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면 생각나는 어느 장로님의 울부짖음
5월이 되면 생각나는 어느 장로님의 울부짖음
  • 김명곤
  • 승인 2010.05.2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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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 30년의 비망록'…미국 땅 쓰레기통에서 건져낸 '광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도 않았고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눕지도 않았다…"

1970년대와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주옥같은 참여시를 쏟아놓은 시인 김남주는 대한민국의 5월을 이렇게 노래했다. 5.18을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관통해온 그에게 5월은 낭만 가득한 서정시를 쓰기에는 너무나 아픈 계절이었다. 어디 김남주뿐이랴. 그 봄날 열흘 내내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은 잊힌 도시에 갇혀 ‘몰매’를 맞아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몰매의 진실을 알아챈 사람들 모두에게 5월은 부끄럽고도 아릿한 계절이었다.

잿빛 공간, 그 푸르름의 5월

 

   
 
  ▲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멍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아이. 광주 상흔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눈망울이다. ⓒ5.18기념재단  
 

30년 전 1980년 5월, 서울에서 내가 맞은 5월은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했다. 간지러운 봄바람에 조는 듯 꿈꾸는 듯 걷는 서울 거리는 따스한 봄볕을 맘껏 뿜어내고 있었다. 교정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개나리, 진달래는 후각을 자극하며 26세 복학생의 춘심을 한껏 유혹하고 있었고, 노천극장 저 편에선 곧 벌어질 5월 축제를 대비해 음대 합창반이 '오월의 아카시아'를 고르고 청아한 화음을 뽑아내고 있었다.

"오월의 아카시아는 가슴에 스며 드네
이 젊음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날으리…
오월이면 날으리 내 맘에 희망 싣고
이 젊음 파랑새 되어 넓은 하는 날으리"

고약한 고참의 고문에 가까운 매질에 밤마다 곡소리를 질러댔던 지긋지긋한 군대 생활에서 막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노래만 같았다. 도대체가 이처럼 상쾌하고 꿈결 같은 계절에 무슨 말 같지 않은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랬다. 수개월 전 벌어진 군사 쿠데타로 더렵혀진 서울 하늘은 그 봄 내내 시민들의 마음 한편에 잿빛 그늘을 드리우기는 했으나, 계절만은 그 푸르름의 빛깔을 더욱 짙게 뿜어내고 있었다. 교문 밖에서 흘러들어온 최루탄 냄새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5월은 그때에도 여전히 푸르렀고, 깡촌 출신인 나는 그 푸르름에 흠뻑 취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교회 청년부 모임을 끝내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신촌의 '데모 대학' 운동권 멤버 중 2인자이며 같은 교회 청년부원이기도 했던 동년배 친구를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다소 상기된 표정의 그가 잰걸음으로 다가서더니 다짜고짜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수배를 피해 다니던 그는 "광주에서 끔찍한 대살육이 벌어져 2만 명도 넘게 죽었다"며 결사대를 조직해 광주로 가려 한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아무렴 대명천지에 2만 명이 죽었다는 건 뭐고 결사대는 또 뭐란 말인가… 당시 최고의 운동권 서적이었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교회 여자 청년들에게까지 나눠주며 ‘선동’을 일삼던 그였다. 나는 그의 말을 '괴담'으로 무시해 버리고는 바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기로 작정한 이유는 또 다른 데 있었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있었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박정권이 기업체에 압력을 넣어 수개월간 동아일보의 광고를 중단시키자 광고란을 백지로 남겨두고 신문을 발행한 사건) 당시, '언론학도로서의 양심을 지키자'는 선배들의 선동에 못 이겨 엉겁결에 데모대 전위에 나섰다가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재수 없게' 붙잡힌 전력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 경찰서 보안과 취조실이라는 데 들어가 조서를 쓰고 시멘트 바닥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두들겨 맞다 자칭 ‘고등학교 선배’라는 수사관의 ‘봐주기’로 풀려났다.

내가 그 운동권 친구의 '선동'을 무시한 것은 은연중 이 알량한 전력으로 '사회적 책임에 있어 그래도 면피는 하지 않았느냐'는 자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선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더 깊은 데 있었다.

 

   
 
  ▲ 공수부대원들이 교련복을 입은채 쓰러져 있는 학생에게 달려들어 곤봉세례를 하고 있는 모습. ⓒ5.18기념재단  
 

사회적 무관심, 그 '양심의 마스터베이션'

나는 1901년에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동네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교회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교회 마을의 분위기에서 권위와 질서에 순복하는 법을 몸에 익혔고, "곧 썩어 없어질 하릴없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영혼을 건져내는 일이 신자의 본분"이라는 가르침을 골수에 새기며 자랐다.

