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타임은 탐욕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서머타임은 탐욕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 김종희
  • 승인 2009.03.09 1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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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여백 없는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서 사람은 도구에 불과

잠자는 사이에 사라진 1시간

성질이 유별난 탓인지, 먼 곳으로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있다. '시차에 적응하기'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한국과 미국을 오갈 때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하는 일이 시계 바늘을 부지런히 돌려 도착지 시간에 맞추기다. 시계만 맞추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과 의식을 순식간에 14시간 앞뒤로 돌리는 사투를 벌인다. 오지도 않는 잠을, 당기지도 않는 입맛을 도착지 시간에 맞춘다. 실효가 있든 없든 장거리 해외여행을 갈 때면 무조건적으로, 본능적으로 이런 짓을 한다. 자발적 고문이다.

시차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생기는 일이기에 딱히 누구한테 불만을 터뜨리기 어렵다. 그저 거기에 나를 맞추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 곳에 가지 않았는데도 멀쩡하던 시간이 한 시간 앞뒤로 바뀔 때 기분은 전혀 다르다. '일광 절약 시간제'(서머타임) 얘기다.

미국 현지 시간으로 3월 8일 일요일 오전 2시부터 서머타임이 시작됐다. 11월이 되면 되돌아오겠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1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서머타임이 일요일 새벽에 시작됐으니 온 가족이 한꺼번에 늦잠 자는 우리로서는 신경 쓸 필요를 못 느꼈다. 다만 예배가 끝날 무렵 교회에 도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작년 가을에는 서머타임이 해제된 걸 모르고 시간에 맞춰 텅 빈 교회에 갔다가 약이 올라서 예배도 안 하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이번 일요일 저녁에는 깜빡 잊고 한국 시간 오전을 생각하면서 전화를 하는 바람에 주일 격무에 지쳐 곤히 주무시는 목사님을 새벽녘에 깨워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문제는 일요일 밤과 월요일 아침의 아이들이다.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9시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보다 몸이 느끼게 해주는 시간에 더 익숙한 아이들은 잠잘 생각을 안 한다. 내일 아침 일어나기 힘들다고 잔소리를 해도 듣지 않는다. 하긴 아이들 입장에서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

월요일 아침 7시. 아내가 아이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때보다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들. 아침 9시에 일어나는 것과 10시에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6시에 일어나는 것과 7시에 일어나는 것의 차이는 작지 않다. 이른 아침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는 것은 14시간 시차 적응하기 못지않게 괴로운 일이다.

시차 적응하기 때와 마찬가지로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새벽 4시, 5시 정도에 꿈과 생시를 왔다 갔다 하면서 괴로워했다. 정신은 몽롱하고 몸은 한없이 무겁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어야 할 시간이 될 때까지 몽롱한 상태는 계속됐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원망의 상대, 분풀이 상대는 없다. 아니 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대다.

▲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위원회를 중심으로 서머타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 주제로 2월 16일 열린 첫 번째 회의. (청와대 자료 사진)
20년 만에 재연되는 효율성 논쟁

한국에서도 1987~88년 시행된 것을 끝으로 사라졌던 서머타임이 내년에 부활할 예정이라고 한다. 경제계에서는 틈만 나면 서머타임 실시를 주장해왔다. 에너지 절약, 생산과 소비 활성화를 통해 국내 수요가 크게 늘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관광 산업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서머타임을 실시하는 방안도 내놓고 있다. 재계의 요구가 이러한데, 친재벌, 친일의 대명사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마다할 리 없다.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내년 5월부터 재개할 뜻을 비쳤다.

최근 정부에서 만든 녹색성장위원회의 설명에 의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서머타임을 시행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 일본, 아이슬란드 등 3개 나라뿐이다. 아이슬란드야 백야 현상 때문에 서머타임이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한국과 일본만 남았다. 게다가 2007년부터 미국이 서머타임 기간을 8개월로 늘렸다. 잘사는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서머타임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또 국민들은 늘어난 한 시간을 이용해 여가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레저 및 관광 산업도 활성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묵사발이 된 대한민국의 지금 경제 상황에서, 여가를 활용해서 레저와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서머타임을 도입하기 전에 여가와 레저와 관광을 즐길 만한 경제력을 회복할 국민이 몇 퍼센트나 될지 모르겠다. '상전 배부르니 종 배고픈 줄 모르는' 꼴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요청으로 서머타임의 효과에 대해 여러 기관이 조사한 적이 있다. 효과가 크지 않은데다가 입증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노동계에서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데 노동 시간을 늘리겠다는 발상 자체를 한심하게 여기면서 반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대부분의 정책처럼, 이 문제도 사회적 갈등의 요소로 번질 것이 뻔하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자행한 것처럼, 사회적 갈등에서 불구하고 마침내는 추진하고야 말 것이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너무 빤하기 때문이다.

