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도 '개털 모자'가 있을까요?
천국에도 '개털 모자'가 있을까요?
  • 정용섭
  • 승인 2010.03.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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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의 신학 단상(1) '천국 상급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9:24) 아마 성구사전을 이용해서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이와 비슷한 뉘앙스의 텍스트는 성서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것을 빌미로 교인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기기도하고, 심지어는 목사를 향한 충성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모든 성서 텍스트는 그것이 언급되게 된 배경이 있다. 그걸 '삶의 자리'라고 하는데, 그런 배경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서는 이러듯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이용될 개연성이 높다.

위의 본문에서 바울은 왜 달음질과 상을 말하는가? 약간이라도 생명과 존재에 대해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늘나라에서 사람들에게 차별이 있는 상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적인 세계에 어떻게 상대적인 사건이 개입될 수 있는가? 하늘나라에서는 좋은 상이 좋은 상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을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알 게 될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그 하늘나라에서는 상, 또는 상급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신부에게 영화 관람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바울의 이 텍스트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읽어야 한다. 그는 그 당시에 소위 '왕따' 신세였다. 지금은 바울이 그 누구에 밀릴 것 없는 사도 중의 사도로 인정받지만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예수의 권위 있는 사도도 아니었고, 잘 생기거나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를 추중하는 세력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가 설립한 교회에서도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런 분위가가 팽배했다. 그는 지금 신앙고백을 하는 중이다. 달음질과 상은 비유이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설명할 때 늘 비유로 말씀하셨듯이 그는 지금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그의 신앙은 지금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투쟁하고 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절충주의를 따랐지만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오직 한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 하는 달리기 선수처럼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곳을 향해서 집중했다.

그가 내린 결론을 보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바울은 지금 하늘나라의 상급에 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당한 현실을 진술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그가 그만큼 정신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의미이다. 그에게도 불안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사도 베드로 같은 사람들이 가는 길과 자신이 가는 길이 다를 때 느끼는 불안감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중이다. 율법과의 절충과 타협에 빠지지 않고 애오라지 복음만을,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만을 전하려고 한다. 이런 배경에 놓인 바울의 텍스트를 근거로 하늘나라의 상급 운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돼지 앞의 진주이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상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결코 그런 상급 따위에 마음이 가지 않는 법이다. 신랑이 올 그 순간에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기쁨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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