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이판'인가 '사판'인가
목사, '이판'인가 '사판'인가
  • 김기대
  • 승인 2010.08.23 16: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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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판에 가까운 이판이고 싶다

불교에서 구도를 우선하는 승려들을 '이판(理判)'이라고 부르고 사찰의 행정과 교인 관리를 도맡은 승려들을 '사판(事判)'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도권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기에 죽기 살기 식의 싸움을 '이판사판'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그런데 이들이 오직 주도권 때문에 그렇게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떤 종교보다도 구도와 탈속을 중시하는 불교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추했을 리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평신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구도인가 아니면 대중의 실제 삶에 필요한 목회인가를 두고 치열한 진리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것이 후대에 오면서 추한 싸움으로 변질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이판인가? 사판인가?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사판에 가까운 이판이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스스로이든지 객관적 기준에 의해서든지 목회직에 대한 평판이 가장 떨어져 있는 이때에 고민을 가진 많은 건실한 목회자들이 나름대로의 목회론을 피력한다. 또한 그들의 목회론을 멘토링하기도 한다. 특이 지면을 통해 소개되는 목회자들의 시대에 대한 고민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동감하고 위기를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는 도전도 받는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그들 대부분은 구도자, 즉 이판이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잘못 가고 있는 것을 고쳐주고 싶어 한다. 목사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글 속에는 나는 안 그런데 너희들만 그렇다는 오만이 숨어 있다.
 
목사가 구도자이기를 원한다면 목사라는 직함을 포기하고 수도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대중들에게 바른 구도자의 롤 모델이 되기를 기대하는 목사라면 우리가 그토록 비난해 오던 대형 교회의 목사들과 다를 바가 없다.

대중들은 예수 따라가기도 힘든데 목사마저 따라가야 할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러고도 목사들에게 늘 질책을 들어야 한다면 도대체 그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법정의 별세 후 그의 무소유는 대중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른바 열린 목사들은 설교단에서 한두 번쯤은 법정을 언급하며 자신의 ‘쿨’함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소유 뒤에는 난을 키우는 고상한 취미와 고급 승용차와 꽃다운 처녀들이 자본의 노리개가 되었던 요정 자리에 세워진 화려한 사찰이 있었음을 외면한다.

오늘 구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목사들은 법정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대중들의 헌금에 의해 남보다 여유로운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기도하는 영적 생활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욕망의 무상함을 설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민 사회 대중들이 무소유가 되어버릴 때 하루아침에 길거리 신세를 못 면하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 목사는 사판이어야 한다. 그래서 'reverend'보다는 'pastor'가 어울리는 직업이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뒤에서 설거지를 해야 한다. 삭개오보다 못한 사람들이 행여나 회심 못한 삭개오가 되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야 한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서 하루 머무는 것으로 그를 회심시켰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그들의 눈높이 맞추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대접 받으며 당신 아니면 내가 어떻게 이런데 와보겠냐는 표정도 보여야 한다. 그것은 비굴함이 아니라 교회라는 연약한 공동체를 존속시키고 그 안에 맡겨진 이들을 돌보는 사판으로서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교회에서 ‘정치’를 한다. 여기서 정치란 누가 얼마나 많은 표를 얻는가에 관심이 있는 천박한 한국이나 미국에서 통용되는 정치가 아니다. '자기가 믿는 바를 어떻게 성취할까'를 고민하는, 다시 말해 혼자만의 구도로는 사회 변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한 알렝 바디유나 슬라보에 지젝 등의 유럽 철학자들이 말하는 정치이다.

물론 대중의 욕망과 진리를 어디서 끊어 주어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목사 개인에게 달려 있다. 자신의 공부와 기도에서 얻어지는 기준일 뿐 누구도 제시할 수 없다.  
 
초기 불교의 다음 형태는 부파 불교이다. 수많은 교리 논쟁 속에서 풍성한 불교 교리가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구도자들의 자기만족일 뿐 대중들에게는 무슨 도움이 되었냐는 자각과 함께 대승불교가 출현했다. 대승불교에서는 구도자보다는 보살을 강조했다. 보살의 정신 중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해탈할 때까지 나의 해탈을 유보하겠다는 것이 있다. 어디 익숙한 구절 아닌가?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로마서 9:3)
 
나는 이 구절을 항상 나의 목회 철학으로 삼는다. 민족주의적 비장함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으로 즉 내 구도적 성취가 목회에서 우선이 아님을 깨우치는 의미로 말이다.

김기대 목사 / 평화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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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2010-08-25 06:58:56
"목사가 구도자이기를 원한다면 목사라는 직함을 포기하고 수도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대중들에게 바른 구도자의 롤 모델이 되기를 기대하는 목사라면 우리가 그토록 비난해 오던 대형 교회의 목사들과 다를 바가 없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열린 목사들은 설교단에서 한두 번쯤은 법정을 언급하며 자신의 ‘쿨’함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소유 뒤에는 난을 키우는 고상한 취미와 고급 승용차와 꽃다운 처녀들이 자본의 노리개가 되었던 요정 자리에 세워진 화려한 사찰이 있었음을 외면한다."

이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도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더욱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사판인 목사가 무슨 로마서 9:3절 말씀을 인용할 수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