전쟁 통해 제도로 굳어지다

▲ 잘나가는 건설업자에다가 골프광이었던 윌리엄 윌렛은 1914년까지 서머타임 도입 안을 의회에 올렸으나 번번이 좌절됐다.
서머타임은 1907년 영국의 건설업자 윌리엄 윌렛이 'THE WASTE OF DAYLIGHT'라는 팸플릿으로 처음 정리했으며, 1914년까지 이 법안이 채택되도록 줄기차게 로비했다. 이명박 정부가 서머타임의 필요성을 역설한 명분처럼, 윌렛도 자기가 좋아하는 골프를 즐기기 위해 낮의 한 시간 여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이 법안은 의회에서 번번이 부결됐다. 미국에서도 1909년부터 법안으로 상정됐으나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전쟁이 바꾸어놓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서머타임을 받아들였다. 전쟁 통에 연료를 절약하겠다는 걸 반대하다가 매국노로 몰매 맞을 건 뻔한 일. 전쟁이 끝난 다음 미국에서 몇 차례 뒤치락대다가 1966년 지금의 법안이 통과됐다.

이처럼 서머타임은 전쟁을 결정적 디딤돌로 삼아 여러 나라에 제도화됐다. 재미있는 건 우리나라에서도 1948년부터 60년까지 서머타임이 실시됐는데, 한국전쟁 때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저 하나 살겠다고 국민을 속이고 도망치는 마당이었으니, 서머타임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여력이 있었겠는가 싶다.

서머타임이 건축업자에 의해 발의되고, 전쟁 통에 제도로 굳어지는 모습 속에 서머타임의 진실이 보인다. 서머타임이 제도화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시간의 양을 인위적으로 늘려서라도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현대 산업 사회 구조 안에서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과 똑같다. 여가, 레저, 관광을 얘기하지만, 그걸 통해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해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기는커녕, 돈독 오른 이들의 끝없는 욕망의 곡간을 터질 만큼 채워주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부릴 뿐이다.

머잖아 "노동자의 일하는 시간만 한 시간 늘어난다, 유지된다", "에너지 절약 효과가 있다, 없다", "생산성이 증대된다, 안 된다", "내수가 진작될 것이다, 소용없다" 하는 숫자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머타임의 본질은 숫자 싸움을 통해 선명하게 가려지기보다는 되레 은폐될 가능성이 높다.

▲ 찰리 채플린으로 상징되는 현대인은 한 치의 여백도 없는 톱니바퀴 같은 사회 구조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비판하다 빨갱이로 찍힌 찰리 채플린

1936년 찰리 채플린이 만들고 주인공을 한 <모던타임스> 첫 장면을 보면 '일체의 여백'도 없이 시계 바늘과 눈금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 이어 '일체의 여백'도 없이 지하철 승강구에서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와 매연을 내뿜는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여백 없는 시간과 여백 없는 공간 속에서 인간은 기계로 전락한 것이다.

기계 노동자 찰리 채플린은 하루 종일 나사못 조이는 일을 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조여야만 하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단편 <소방수>에서 소방관으로 나오는 찰리 채플린은 집합 신고인 벨 소리에 질린 나머지, 전혀 다른 소리가 나도 경기(驚起)하면서 엉뚱한 행동을 벌인다.

그가 유난히 조직 사회, 산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심성을 가졌기도 하겠지만, 누구라도 제정신을 갖고서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쓸모 있는 기계의 부품으로서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산업 사회의 비인간성을 영화로 고발한 그는 현실 속에서 빨갱이로 몰려 미국에서 추방된다. 소설과 영화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진실이다.

▲ 공장이 파업을 해서 기계가 작동을 안 하자 거리에 나간 채플린. 그는 멋도 모르고 깃발을 들고 흔들다가 주동자로 몰려 체포된다.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이 붉은 색이었다는 것도 그가 빨갱이로 몰리는 데 한몫 했다. 하지만 흑백 영화여서 깃발 색깔을 알 수는 없다.
비록 단 한 시간에 불과일지라도 나를 무조건 거기에 맞춰야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서머타임의 침대에 내 몸을 안 맞추면 내 몸의 일부는 톱으로 썰려나간다. 아니면 존재 자체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부정된다.

오늘이야 첫날이니 독이 오른 채 억지로 일어났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독은 서서히 빠지고, 내 몸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적당히 맞춰질 게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이게 참 편하구나" 하고 동조하게 될 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과 의식은 거대한 탐욕의 시계 바늘에 맞춰 잘도 돌아갈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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