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평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
'그리스도인에게 평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
  • 최태선
  • 승인 2010.06.25 0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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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목사의 기독교적 평화 이해에 관한 소고 I

1948년 세계 보건 기구는 건강을 "건강이란 질병이나 불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및 사회적으로 완전한 안녕 상태"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보는 협의의 관점을 넓혔다는 점에서 건강에 관한 광의의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관점과 대처방안이 현저하게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평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평화에 대한 관점과 대처 방식이 현격하게 달라집니다. 평화에 관한 정의는 협의와 광의가 아니라 부정적인 평화와 긍정적인 평화로 나누어집니다. 평화에 대한 부정적인 정의는 "전쟁 부재"입니다. 그것을 부정적인 정의라고 말하는 것은 평화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이 여러 부정적인 측면을 가질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평화에 관한 이해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평화의 이해는 전쟁의 부재를 평화로 규정함으로써 모든 현상유지와 국가체제의 모든 상태를 긍정해 줍니다.(과도한 공권력, 독재, 인권 침해, 빈부격차 등)

이에 반해 평화에 대한 긍정적인 정의는 "평화가 사회정의를 지배하는 상태, 즉 삶을 위한 능력과 수단이 공평하게 분배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갈등을 일으키는 파벌들이 한 체제로 통합되는 상태를 말하며 상반되는 파벌의 이해가 합의점을 찾아 파벌의 이해가 지양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상반되는 이해를 가진 파벌들이 합의점에 도달하거나 한시적이라도 도출된 합의가 유지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평화가 세상에서 실현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독교적 평화 이해는 이러한 일반적이고도 학문적인 평화의 이해와는 다른 관점을 세상에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정의이든 긍정적인 정의이든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평화의 정의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평화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평화의 개념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관점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세상의 평화와 하나님의 평화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 속에서는 자주 이 둘이 혼돈되었고, 점차로 세상의 평화가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평화를 압도하거나 하나님의 평화를 이상화시켜 경원시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신앙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공산당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입장은 그 한 예가 될 것입니다. 특히 전쟁부재라는 부정적인 평화의 정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평화를 부분적으로라도 하나님의 평화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중대한 과오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 다시 말해 정의와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 속에 있다고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적 평화 이해는 그 내용적으로 긍정적인 평화, 곧 사회적 정의의 상태와 더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바와 같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 평화의 주장자들이 말하는 평화 역시 인간에 의한 평화이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완전한 평화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평화 이해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상태에 있는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평화이해에서는 평화를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과정'이란 평화 그 자체라는 목표를 향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과정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차원과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의라는 목표를 지향하려는 끊임없는 항상 새로운 모든 노력과 시도를 의미합니다.

평화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평화를 극소화로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나라와 인간의 진정한 인간됨에 반하는 요소들을 극소화 하는 것이 곧 기독교적 평화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극소화란 지속적 감소를 통해 제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제로에 수렴하는 과정입니다. 접합이 아니라 수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한 완성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임을 믿으며 또한 그때까지 인간의 노력 또한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극소화란 항상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는 영원한 가능성을 말합니다.

하나님나라에 모순되는 현상으로서의 결핍은 폭력, 가난, 억압 그리고 불안입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동의하는 내용이며 성경의 메시지에도 부합하는 것들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폭력, 인간 외적인 자연에 대한 폭력, 인간에 의한 인간과 자연의 착취, 여기서 생기는 가난, 억압 그리고 불안이 우리 삶의 정황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결과물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들에게 인간 자체로서 극복할 수 없는 결핍의 현상인 것입니다. 인간을 짓누르고 있는 이러한 것들로부터의 해방이 곧 복음이 약속하는 해방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나라와 하나님나라의 정의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말하는 평화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며 그것은 곧 폭력, 가난, 억압, 불안의 극소화입니다. 극소화라는 것은 일종의 긴장상태 혹은 최선의 노력을 염두에 둔 의도적 선택입니다. 현실이란 언제나 상대적이거나 의도하지 않은 반대급부라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지만 그 자체를 극소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전능하지 않은 인간이 가능한 완전해질 수 있는 차선책으로서의 최선입니다. 또 그것만이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폭력, 가난, 억압, 불안은 여전히 있습니다. 디만 그것들을 극소화하기 위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또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폭력이 조장되거나 억압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과 같이 극소화가 자체 모순되는 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폭력, 가난, 억압, 불안의 종식을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온전한 종식을 가져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폭력, 가난, 억압, 불안과 투쟁하여야 합니다. 그 투쟁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은 그것을 말해주는 대표적 예입니다. 십자가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영원한 표상입니다. 그리고 유무상통하며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이 세상 한 복판에서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나라가 존재할 수 있음을 말없이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그 평화는 막연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신적인 평화가 아닌 구체적 현실 속에서, 또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구체적인 근거이며 또한 지향해야할 목표입니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인 개인의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세상의 소망이며 빛이라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세상에 보여주는 가시적인 징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란 물고기에게 있어서의 물과 같습니다. 평화를 호흡하는 그리스도인. 우리가 명심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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