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에는 '금관의 예수'만 있다
한국 교회에는 '금관의 예수'만 있다
  • 김종희
  • 승인 2009.03.04 17: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와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디
죽음 저편에, 사철 푸른 나무숲, 거기 있을까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은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김지하가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니면서 만든 희곡 <금관의 예수> 앞부분에 나오는 이 시를 가지고 김민기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렇게 우울한 노래는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는 암울한 70년대 초반이었다.

▲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간절히 기도하는 저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다이아몬드와 루비와 진주로 단장한 십자가의 예수는 들을 수는 있는 것일까. (왼쪽 사진은 70년대 청계천에서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찍어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고, 오른쪽 사진은 영국 일간지 Telegraph에서 보석으로 장식한 예수상 전시회를 보도하면서 실은 사진이다.)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애원하는 예수

때는 1971년 겨울.

바깥 공기는 차갑고 금세라도 폭설이 내릴 양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 있지만, 따뜻한 성당 안에서 신부는 오후의 나른함을 이겨내려는 듯 커다랗게 하품한다.

헌금도 안 들고 와서 고해성사를 하려는 창녀는 백해무익하고, 사회 정의 문제를 상의하러 오는 사람들은 귀찮다. 길거리에서 덜덜 떨면서 구걸하는 거지와 문둥이 몸에서 뿜어나오는 악취를 맡는 것도 신부에게는 고역이다.

신부에게 창녀굴은 더러운 곳이고, 데모는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교회는 밑 빠진 독에 물만 부어주면 되지, 빠진 밑을 메우는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수녀와 논쟁을 벌이는 것도 짜증난다.

배때기 사장은 구걸하는 거지와 문둥이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그리고 금관을 쓴 예수상으로 고개를 돌려 성호를 긋는다. 예수가 쓰고 있는 금관은 작년 성탄절 때 사장이 헌금한 돈으로 만든 것이다. 사장은 "앞으로도 여러 교회 공사를 나에게 맡겨서 돈을 많이 벌게 해주면,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을 금덩어리로 만들어드리겠다"고 빈다.

사장은 거지와 문둥이에게 "허리 가늘고, 엉덩이 크고, 경험 많고, 나이 어린 아가씨 어디 없냐"고 묻다가 경찰이 다가오자 줄행랑을 친다. 문둥이와 거지에게 삥 뜯으려던 경찰은 사장이 뭔가 켕겨서 도망갔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쫓는다.

문둥이가 무심결에 예수상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부아가 치민다. 자기의 몰골이 한심하게 보인 것이다. 그는 한때 예수를 믿었다. 하지만 성서 속의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인데, 현실 속의 예수는 문둥이의 친구가 아니다. 이 땅에서 예수는 깨끗하고 점잖고 잘 사는 사람들의 친구다. 문둥이는 예수 팔아서 천년만년 잘 먹고 잘 살려는 예수쟁이들을 욕하다가 예수상 밑에 토하고 쓰러진다.

잠시 후,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에 놀라 깨어난다. 예수상을 올려다보니까 예수 눈에서 눈물이 주르룩 흐르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예수는 가시로 만든 관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문둥이가 예수 머리에서 그걸 벗기는 순간 예수가 입을 연다.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어둡고 적적한 이 시멘트의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 속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그 불행 속에 내가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서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받았느니라."

문둥이가 얘기한다. "예수님,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너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오직 저희들만을 위하여, 저희들만의 신전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너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그들은 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들은 나의 제자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의롭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와 너무나 가까이 있는 탓으로, 그들의 귀에는 나의 말도, 너희들 가난한 백성의 외침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날 가두었다."


"예수님, 어찌하면 예수님이 해방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실 수 있습니까? 어찌하면 다시 살아나 저희들에게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를 가까이 하려는 자는 안 된다. 눈앞의 모든 백성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불행을 외면하고 저 혼자서만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안 된다.

의롭지 못한 자도 안 된다.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에 몸을 굽히는 의롭지 못한 자는 안 된다. 용기 없는 자는 안 된다. 권력을 가진 악의 무리가 죄 없는 백성을 괴롭히고 착취하고 기만하고 억압하는데도 항거해 싸우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는 안 된다.

기도만으로도 안 된다. 기도와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너와 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핍박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밖엔 안 된다. 네가 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하리라."


"예수님, 저는 힘이 없습니다. 제 몸 하나도 의탁할 곳이 없는 가련한 놈입니다. 제가 어떻게?"

"아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네가 할 수 있다. 너만이 날 해방하여 내가 너희들과 함께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이룩하게 만들어줄 사람이다. 너의 그 가난, 너의 그 슬기와 어진 마음, 더욱이 불의에 대해 항거하려는 네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자, 가까이 오라. 가까이 와,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내 몸을 자유롭게 하라. 이 시멘트를 벗겨내라. 내 머리 위엔 가시관으로 족하니라……."


문둥이가 예수의 몸에 바른 시멘트를 벗겨내려 할 찰나, 신부와 사장과 경찰이 나타나 문둥이의 손에 든 금관을 빼앗아 예수의 머리에 씌웠다. 예수는 다시 굳어져버렸다.

▲ 영국의 일간지 Telegraph는 작년 9월 영국의 한 예술가가 루비와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3개의 대형 예수상 전시회 소식을 전했다. 가시관, 손목, 심장, 아랫도리를 가린 천, 발목의 못 등을 장식한 보석 가격은 우리 돈으로 1,500억 원에 달하며, 예수상의 무게는 1톤이나 된다. 보석은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 예수의 순수한 희생 등을 의미한다고 했다.
십자가 군병들아, 예수 위해 일어나라!

