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 김기대
  • 승인 2010.07.28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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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신학하기'(7)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열왕기상 19:14, 18)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는 청정 지역에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세상 사람이 몰라주어서 그렇지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며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무능력과 무욕망을 혼돈해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만큼 죄도 짓지 않았으며 가능하면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만큼만 살아 주어도 세상은 더 아름다운 곳이 될 터인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깨끗이 살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며 기쁜 곳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약’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유혹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연예인의 선행이 칭송되는 그런 교회에 다닌다. 내가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믿는 것은 자신을 기준에 두는 자유주의 신학적 접근인데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은 신실하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그 아름다움 뒤에 쪽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공부 때문에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아이들, 개발의 이름으로 훼손되는 자연의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는 숨겨진다.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은 나 같지 않은 죄인들과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 점점 외골수가 되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표정은 밝음 대신 항상 전의로 가득 차 있고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바알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7,000명이나 더 있다고 한 그 말을 듣지 못한 채 세상에 자신만이 의롭다는 몽상에 빠져 산다. 그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 노력하지만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을 알아버리고 자기 의에 더욱 집착한다.

바리새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주변에서 쉽게 발견되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다. 세상의 아름답지 못한 면을 외면하는 앞의 부류의 사람들의 삶은 슬프다. 눈물을 쏙 빼야 비극이겠는가? 보아야 할 진리를 외면하면서 항상 행복한 웃음이 가득 찬 얼굴을 가진 인생은 슬프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고쳐보려다가 좌절하는 인생 또한 슬프다. 어차피 안 되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그 슬픔은 더욱 아프다. 인생이라는 것은 아니 역사라는 것은 이처럼 비극의 연속일 뿐일까?

 

   
 
  ▲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한 장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세상을 여전히 아름답게 보고 싶던 미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미자(윤정희분)는 손자 하나를 데리고 어렵지만 아름답게 살아가려는 할머니다. 손자를 떠맡기고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딸도 밉지 않다. 외로운 노후에 보살펴 주어야 할 손자가 있고, 그 때문에 자주 통화하는 친구 같은 딸이 있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웃들과 나누는 밝은 인사 속에 세상은 행복하다. 이 별일 많은 세상에서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지만 미자는 대중가요 제목처럼 그야말로 '별일 없이 산다'.

게다가 간병인으로 중풍 걸린 부자 할아버지를 돌보는데 그가 가끔은 용돈도 가외로 얹어주니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꽃다운 소녀의 자살한 시체가 동네 강에 떠오른다. 미자는 그 소문을 듣고 소녀가 궁금하다. 이 나이 많은 할머니도 이렇게 기쁘게 살아가는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소녀가 죽을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기쁘게 살아가던 미자는 소녀가 죽은 이유가 궁금하다. 이 인생의 의문 앞에서 해답을 찾고자 동네 문화교실에서 시를 배우려고 마음을 먹는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싶다. 그래야만 소녀의 죽음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느날 손자 친구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나간 자리에서 소녀의 죽음에 손자와 그의 친구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몇 명의 사내아이들이 이 가난한 집 소녀를 오랫동안 집단 성폭행해왔으며 소녀는 그 충격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소녀의 일기장에 써있던 가해 소년들의 아버지들과 아버지가 없는 미자 손자를 대신해 미자가 참석한다. 왜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인가? 아버지들은 사회 구조 속에서 이미 죄를 덮는 방법에 익숙한 존재들이다. 노래방을 경영하는 아버지는 경찰들에게 뒷돈을 대주는 데 익숙할 것이며, 가해 소년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학교 교감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죄를 덮는 데 급급하다. 누군가의 아버지일 신문기자는 사건을 파헤치려고 노력하지만 그 의도가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나중에 기자는 아버지들과 피해 소녀 어머니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개평을 챙겼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 속 아버지들은 죄 앞에서 침착하다. 아들들의 죄를 덮으려고 할 뿐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피해자가 죽어 버린 마당에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적반하장일 아버지도 이 세상에는 차고 넘친다. 그에 비해 영화 속 아버지들은 아들을 무조건 감싸는 기존의 나쁜 아버지들이 아니다. 주범격인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책임 전가도 없다. 각 가정에서 돈을 추렴해서 피해자 어머니에게 전해주는 것을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과 같은 일로 여긴다.

