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의 대상? 대형 교회 목사 혹은 예수
선망의 대상? 대형 교회 목사 혹은 예수
  • 정기호
  • 승인 2010.06.0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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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올바른 선망의 대상이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가 아닌 이방인 지역에 바울이 개척 전도한 지역 교회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인 출신으로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이방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기독교가 어떤 위치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지상의 교회에 크게 공헌하신 분입니다. 에베소서를 공부하면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야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러워하여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그린 마음을 '선망'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개처럼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선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인간은 교육의 동물이라 태어나자마자 자본주의 교육을 받으면 '자본주의자'가 되며, 사회주의 교육을 받으면 '사회주의자'가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주변 환경은 한 생명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한국에서 자나라는 어린이들의 대부분은 불행합니다. 성장기에 마음껏 즐기지 못 하고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밤 10시가 넘도록 학원에 붙들려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어 열풍이 불어 조기 유학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족의 행복과 불행을 경험하며 아름다운 정서가 형성되어야 할 시절에 부모님들과 떨어져 생면부지의 사람과 생활하게 되는 문화적인 충격은 정서 불안과 같은 문제를 나타나게 합니다.

따라서 나쁜 친구들의 유혹에 넘어가 마약에 손을 대게 되고 결국은 중독자로 전락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부모들의 영어 콤플렉스를 아이들을 통하여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려다가 많은 재물을 허비하고 자녀의 인생도 망가트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운동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 선망의 대상입니다. 목사는 대형 예배당 지어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잘못된 선망의 대상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수십 세대를 거쳐 대형 예배당 짓다가 '면죄부'를 발행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대형 예배당 지어 봉헌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반석위에 세운' 무형의 교회를 세우셨을 뿐입니다. 마틴 루터의 개혁 일성은 '대형교회'는 인간들이 세운 건물뿐이라고 경멸하였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을 바르게 선택하여야 합니다. 남이 선택에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하여야 합니다. 최근 기독교 신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되어 기독교회는 타락의 늪으로 깊이 빠진 상태입니다.

자녀교육에 성공한 사람, 빈 손들고 미국에 와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 거부가 된 사람 등등 입니다. 그들의 간증을 듣고 때로는 불신앙적인 발언과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여도 '아멘'하는 분위기는 기독교 신앙의 현주소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삶의 모습과 사상을 성서(복음서)를 통하여 발견하고 따르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그분을 3년 반이나 따르면서 동고동락했던 12 제자들도 그들의 마음 안에 예수가 점령(이를 성령 충만이라고 함)하기 전에는 세상의 권력 명예, 부와 같은 것을 누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인 줄 오해했었기에 어머니의 치마 바람을 동원하는 다툼 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기에 정치권력을 쥐기는커녕 로마의 정권 아래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현장을 보고 과거의 직업으로 발 빠르게 되돌아가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자 '예수를 따르는 길'은 육(자존심, 자아)이 죽어야 영이 산다는 간단한 공식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구는 하루 24시간, 낮과 밤이 있으며,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하나님의 공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공식을 잘 따르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공식을 무시하고 “주여 믿습니다”, “내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 손해입니다”와 같은 억지를 부리면서 자연의 법칙(공식)을 “믿음” 이라는 말고 허공을 치고 있습니다. 공식을 만드신 하 나님께서 얼마나 웃으시겠습니까?

육이 죽어야 영이 산다는 공식을 깨달은 제자들은 로마의 철권 앞에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다가, 엄청난 고문을 받고 화형을 당하거나, 피부의 껍데기를 벗기는 고문을 받거나, 거꾸로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하거나, 돌메 맞아 죽거나 했습니다.

12 제자들의 감화를 받은 제2세대의 제자들 가운데 스데반과 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죽음이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이 있었음에도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하니 이 죄를 저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요”고 간구했습니다. 이 죽음의 현장 에는 사울(바울)이 있었고,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선망의 대상은 스데반처럼 담대히 시험을 이기고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여 순교함이었습니다. 즉 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멋지게 죽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의 현장에서 증인으로 있었지만 예수가 바울을 점령한 후 스데반은 바울에게 있어서 선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직접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는 없었으나 소문을 들은 베드로는 스데반처럼 예수를 위하여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후에 베드로는 로마의 정권에게 체포되자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나는 거꾸로 십자가의 죽음을 달라”고 요청하여 거꾸로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제가 40여 년 전 신학교를 다닐 시절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랑감 선호도 조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사업가, 의사, 법조인, 등 전문인들이 선호도에 상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전도사나 목사는 이발사 다음의 순위를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대형 교회 목사의 아들이 목사라고 한다면 신랑감 선호도로 1위를 달린다고 합니다. 젊은 여성들의 눈에 보기에 목사라는 직업이 신랑감 선호도가 높다는 말은 기독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서울 장안의 소위 스카이 대학 출신 여성들이 다시 신학교를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순수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분들이 있겠지만 대형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의 부인이 되려고 하는 지원자들도 상당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잘못된 길을 들어 선 것입니다.

바울·베드로·스데반이라는 이름을 자녀들에게 지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의 이름을 거울삼아 살라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과는 관계없이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선망의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그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 성도들로 삼는다면 바른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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