대학 1,2학년 시절에는 대학생 선교단체에 몸담고 강의실을 돌며 '영혼을 구원하러' 다녔고, 사진병으로 근무해 비교적 이동이 자유로웠던 군대에서도, 군 제대 후에도 이 일은 계속되었다. 그 즈음 나는 몇몇 마음이 맞는 후배들과 광주와 해남 일대를 도는 ‘전도 여행’을 가기로 맘먹고 있었다. '개인 영혼의 구원'이 내 삶의 테마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개인이 변화하면 세상이 변화한다"는 일직선적이고 결정론적인 신념 체계에 깊게 젖어 있었던 처지로서는 감히 '썩은 사회를 뒤엎겠다'고 나서는 그 운동권 친구의 경거망동을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개인과 사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든가, '개인의 구원은 이웃의 키 이상 넘을 수 없다'는 '구원'에 대한 통전적이고 전인적인 관점을 사고하기에는 나는 턱없이 철없고 완고하기만 했다. '백이 숙제 귀씻기'류의 개인윤리에 천착하며 '양심의 마스터베이션'을 즐기고 있었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하여 "공수부대 군인들이 길가는 시민들을 마구 잡이로 난자해서 000명이 죽었다더라", "임산부와 길가는 여대생을 어찌어찌 해서 어찌어찌 됐다더라" 따위의 흉악한 루머들이 서울 바닥을 떠돌고 있을 때,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에게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당시 이디 아민이 통치하던 아프리카 우간다에서나 일어났음직한 그런 야만적인 사건이 선진 조국 문턱에 이르렀다는 우리 땅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5·18 광주'는 급진 혁명을 꿈꾸는 재야 운동권이 꾸며서 엮어낸 조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 한 공수부대원이 고교생으로 보이는 학생을 곤봉으로 내 려치고 있는 모습. ⓒ5.18기념재단  
 

심장을 쥐어뜯던 장로의 기도

그러던 내가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고국을 떠나 푸른 꿈을 안고 유학길에 나선 후부터였다. 온통 ‘선진조국 건설’에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차압당한 채 살아왔던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그런대로 적응하며 즐겁게 살아왔던 내게, 유학은 기존의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분명히 기억 컨데, 그날은 1987년 겨울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교회에 함께 가자며 기혼자 아파트 맞은편에 살던 ‘광주 부부’ 집 방문을 두드리려다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문 앞에 멈칫 서고 말았다. 안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죽인 채 듣다보니 누군가 기도를 하는 소리였다. 2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절절한 ‘신원’의 기도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고, 아버지 하나님, 천하에 저런 나쁜 놈들을 가만 놔두시겠습니까. 아이고, 흑흑 아이고, 까치 새끼 같은 애를 매달아(?) 질질 끌고 가기까지 했어요. 아이고, 전두환이 저런 찢어죽일 나쁜 놈을… 아이고 하나님, 흑흑 컥컥"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다. 울분과 탄식과 원망의 외마디였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어른 목소리의 그 기도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 도망치듯 황망히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잔설이 쌓여있던 집 뒤켠의 긴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한참이나 몸을 식혀야 했다. 뭐랄까. 느닷없이 거대한 몸집의 누군가를 마주쳤고, 넓적한 손으로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세게 따귀를 후려 맞은 느낌.

얼마 후 우연한 자리에서 그 어른이 LA에서 방문한 가까운 친척으로 교회 장로라는 사실, 그리고 LA와 뉴욕, 캐나다 등지에 광주에서 피신해온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으나, 차마 가족 중 누가 ‘광주’에서 변을 당했는지는 묻지 못했다. 언젠가 함께 운동을 하다 슬그머니 ‘광주’ 이야기를 꺼냈더니 뭔가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찌어찌 해서 뭔가를 들었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남편의 시체가 담긴 관 앞에서 흐느끼고 있는 젊은 여인. ⓒ5.18기념재단  
 

미국 땅 쓰레기통에서 건진 '광주'

내가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맞은 것은 박사 과정을 위해 플로리다로 학교를 옮긴 1년 후인 1989년 5월 말 어느 날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페이퍼와 페이퍼, 시험과 시험에 지쳐 있다 학기가 끝나 여유로운 낮잠에 빠져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찾아와 아무개 아빠가 공부 끝나고 급히 귀국하며 부탁했다며 함께 뒤처리 좀 하자고 하여 졸린 눈으로 불려 나갔다.