돈 준비가 어려운 미자에 대한 배려도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침착하게 사건을 풀어나가는 참 '좋은' 아버지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아버지들이 만드는 세상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반면 미자는 아버지들이 심각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슬그머니 빠져 나와 아직도 믿는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위해 꽃을 바라본다. 세상의 아름다움만 누리고 살아도 모자란 인생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흙탕에 발을 빠뜨린 미자는 괴롭다.

 

   
 
  ▲ 미자는 성폭행의 현장이었던 학교 과학실을 돌아보고, 소녀의 추모 예배가 열리는 성당에도 간다.  
 

이창동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이 “내 발 밑의 물처럼 나와 큰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던 일들이 사실은 관계가 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까가 그녀의 고민이다. 다른 아버지들에 비해 돈 준비가 어려운 미자이지만 설사 돈 준비가 쉽다고 해도 미자에게 풀어야 할 첫 단추는 돈이 아니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 내가 왜 이 일에 연루되었는가. 미자는 성폭행의 현장이었던 학교 과학실을 돌아보고, 소녀의 추모 예배가 열리는 성당에도 간다. 그곳에서 피해 소녀의 사진 액자를 품에 감추고 빠져 나온다. 이 소녀와 미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을 발견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소녀가 투신한 강도 찾아가는데 거기서 늘 쓰고 다니던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강물에 떠내려간다. 미자의 선택을 보여주는 복선이다.

미자가 이렇게 괴로워할 때 손자는 여전히 그들이 한 짓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피해자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 아이들은 태연하게 살아간다. 성인스러운 범죄를 저지르고도 해결의 순간에는 청소년이 되어버리고 아들이라는 봉건적 구조 속에 숨어버리는 이러한 죄인의 유형도 우리 주변에는 많다.

범죄의 주체는 자신이면서 결과에 대해서는 사회 통념 속에 또는 용서라는 교리 속에 숨어버리고 별일 없이 사는 사람들 말이다. 미자가 손자의 이 태연한 태도를 보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피해 소녀의 어머니가 돈 받기를 거절하자 아버지들은 같은 여자인 미자를 보내 소녀의 어머니를 설득하게 만든다. 침착한 아버지들에 비해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달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버지들은 그들의 용의주도함이 결코 상대방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미자는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자신이 가해자의 할머니라는 사실은 숨긴 채 실컷 다른 이야기만 늘어놓고 설득에 실패한다.

미자의 세상은 아직까지는 아름답다. 돈도, 용서의 구걸도, 감정의 호소도 아름다움을 가릴 뿐이다. 사람 사이에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를 이해관계 없이 즐겁게 나누는 아름다운 세상을 미자는 꿈꾸지만 현실은 자꾸 멀어져 간다. 결국 미자는 아름다운 세상은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단순 건망증으로 알았던 자신의 기억력 저하가 치매 초기 상태라는 것을 안 뒤에 더욱 세상의 아름다움이 위선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자신을 연결시켜 주던 매개인 단어의 상실(치매로 인해)은 어차피 진정 아름다운 세상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에 은유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아름다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이 혼돈의 끝에 미자는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을 찾아가 성관계를 갖는다. 어차피 노인은 미자에게 추근대던 차였기에 이 장면이 돈을 마련하기 위한 미자의 몸부림으로 읽힐 수도 있다.

 

   
 
  ▲ 간병인으로 중풍 걸린 부자 할아버지를 돌보는데 그가 가끔은 용돈도 가외로 얹어주니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에 돈은 개입되어 있지 않다. 미자는 딸만 하나 있는 것으로 보아 남편과 일찍 사별했을지도 모른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은 남편이었기에 그녀는 독신으로 ‘깨끗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범죄의 현장에 연루된 미자는 이제 그가 지켜온 아름다움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고 노인과 성관계를 갖는다.

