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일에 매달리는 목사와 신자들
어린아이의 일에 매달리는 목사와 신자들
  • 정용섭
  • 승인 2010.05.14 22: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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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의 신학 단상(6) 신앙의 미숙성

요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목사는 신자들을 어린애처럼 닦달하고 신자들은 스스로 어린애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조르는 것 같다. 목사는 신자들에게 믿음 생활 잘하라고 윽박지르고 신자들은 어린애처럼 무언가를 성취함으로써 목사와 하나님께 칭찬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이러다보니 목사도 힘들고 신자들도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닐까?

목사의 목회 행위가 구원론적으로 얼마나 황폐화되고 있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든 삶을 투자해야 할 목사들이 심방과 교회 프로그램과 행정, 더 나아가서 신자들의 일상생활을 돌보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내 생각에는 목사와 신자의 관계가 느슨한 상태로 유지되는 게 서로를 위해서 훨씬 바람직할 것 같다. 이 말은 교회 공동체의 코이노니아를 파괴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그 코이노니아를 긴장감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뜻이다.

목사와 신자 사이가 느슨하게 벌어져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의 코이노니아가 확보될 수 있다는 내 말은 근거가 있을까?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으로부터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의 목회는 거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일방적으로 치중하고 있다. 모든 프로그램들의 중심은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나 신자들을 교회 활동에 집중시키는 것에 놓여 있다.

이런 구조로 교회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끝은 결국 하나님 없이 인간들만의 잔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교회 프로그램을 완전히 철폐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순모임, 셀목회, 제자화, 알파코스, 목장목회, 또는 뜨레스 디아스, 총동원주일 행사 같은 것들은 가능한 대로 폐기하거나 최소화하고 교회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예배를 정상적인 예전(liturgy)에 따라 드려야 하며, 신학에 바탕을 둔 성서공부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적 지평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교회의 전통을 따르다 보면 많은 신자들이 교회 생활을 심심하게 생각할 것이다. 뭔가 화끈하고 눈물 흘릴만한 감동이 없을 때 어린아이들이 심심해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영적인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신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교회가 흡사 시트콤이나 열린 음악회처럼 나갈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정하거나 감정적인 영성에 치우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종교적 선입견이 제거된, 그래서 어떤 사물이나 사태의 내면을 직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 신자들은 영적인 내면이 맑고 깨끗해서 하나님나라를 직면하는 어린이가 아니라 인간 역사 앞에서 불안해하고 그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하고 단지 종교적인 위로를 받으려고만 하는, 말 그대로 철없는 아이가 아닐까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깊은 생각 없이 글을 막 쓰는 게 지혜롭지는 않겠지만 비록 내 글쓰기에 실수가 생기더라도 보이는 그대로 한번 짚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목사는 신자들을 어른으로 대하는 게 좋겠다. 잔소리하지 말고, 모범생 만들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작은 신앙 수준으로 신자들을 몰아갈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좀 놓아두는 게 좋겠다.

예수님은 한 번도 새사람 만드는 걸 말씀하신 적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그대로 인정할 뿐이지 변화해야 한다고, 요즘 식으로 말해서 성화해야 한다고 잔소리하신 적이 없다. 임박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그 하나님나라에 기대서 살아가신 분이 곧 예수님이다. 이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오늘의 목사와 신자들이 왜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보다 더 큰 것을 서로 요구하는 걸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이 자기 소유와 가족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삶 자체를 무시하신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요구하던 유대교의 짐으로부터 민중들을 해방시키셨을 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세상살이의 어려움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고와 짐이었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가르쳤다. 율법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왜 오늘의 목사와 신자들은 다시 율법을 성취하려고 애를 쓰는 걸까?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으로 나의 무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반론을 제기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접자. 다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더 이상 율법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을, 더 이상 율법이 주인 행세 하지 않는 세상을 불퇴전의 용기와 결기로 선포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을 확실히 하자.

더 이상 율법이 무의미해진 세상, 그런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런 문제를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풀어나가는 게 곧 설교이며, 그것을 삶과 역사에서 구체화하고 거기에 자기의 삶을 전적으로 투자하는 게 곧 기독교 신앙이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우리는 신학이 필요하며, 인문학적 사유가 절실하다. 신학과 인문학이 없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 실체를 상실하고 관념과 추상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면 당연한 결과로 이 세상을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어린애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는데, 오늘 너무나 많은 목사와 신자들이 그런 일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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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2010-05-21 19:37:02
그럼..니고데모에게 한 말들의 의미는 무엇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