 

   
 
  ▲ 5.18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그날 기혼자 유학생 빌리지 공동 쓰레기통에 동료 유학생이 남기고 간 옷가지와 변변치 않은 살림도구 등을 던져 넣다가 나는 일생일대의 ‘횡재’를 하게 되었다. 20년이 넘도록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횡재품은 다름 아닌 10여 권의 소설과 비소설류 책들이었다.

그런데, 평소 말없이 먼발치에서 목례를 하고 지나칠 정도의 친분 밖에 없던 그가 놓고 간  책들 가운데 한 가운데가 쩍 쪼개져 실밥이 나풀거리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뭘까’ 펼쳐 본 책은 황석영이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였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릴 뻔 했던 그 책은 여름 내내 나를 잠 못 이루게 하였다.

한 여름 이국땅 쓰레기통에서 건진 광주의 실체는, 홍희담의 <깃발>에 이어 임철우의 <봄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촘촘하고 적나라하게 확인 되었고, 그때마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이후로 보게 된 몇 편의 ‘광주 비디오’는 상상 속의 5.18에 색을 입히고 입체감을 더해 주었다.

5월에 5월을 거듭하며 광주의 진실이 역사의 앞 바다에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분명 소름 돋게 하는 충격이었다. 운동권 친구가 허풍으로 말하던 '광주'는 2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느낄 만큼, "6·25때도 그런 장면은 보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올 만큼, 어느 시인이 읊었듯 '참새도 세상을 뜰 만큼' 그렇게 참혹스런 사실이었다. 이후로 매년 5월 어간에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마다 일어난 분노에 치를 떠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뒤늦게 ‘역사’에 철이 들어 알게 된 사실은, 1980년 5월 18일을 관통해온 세대는 어떤 형태로든 광주 체험으로 인한 그 어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5월이 되면 세상에 대한 것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밀려들었고, 이에 더하여 갖가지 감정이 뒤섞이고 엉켜져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되기 일쑤였다.

광주는 왜 이다지도 불편한 존재인가

그러나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분노’라는 감정도 세월이라는 약탕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광주의 진실로부터 생긴 분노는 어느 날부터인가 인기에 목마른 정치꾼들의 ‘망월동 참배’와 ‘진상규명’ 제스처에 ‘세탁’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훈장이 주모자 그룹의 정치권에 의해 수여되고부터는 분노는 시나브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 사그라지기 시작한 분노는 6·29라는 고단수 묘약에 완전히 풀이 꺾이게 되었고, 88올림픽의 휘황한 팡파르 속에서, 그리고 천민자본주의의 질탕한 단내음 속에서 급기야 '불편함'으로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5.18 특별담화’에 이어 ‘진상조사’의 칼을 빼들어 한 때 가슴을 설레게 했던 문민정부 YS가 "광주를 역사에 맡기자"는 요상한 선창을 하고부터는 공사석을 가릴 것 없이 '광주'는 불편한 이야기로 우리를 옥죄기에 이르렀다.

그랬다. 광주는 언제부턴가 우리를 불편하게 했다. 그것은 '예민한 안보 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난제'라서 불편했고, 전혀 광주를 말할 수 없던 시절에 가졌던 습관적 두려움 때문에 불편했고, 역사의 대 반전이 이루어져 피해를 입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불편했다.

그리고 지금도 광주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다. 특정 지역 사람들이 관련돼서 불편하고, 화해와 화합의 시대에 걸맞지 않는 과거사라서 불편하고, 마음의 평안을 깨서 불편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직도 광주냐’고 핀잔하는 사람 역시 광주가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법정에 선 광주의 두 주역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5.18기념재단  
 

'광주'를 외치면 '양심'으로 답하라

그러나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더욱 불편하게 다가오는 광주. 역사를 운행하는 조물주는 생략하거나 건너뛰기도 허용치 않고 꼬박꼬박 우리의 월력 속에 5·18을 챙겨 넣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잊었는가 하면 다시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불쾌와 분노의 언저리를 맴돌게 하다 불편하게 하는 광주. 우리는 무슨 이유로 우리네 삶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광주로 인해 이다지도 불편한가. 단지 위에 열거한 잡다한 현실적 이유들 때문인가?