사실 그녀에게 성은 듣기도 싫은 것이었다. 시 동호회에서 늘상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회원이 못마땅한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미자에게 그 회원은 아름다운 시의 세계를 음담으로 더럽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가 청렴한 경찰이라고 일러준다.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음담패설과 청렴, 그녀는 또 갈등에 빠진다. 미자의 갈등은 도덕경 2장을 생각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모두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추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다."

노자는 일찍이 미추와 선악이 인간의 언어로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다. 이제 그녀는 세상이 그녀의 눈에 아름답게 보였을 뿐 실제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안다. 결국 노인에게 돈을 받아 내고 그 돈을 피해자에게 건넨다.

믿어 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아름다움이 무너진 세상에서 미자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은 손자를 경찰에 넘기는 일이다. 동호회 회원이자 청렴한 경찰(아름다운과 추함의 기준이 미자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손자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만큼 추하지도 않다는 것을 미자는 손자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미자는 마지막으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이는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쓰여야 하며 속죄를 위해 쓰여야 한다. 온 인생을 바쳐 쓴 시를 읽는 미자는 영화 속에서 사라지고 시 속에서 소녀는 부활한다. 시를 통한 미자의 속죄는 소녀에 대한 속죄가 아니다. 어차피 미자는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가족 역학 관계 안에서 미자는 부모도 아니고 할머니이며 친할머니도 아니고 외할머니일 뿐이다. 그 관계를 고려할 때 소녀에 대한 속죄는 자칫 동정으로 흐를 수가 있다. 이창동의 전작 영화 <밀양>에서도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쉽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피해자로 하여금 속죄의 선언과 동정을 혼돈하지 않도록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자의 속죄는 나만 아름다우면 세상도 아름답다고 믿었던 자신에 대한 속죄이다.

자신에 대한 속죄가 있었기에 시 속에서 소녀는 부활한다. 영화 <시>를 보고 있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1부(비극론)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특별히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 즉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 즉 판단의 잘못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서 페리페테이아(peripeteia) 즉 삶의 역전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귀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 미자는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며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마련하고 부정한 일에 쓰기 위하여 돈을 건네는 판단의 잘못을 한다.  
 

미자가 그렇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미자는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며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마련하고 부정한 일에 쓰기 위하여 돈을 건네는 판단의 잘못을 한다. 돈을 건네는 순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서 다른 아버지들에게 묻는다. “이대로 끝난 건가요? 완전히?” 그렇다면 우리 삶은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비극이 되어야만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2부 희극론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2부는 현존하지 않는다. 정말 있기는 했던가? 아니면 분실된 것인가? 영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장미의 이름으로> 에서 <시학> 2부 희극론은 베네딕트수도회의 깊은 서고에 감추어져 있었다. 종교 권력은 희극론을 읽지 못하게 한다. 어차피 우리 인생에서 희극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의 상징일까?

그러나 예수는 비극을 희극(부활)로 승화시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죄로 만연된 아름답지 못한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를 숙명론으로 옭아매기 위한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영화에서) 불타버린 것은 기독교적 상징이다. 희극이라는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희극적 결말이 예수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미자 역시 돈으로 모든 것이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을 반문하면서 여전히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 미자 역시 돈으로 모든 것이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을 반문하면서 여전히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기독교는 죄의 종교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함으로 우리는 은총을 누린다. 이것은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폄하를 받을 만한 교리가 아니라 엄청나게 과격한 교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아니 우리가 지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보아 왔던 그 비극의 현장에서 싹트는 예수로 인한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 이것만큼 역동적인 선포는 없다.

죄라는 것이 개인에 대한 무한 용서를 담고 있기에 이 교리가 윤리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비판을 받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개념은 윤리적 책임회피의 선포가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그 진리가 담겨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세상과 불화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되 이 세상에서는 죄인인 우리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가능을 깨닫는 삶(그런 점에서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이 좌절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와 함께 낙원을 모색하는 의지와 노력, 그리고 성찰을 쉬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그런 점에서 희극이다).

누구도 세상의 죄와 결별되어 살 수 없다.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면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세상의 죄와 결별되어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울며불며 무슨 죄인지도 모른 채 목이 쉬도록 밤새 기도해대는 저 열광주의적 광신도들보다도 자기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 이것만은 꼭 알고 넘어가자. 

김기대 /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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