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로 보는 '사람 vs. 사람'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로 보는 '사람 vs. 사람'
  • 박지호
  • 승인 2009.03.17 22: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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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미국 인디언이 여전히 미전도 종족으로 남아 있는 까닭?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미국 백인들에게 부담스러운 책이다. 그들의 치부를 낱낱이 들추면서 독자의 시선을 약자인 인디언들에게 향하게 만들 뿐 아니라, 백인들에 의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도록 강요받아왔던 미국의 역사를, 인디언처럼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 미국의 소설가이자, 역사가인 디 브라운은 인디언이 아니다. 평범한 미국의 백인이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인디언들과 가깝게 지냈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분량만큼이나 인디언의 역사는 다양하고 방대하기에, 수많은 인디언의 경험을 하나로 녹여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인 디 브라운은 수년에 걸쳐 수집한 회의 자료, 신문 기사, 인디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인디언들의 처절한 역사를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나를 운디드니…>를 통해서 보는 인디언 역사는 의외로 단순하다. 대상과 지역과 시기를 달리할 뿐, 황금에 눈먼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삶의 터전에 들어와 그들을 몰아내고, 인디언은 대항하다 죽임을 당하거나, 별도의 거주 지역으로 쫓겨나 치욕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까닭이다.

수없이 지면에 오르내리는 인디언들의 처참한 삶에 몰입하다보면, 인디언들은 더 이상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말을 타고 뛰어다니는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써야 했던 추장이었으며,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기독교 선교의 추악한 자화상과 맞닥뜨리게 만든다. 황금에 눈이 먼 백인들에게 인디언들은 한낱 거추장스런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고, 이런 인디언을 살육하는 것을 하나님이 계획한 '명백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학살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들먹이며 총을 겨누는 대신 인디언의 편에 서서 자신을 내던졌던 백인들도 없지 않았다.

윈쿱이 애꾸눈의 다리에 팔을 얹고 있는 이유?

<나를 운디드니에…>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142쪽에 실려 있는 사진이다. 책을 읽기 전 이리저리 훑어보다 이 사진에서 잠깐 멈췄다. 1864년 웰드 기지 회담장에서 샤이엔 인디언 추장들과 미군들이 함께 찍은 사진인데, 그리 친밀할 것 같지 않은 백인과 인디언끼리, 그것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군 장교가 인디언의 다리에 친근하게 팔을 올리고 있었던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 맨 앞줄에서 왼쪽이 윈쿱 소령이고, 윈쿱 소령이 팔을 얹고 있는 사람이 샤이엔족의 애꾸눈이다. (출처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중에서)
그림에서처럼 윈쿱 소령이 처음부터 인디언들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윈쿱은 인디언들의 저의에 대해 수상쩍은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도 윈쿱은 안심이 안 되어 두 인디언(독수리대가리와 애꾸눈)에게 미리 다짐을 받아두었다. 너희 부족이 조금이라도 배반할 기미가 보이면 너희 두 놈부터 쏴 죽일 테다."

하지만 윈쿱 소령의 생각이 달라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것도 아니다. 윈쿱 소령이 의도했건 아니건, 인디언과 만나서 대화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는 인디언을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윈쿱은 행군 도중 이 두 인디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오랫동안 지녀왔던 인디언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되었다고 실토했다. '나는 나보다 훨씬 우월한 사람 앞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내가 지금까지 예외 없이 친구나 친척에 대한 정도 없고, 잔인하고 반항적이며 피에 굶주린 자들이라고 여겼던 종족의 대표들이었다.'"

이후 윈쿱 소령은 불이익을 무릅쓰면서까지 인디언들을 돕게 되고, 결국 인디언과의 평화를 일구어낸다.

휘트먼 중위, 평범한 군인에서 인디언을 위한 투사로

두 번째로 그랜트 기지의 대장이었던 휘트먼 중위다. 그 역시 윈쿱 소령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인디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도 인디언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인디언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된다. "휘트먼 중위는 인디언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에 감명을 받아 인디언들을 고용해 돈을 벌게 해주었다. 다른 아파치족도 거의 매일 찾아들어왔다."

하지만 어디나 평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 주변 마을 사람들은 백인들과 아파치족이 한데 모여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역시 '돈'이다. 주둔 군인들이 줄어들어 전쟁으로 벌어들이는 몫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급기야 마을 주민들이 습격대를 조직해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진다.

▲ 크룩 장군은 인디언들을 향한 무력 사용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군수품 납품업자들은 전쟁으로 한몫 챙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키라고 워싱턴에 압력을 넣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해도 부시와 그의 일당이 자주 연출하던 시나리오다. (출처 : wikipedia)
인디언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학살당하자 휘트먼 중위는 분노한다. 그는 살인자들을 재판에 회부했고, 끈질기게 몰아붙여 범인들을 재판정에 세운다. 하지만 살인자들은 곧 석방되고, 휘트먼 중위는 인디언들을 변호하다 승진도 못하고 군복을 벗어야 했다. 그러나 휘트먼 중위의 노력 덕분에 그랜트 기지 학살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당시 대통령이 "더할 나위 없는 살인"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른다.