아니다. 진정 아닐 것이다. 우리가 광주로 인해 불편한 진정한 이유는, 역사의 하나님이 애초부터 우리 내부에 교묘하게 심어둔 '양심의 뿌리'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양심의 뿌리를 5월의 광주 언저리에 와서 건드리고 있는 그의 꼬장꼬장함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우리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광주'에 무관심 했고, 우리의 무관심으로부터 나온 사회, 심리적 단절은 1980년 5월 열흘 내내 광주를 고립시켰고 질식케 했다. 독일 대중이 침묵으로 히틀러의 나치집단에 동조한 것처럼, 못들은 채 모르는 채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서 전두환 일당의 광주 살육에 동조한 것이다.

나치즘 앞에서 중립을 말하는 사람은 ‘동조자’에 불과하다는 카알 야스퍼스의 질책은 정말 옳은 것이었다. 어떤 사태가 치명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객관’을 말하는 것은 그 치명적인 방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라는 하워드 진의 지적 역시 백번 타당한 것이었다.

‘운명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고백하건데, 우리는 ‘광주’의 공범자였다. 공범자는 항상 껄적지근하고 불편한 법이다.

하여, 1980년 5월의 광주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1980년 5월의 '광주'는 더 이상 지명이 아니다. '광주'는 죽어 가던 양심을 일깨운 우리 시대의 '암호'다. ‘1980년 5월 18일’을 경험한 세대 누구에게든 정색하고 나지막하게라도 ‘광주!’를 말해보라. 양심에 아무런 출렁임 없이 유유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다시, 광주는 한국인들의 무뎌진 양심에 날을 세우게 한 암호다. 더하여, 죄악이 무엇인지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우리시대의 암호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기념식장 진입을 시도하던 한 유가족이 경찰의 제지로 들어가지 못하자 "어떻게 살아온 30년인데...."하며 오열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이주빈  
 

능멸 당하고 있는 ‘광주’, 그리고 우리의 과제

역사의 우연은 과제를 안겨준다고 했던가. 26세에 서울에서 처음 만났던 광주, 그리고 늦깎이 유학시절에 새롭게 다시 만난 광주는 어느 날 우연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갈대밭에서 ‘우연히’ 건져진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 것처럼, ‘우연히’ 갈릴리에 던져진 예수가 세상의 구원이라는 대 과제를 안게 된 것처럼, 장준하 선생의 우연의 죽음이 문익환에게 '남북화해'라는 과제를 안겨준 것처럼, ‘광주’는 어떤 과제를 던져 주었다. 단언하건데, 이 과제는 피하려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섭리에 의해서 맡겨지는 것일 터이다.

과제는 무엇인가. 분단 상황에서 일어난 5.18 광주항쟁에서 우리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렇게도 부르짖던 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 대접 받는’ 민주주의 세상이었다. 누군가 말했듯, 광주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기억에 다름 아니다. 하여, ‘오월 광주’는 어제를 기억하는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퍼덕퍼덕 오늘을 살아 숨 쉬는 역사여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구원의 단초를 제공해 준 광주는 ‘모래시계

’나 '화려한 휴가'류의 드라마로 극화되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고, 정치·이익 집단에 의해 기념되어 석화(石花)의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박재된 기념물로 참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30년이 흐르며 광주를 불편해 하는 틈새를 노린 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도도한 광주의 생명력을 고사시키려는 자들에 의해, 심지어는 그 주범들에 의해 광주는 겁탈과 능욕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이다. 30년 전 광주를 상대로 분탕질을 자행했던 자들은 '우리가 언제 총질을, 언제 칼질을 했느냐'고 대들더니, “광주를 다시 조사하자”는 헛소리까지 질러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적반하장에 이런 언어도단적 능멸이라니!

그 주범들에 의해 오월 광주가 능욕을 당하더니, 이제는 이들의 손자뻘 되는 MB 정부가 “노자 좋구나” 방아 타령으로 장단을 맞추었단다. “에헤~ 에헤야~ 우겨라… 반 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기는 꽃잎이 앵도라졌다.” 이들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노자 좋구나… 에헤~ 에헤야~ 우겨라… 오월 광주는 반 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기는 민주의 꽃잎이 앵도라졌다’ 이런 우롱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30년을 지나며 오월 광주가 농락을 당하며 그 의미가 희미해져 가는 오늘, 안으로는 무뎌져 가는 우리의 양심을 다시 한 번 곧추 세우고, 밖으로는 꺼져가는 민주의 등불을 다시 밝혀내는 행진에 나서야 할 때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제단에 몸을 던진 님들에 대한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내는 일일 터이다.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라”던 시인의 고백에 아직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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