 계몽주의의 영향이라고 부른다. 독립혁명을 하면서도 프랑스대혁명의 추이를 살폈던 아이티 지도자들의 국제적 감각, 적군 진지에서 들려오는 혁명 가요를 들으면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되살리며 발포를 거부했던 진압군들의 퇴각이, 역사의 멋진 장면 중 하나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자존심은 있다. 아이티도 특히 그러하다. 남미 최초, 흑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자랑스러운 독립 역사를 갖고 있는 아이티는 오랜 외세의 간섭과 자연 재해, 내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최빈국으로 전락했다가 이번 대지진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질고로 가득 찬 그들의 역사는 백인들에 의해서  소외된다.

예를 들어 흑인 노예해방을 이야기할 때 영국의 윌버포스(1807년 노예폐지법 통과)와 링컨 대통령(1863년 노예해방 선포)은 기억해도 아이티의 흑인 지도자 투싸인트(Toussaint)에 의해 자발적으로 선포되었던 아이티 노예해방(1802년)이 최초의 노예해방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역사적 소외에도 불구하고 이번 아이티 방문에서 만나 본 아이티인들은 밀려드는 외국인들에게 쉽게 구걸하지 않았고 쏟아지는 구호품들 앞에서 가볍게 감동받지 않았다. ‘최초’다운 자존심이 그들 가운데 흐르고 있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좋은’ 사람들이 그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우리는 그들에게 옷을 주어야 하고 집을 주어야 하고 마실 물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예수께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베풂에 대한 성경 구절을 잘 인용하지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성경에서 그들은 되묻는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지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단순히 구제의 익명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베풂의 주체가 되지 말라는 의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조차 모를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수사 속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이 되어야 한다.

   
 
  ▲ 어딜 가나 노점상은 있었지만 구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이티에 대한 구제는 베풂이 아니라 나눔, 더 나가서 되돌려 줌이다. 많은 부분 서구 자본주의의 혜택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풍요로운 삶 속에는 제 3세계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수탈의 역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접근을 하지 않는 한 아이티에는 해법이 없어 보인다, 부채 탕감을 넘어서서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 우리의 회개와 함께 가야 한다. 따라서 2월 22일자 타임지에서 낸시 깁스(Nancy Gibbs)가 지적했듯이 지금 아이티에 필요한 것은 ‘친절함’(kind)보다 ‘민감함’(sensitive)이다. 

시민의 승리를 가져온 프랑스대혁명의 긍정적인 영향이 아이티 독립에 한몫했듯이 아이티의 해법 또한 친절한 지역적 접근으로만은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티 문제는 전 지구적으로 민감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구적 고민이 배제된 지역적 도움 속에서는 좋은 사람들이야 많이 배출될 것이다.

하지만 지구적 해법을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아이티 문제의 해결은 미봉책이 될 수밖에 없다. 민감하지 못한 ‘좋은 사람’들은 아이티 사태의 원인에 나의 풍요가 한몫했음을 잊은 채 돈 몇 푼 내면서,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을 챙기면서, 입지도 않은 옷을 보내면서 자아도취에 빠져 버린다. 

몇해 전 파키스탄이 자연재해를 당했을 때 전 세계에서 그들에게 답지한 옷들 중에는 산타 클로스 복장, 한 겨울에 입는 모피 코트 같은 것들이 넘쳐났으며, 대부분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약품 중에는 바이아그라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파키스탄의 빈민가에서는 전 세계에서 보내 온 옷들을 땔감으로 사용한다. 자본주의 욕망의 결과인 잉여물들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아이티뿐 아니라 제3세계 문제에 대한 해법은 없어 보인다. 화학 섬유가 땔감으로 처리되면서 생기는 공해에 대해 선진국들은 또 얼마나 그들의 ‘무지’를 비웃을 것인가? 이번 아이티 방문에서도 그러한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아이티에 대한 우리의 도움은  베푸는 자의 거드름이 아니라 되돌려주는 자의 뼈아픈 자기반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번 아이티의 방문에서 얻은 가장 귀한 교훈이었다.

김기대 /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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