크룩 장군, 인디언 소탕 전문가에서 인디언 보호 전문가로

'회색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크룩 장군이야말로 인디언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졌던 인물이다. 그는 한때 아파치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공격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10여 년간 인디언들과 싸워오면서 그는 인디언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에 대한 동정심과 존경심을 품게 된다. 그는 결국 군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인디언들의 편에 서기 시작한다.

인디언들을 섬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부임해온 크룩 장군은, 인디언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인디언들이 주거 지역에서 자유롭게 집을 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고, 식량 보급품을 충분히 제공됐다. 주재관과 교역 상인들은 더 이상 인디언들을 속이지 않았고, 그들을 괴롭히던 군인들도 없어졌다. 크룩 장군은 인디언을 싸움이 아닌 대화로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인디언들과 백인들 사이에는 한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인디언을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앞에서 본 세 사람의 관점과 태도가 변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지만 분명하다. 저자는 이들이 인디언을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휘트먼 중위의 노력으로 인디언과 백인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 사건을 언급한 뒤 저자가 남긴 말이 이를 잘 말해준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평화는 그들을 피에 굶주린 야만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파치의 신뢰를 얻은 두 백인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지속되고 있었다."

하나님나라의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인디언을 죽여라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등장인물들은 인디언 역사에서 매우 보기 드문 경우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디언들과 관계를 맺었다. 신대륙을 정복하고 개척하는 것을 하나님이 부여한 명백한 사명이라며 다양한 모습으로 인디언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죽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윈쿱 소령이 힘들게 일구어 놓았던 인디언과의 평화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군인이었던 시빙턴 대령에 의해서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시빙턴 목사는 인디언 공격을 만류하던 군인들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디언을 죽이러 왔어. 인디언을 죽이는 일이라면 하나님나라에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도 옳아."

▲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디언 살육을 정당화했던 존 시빙턴 목사. 일명 '싸우는 목사'로 명성을 날렸던 그는'알을 그대로 두면 이가 되는 법'이라고 말하며 인디언 학살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출처 : wikipedia)
결국 시빙턴 목사는 132명에 이르는 인디언을 학살했고, 그 사건은 '샌드크릭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미국연합감리교회는 지난 1996년에서야 시빙턴 대령의 만행을 공식적으로 참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웰시 선교사, "기독교로 개종하면 문제 해결"

두 번째는 인디언 지역 선교사였던 윌리엄 웰시라는 사람이다. 이는 인디언 문제 담당관이었던 도네호가와를 관직에서 끌어내린 인물이다. 도네호가와는 인디언으로서는 최초로 워싱턴에 입문하여 인디언들을 위한 수많은 정치적인 개혁을 시도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그가 인디언 문제 담당관으로 있을 때 인디언과 백인과의 갈등 해결에 상당한 진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웰시 선교사는 대통령에게 "야만적인 행태를 보이는 자"를 공직에 앉혔다며 도네호가와를 공격했다. 웰시 선교사가 그를 공격한 것은, 그가 인디언들의 원시 종교를 용인했기 때문이다. 웰시 선교사는 인디언들이 싸움을 일삼고 있는 건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인디언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밖에 없다고 믿었다.

웰시 선교사는 인디언들이 간절히 염원하던 자유는 외면한 채, 오로지 기독교인들로 개종시키겠다는 종교적 신념에 몰입되었던 탓에, 도네호가와가 추진해온 개혁은 안중에도 없었다. 웰시 선교사의 노력으로 결국 도네호가와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도 사장되고 만다.

자신이 섬기던 인디언들 속였던 힌먼 선교사

마지막으로 수우족의 오랜 선교사였던 사뮤엘 힌먼이다. 그는 1882년 정부가 수우족 주거 지역의 절반을 매수한다고 했을 때 협상단의 통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힌먼 선교사는 인디언에게 필요한 것은 땅을 줄이고 기독교를 더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이 사역했던 지역의 인디언들을 속이면서까지 땅을 팔도록 만들었다.

"힌먼은 수우족 주민들을 속이고 구슬려서 암소와 수소를 받고 땅을 내주는 문서에 서명을 하도록 만들었다. 힌먼 선교사는 서명하지 않으면 식량과 연금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디언령으로 보내버릴 거라고 위협했다. … 서류 같은 것에 펜을 대기만 하면 틀림없이 땅이 줄어든다는 것을 보아온 인디언들은 힌먼이 그들의 주거 지역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힌먼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 미군과 인디언 사이의 최후의 전투로 불리는 운디드니 학살 현장. 사진은 운디드니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수족의 추장 큰발의 모습이다. 운디드니 학살 사건은 1890년 12월 29일, 미군이 기관총으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 200명 이상의 인디언을 학살한 사건이다. (출처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중에서)
수우족의 추장 '붉은구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의 땅을 먹었다." 이런 인디언들에게 과연 기독교란 어떤 존재였을까. 풍카족 추장인 '선곰'이 했던 말 속에서, 당시 인디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부족을 이 세상에 살도록 내보냈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잘못 생각한 것이었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을 백인들에게 내주려는 것이었고, 우리는 죽어야 하는 거였소."

누가 하나님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과연 이런 하나님을 인디언들은 믿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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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hope 2009-03-19 04:18:04
의식있는 기사에 감사한다. 하지만 지금도 역사의 뒷면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 선교사님의 "미국인이 가장 무식하다."라는 말이 계속 귀를 때린다. 왜곡의 역사, 강자들의 약자죽이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자행되어 온 만행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