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설교권 문제 어떻게?
평신도 설교권 문제 어떻게?
  • 정용섭
  • 승인 2010.05.25 21:33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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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의 신학 단상(6) 만인제사장직과 설교권

'평신도들에게도 설교권이 허락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주로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대화의 주제로 제기되는 것 같다. 원칙적으로만 말한다면 설교권이 목사에게 독점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옳다. 사도들이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도 아니지만 설교했으며, 교회 역사에서도 평신도로서 위대한 설교자가 된 이들이 적지 않다.

침례교회 같은 회중교회는 원래 전문적인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체제를 운용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평신도들의 설교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요즘 서울에는 이렇게 평신도 설교권이 보장된 교회도 여럿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말씀의 영성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진행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신도의 설교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성직자에게 설교권이 배타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과 설교 행위의 전문성을 내세운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똑같은 반론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기름부음은 반드시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들에게도 해당되며, 현재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전문성이 확보되었다는 논리도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이에 관한 논란은 아직 정리되지 못한 실정일 뿐만 아니라 교회 직제와 관련된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주로 평신도의 설교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신학적 근거로 제시되는 만인제사장론이 과연 설교권의 개방을 위한 중요한 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직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슬로건 중에서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교회 업무에 투자하는 사제들만이 아니라 세속 직업을 갖고 있는 평신도들도 역시 동일하게 사제라는 의미의 이 만인사제직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다.

이런 사상이 결국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수많은 사회 혁명운동의 단초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는 만인제사장론에 근거해서 오늘 목사에게 독점되어 있는 설교권이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가 제창한 만인제사장직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확실하게 정리해야만 한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무시될 경우에 이런 신학 개념은 왜곡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과연 루터가 평신도의 설교권까지를 배경에 두고 이런 용어를 사용했을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은 오직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해서만 평신도들의 사죄가 가능하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도입된 신학 개념이다.

예컨대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하기 전에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드리는 이유는 사제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의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각각의 신자들은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직접 사죄의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만인제사장론을 평신도의 설교권이 가능하다는 논리적 근거로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루터가 비록 설교권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의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확대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건 아니다. 더구나 설교 행위가 예배의 한 순서라고 한다면 사제 없이도 각자가 모두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론과 평신도에게도 설교권을 보장하라는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확대해석하기 시작하면 그리스도교 교회는 완전히 무정부적 혼란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설교할만한 준비가 전혀 안된 평신도들까지 설교하겠다고 나선다면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사죄권의 남용에 대한 비판인 만인제사장론을 평신도의 설교권에 대한 근거로 삼는 건 신학적으로도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지혜로운 게 아니다.

그렇다면 설교권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것은 교회의 카리스마(은사)에 속하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본질을 이런 카리스마론(論)에 근거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모든 지체가 몸에 붙어 있지만 각각의 기능이 다르듯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의 기능도 역시 다르다. 이런 구도에서 본다면 목사도 역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고유한 기능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 기능이 곧 아우크스부르크 신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설교와 성례전 집행이다.

물론 여기서 또다시 왜 하필 목사에게만 이런 카리스마가 주어졌는가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겠다면 말이 되겠는지. 간호사가 아무리 임상 경험이 많다 하더라도 의사를 제쳐놓고 수술을 집도하겠다면 말이 되겠는지.

일정한 신학 교육과 목회 임상을 거쳐 교회가 공식적으로 목사로 인정한 사람에게만 설교권을 보장하는 제도는 교회의 카리스마 원리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어쨌든 평신도의 설교권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은 결국 명실상부한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한 목사의 자업자득이라는 건 분명하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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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능력 2010-06-02 15:29:36
복음이 능력이니 능력있는 사람이 설교 하면 되는거 아닌가요?

Sam 2010-05-28 19:17:20
평신도의 설교권과 마찬가지로 목사의 교회 운영권도 짚어 보아야 합니다.

귀동양 2010-05-27 11:03:37
고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