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자의 언어 폭력이 되어버린 복음
오만한 자의 언어 폭력이 되어버린 복음
  • 최태선
  • 승인 2010.05.20 0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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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일상의 영성'

"울타리가 없는 산골의 절에서는 가끔 도둑을 맞는다.
어느 날 외딴 암자에 '밤손님'이 내방했다.
밤잠이 없는 노스님이 정랑엘 다녀오다가 뒤꼍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웬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워 놓고 일어나려다가 말고 일어나려다 말고 하면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뒤주에서 쌀을 한 가마 잔뜩 퍼내긴 했지만 힘이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스님은 지게 뒤로 돌아가 도둑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그시 밀어주었다.
겨우 일어난 도둑이 힐끗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 말고 지고 내려가게.' 노스님은 밤손님에게 나직이 타일렀다.
이튿날 아침, 스님들은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노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 밤손님은 암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어느 스님의 책에서 발췌해 놓았던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참 푸근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노스님의 마음이 한 인생을 구했습니다.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범죄의 현장에서 사람의 마음이 바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스님은 훈계 한마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둑의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이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노스님의 마음이 도둑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도둑의 마음속에서 점차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도둑질을 부끄러워하고 바르게살기로 결단할 수 있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도둑질했던 그 사람은 분명 자신처럼 도둑질을 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말없이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노스님처럼. 이 이야기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오늘날 현실에서는 이 이야기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상대방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로만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기보다는 오만한 자의 듣기 싫은 언어폭력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각종 간증 집회나 치유 집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심을 부추기고 결과와 성공이 신앙의 바로미터가 되고, 하나님을 손가락 다루듯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추앙을 받습니다. 자기 교회 교인 수 불리기와 혹시나 하는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사랑과 이해심이 많으신 분이라 그런 사람들의 속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기뻐하실까요? 참으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노스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없이 보여줍니다. 그분의 그러한 반응은 순간적인 해프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삶과 인격이 담긴 자연스런 반응이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비의 마음이 그분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따라 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분의 오랜 삶의 실천과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반응은 그분의 자연스런 일상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빌2:5)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갈3:27)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 우리의 일상이 그리스도처럼 되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급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또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한 번 더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다 놓았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복음을 살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그것도 감동을 주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신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려면 많은 것을 잃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스님들이 난리였던 것은 잃은 쌀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청지기 정신이 참이라면 쌀은 주인을 찾아간 것일 뿐입니다.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청지기 정신입니다.

우리는 울타리가 없는 산골의 절처럼 무방비로 밤손님을 맞아야 합니다. 물론 위 이야기에서처럼 귀중한 쌀을 도둑맞기도 할 것입니다. 그 쌀은 도둑맞기 이전에 스스로 먼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과제는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참으로 '모든 걸 버리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그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구원한 사람들을 마치 북한 사람들의 옷에 달린 훈장처럼, 주렁주렁 가슴에 달고 자랑스럽게 천국에 입성할 것처럼 말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그런 전리품 같은 성과가 아니라 변화된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만큼 우리 마음속에 채워진 그리스도의 마음, 비워진 내 마음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그 마음이 없으면 살 수 없고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 절의 스님들 모두가 노스님 같지는 않았습니다. 깨달은 마음으로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이기 마련입니다. 만일 노스님의 행동이 알려졌다면 노스님은 다른 스님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노스님과 나이가 비슷한 연배로부터는 더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도둑이 독실한 신자가 되어 나타났을 때 즈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노스님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 노스님을 존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시기는 주님 앞에 서는 날일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때까지는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말없이 진리를 실천하고 오래도록 기다려야 하는 삶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노스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 또한 그러해야할 것입니다. 말없이 복음을 살아 사람들에게 자연스런 감동을 주고, 사람들을 변화시켜 제자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일이 우리 주변의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교회들 또한 울타리 없는 산골의 절처럼 되어야겠지요. 잃을 것이 없다면 울타리가 없어도 불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 세상은 그곳에서 여호와의 불성곽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슥2:5) 세상의 울타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신 보호하심과 공급하심, 그리고 그 안에서 영광이 되시는 우리의 하나님,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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