한완상 선생이 작년에 쓴 책 <예수 없는 예수 교회>를 펼치니, 자연스레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가 떠올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대용으로 만든 황금 송아지, 다윗과 솔로몬이 만든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하얗게 회칠한 죽은 자의 무덤처럼, <금관의 예수>에서 예수쟁이들은 탐욕 덩어리로 빚은 황금 면류관을 예수 머리에 씌었다. 1970년대 금관을 쓰고 박제가 된 예수는 40년이 지난 지금 시멘트 쪼가리 하나 벗겨지지 않은 채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안에 그대로 굳어 있다.

한완상 선생이 보기에 한국 교회에는 가시관을 쓴 예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 교회'인데도 '예수가 없다'고 했다. 금관을 쓴 예수는 짝퉁 예수다. 짝퉁을 진품보다 훨씬 더 명품으로 만드는 탁월한 솜씨를 한국 사람들은 갖고 있다. 짝퉁 예수를 진품 예수보다 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가짐직하고, 믿음직하게 만드는 기막힌 재주를 한국의 예수쟁이들은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보기 흉한 가시관을 내버리고 아름다운 금관을 예수 머리에 덥석 씌웠다. 금관만 씌운 게 아니다. 패배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승리를 상징하는 십자검을 예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화려한 금관을 머리에 쓰고, 날이 퍼렇게 선 십자검을 손에 쥐고, 완고한 교리(敎理)의 흉배를 가슴팍에 붙인 짝퉁 예수를 앞세워 '땅 밟기'를 하고, '여리고 함락 작전'을 펼치고, '영적 전쟁'을 벌이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고 있다. 군가 비슷한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기 들고 앞서 나가 굳세게 싸우라
주께서 승전하고 영광을 얻도록, 그 군대 거느리사 늘 이김 주시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그 나팔 소리 듣고 곧 나가 싸우라
수없는 원수들 앞에 주 따라갈지니, 주 예수 힘을 주사 강하게 하시네

십자가의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 믿어라
복음의 갑주 입고 늘 기도하면서, 너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라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이날에 접전하고 곧 개가 부르리
승전한 군병들은 영생을 얻으며, 영광의 주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


▲ 1970년대 금관을 쓰고 박제가 된 예수는 40년이 지난 지금 시멘트 쪼가리 하나 벗겨지지 않은 채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안에 그대로 굳어 있다. 저자 한완상 선생은 예수에게 덧씌운 껍데기를 벗기고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온전히 만나야 한다고 호소한다.

십자가는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는 것

한완상 선생이 아는 갈릴리 예수, 나사렛 예수는 금관을 쓰고, 십자검을 쥐고, 교리의 흉배를 붙인 예수가 아니다.

그가 아는 예수는 팔을 안으로 굽지 않고 밖으로 굽는 분이다.

"팔이 안으로만 굽는 잘못된 하나님을 앞세우면, 자기들의 탐욕과 독선을 키우려 하기 마련입니다. ……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셨던 예수는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곧 종교적인 이기심과 독선을 철저히 극복하셨음을 뜻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양팔은 밖으로 쭉 뻗는 사랑의 팔입니다.

…… 팔이 안으로만 굽는 한국 교회는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주님은 손이 안으로 말라붙은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손과 팔을 밖으로 쭉 뻗으시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밖으로 뻗는 팔은 자신을 비우는 팔이요, 죽으려는 팔입니다. 사즉생(死卽生)의 팔입니다. 내가 죽음으로 남과 함께 새로운 삶을 부활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멋지게 패배한 분이다.

"세속적 욕망의 차원에서 보면 십자가 지기는 허망하고 헛된 고행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허무한 죽음은 승리 지상주의적 욕망의 철저한 포기를 뜻하기에 역설적으로 놀라운 변혁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값싼 승리주의를 우아하게 이겨내신 예수의 당당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지 앞세워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 앞세우기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짓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는 짓거리입니다. 십자가로 보석을 만들어 자기 신분 상승을 과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플러스(+)의 부적으로 보는 천박한 생각이 깔려 있지요."

그가 아는 예수는 스스로 자기를 비우는 분이다.

"'나는 길이다'라는 예수의 고백에는 나를 길처럼 밟고 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많이 밟을수록 더욱 길다워집니다. 예수는 그렇게 밟힘으로써 인간에게 참 희망과 질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값진 은총입니다. 밟히는 아픔은 일종의 용서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 바로 그 아픔을 길 되신 예수께서 스스로 껴안으시고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선언 속에 전지전능한 신이기에 모두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무조건 경배하라는 독선적 명령과 강요는 전혀 없습니다.

'나는 진리다'라는 예수의 선포는 당신이 진리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탐욕과 독선으로 이끄는 길이거나, 지배와 억압으로 이끄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이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예수의 선포는 인간의 탐욕과 독선과 오만이라는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선포입니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은 육체의 삶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더 소중한 존재의 삶이 있다는 선포입니다. …… 배타적 복음주의 기치 아래(십자가 아닌),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타종교를 경멸하고 차별하고 핍박한다면, 어찌 그것이 예수의 길이겠습니까? 참 생명의 힘이겠습니까? 참 생명은 자기를 비우고 지워 남들에게 진리와 기쁨을 가득 채워주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지독하게 밟히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힘이기도 합니다."


한완상 선생은 예수에게 덮어씌운 온갖 껍데기를 벗겨드리자고 호소한다. 갈릴리의 예수, 나사렛 예수가 입을 열고, 발을 떼고, 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고, 문둥이와 거지를 마음껏 껴안을 수 있도록 해드리자고 호소한다.

말 못하는 금관의 예수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절규하고 있는지 모른다. "제발 어서 나를 구원해주거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