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트위터로 '소통' 교회는 혼자서 '호통'
세상은 트위터로 '소통' 교회는 혼자서 '호통'
  • 송병주
  • 승인 2010.08.23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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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대에 어정쩡한 교회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온라인 인맥 구축 서비스'로 규정되는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이하 SNS)의 바람이 드세다. 목회자로서 이런 단어들과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그렇다고 마냥 멀리 할 수 없기에 깊은 고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목사로서 SNS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한번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비전문가의 한계'를 전제하고 생각을 나누어본다.

사각형의 권력, 매스 미디어

   
 
  ▲ 최근에 새로이 등장한 온라인 인맥 구축 서비스는 기본 구조가 사각형이 아니라 형상 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매스 미디어(Mass Media)는 말 그대로 소수의 발신자가 다수의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구조였다.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이 사각형 세상인지 아직도 필자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전달되는 매스 미디어는 사각형 안에 정형화된 세상을 보여주었다.

결국 사각형 밖의 이야기 중요하지 않았고, 그 사각형 안에서 걸러져 '편집'된 내용이 사실로 존재했다. 그렇기에 사각형 안에 '제한된' 정보는 항상 발신자의 것이었고, 정보는 '독점'되었다. 그저 다수의 대중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하는 '수동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 발신자의 자리는 대단한 기술과 고가의 장비를 요구하고 결국 그런 기술과 장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권력과 재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미디어는 중립적일 수 없었다. 권력과 재력이 가공해야 '사실'이 되고, '가공된 사실만' 대량으로 전달되는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발신자를 통제하는 권력자의 필터를 통과한 '편집된 사실'만 전달되었다. 그래서 매스 미디어는 권력의 시녀가 되거나 아니면 권력 그 자체가 되는 특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스 미디어는 사각형 안에 제한당했다기보다는 사각형이란 '안정적인 도형'으로서 지배적 권력의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재벌이 언론을 소유하려하고, 언론이 재벌화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며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사각형 밖의 새로운 권력, 소셜 네트워크

최근에 새로이 등장한 SNS는 기본 구조가 사각형이 아니라 형상 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저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 같은 네크워크가 있다고 할까. 고가의 장비와 기술을 요하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찍어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만들어 간단하게 편집하여 배포하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거칠고 정교하지 못하다. 하지만 사각형이 보여주지 않는 또 다른 사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사각형이 제시한 편집된 사실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다.

이란 사태와 중국의 처절한 현실을 서방에 알린 것은 <뉴욕타임즈>가 아니라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에 올라온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과 영상들이었다. 사각형의 권력이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거칠고 투박한 사실'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출구 역할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최고의 검색 시스템으로 모든 정보를 통제하는 중국이 트위터 자체를 통째로 막아버리기 전까지는 통제 불능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위력을 본다. 한국에서도 이번 지방선거 때 모든 매스 미디어들이 여당의 압도적 승리를 여론조사란 이름으로 발표하고 있을 때, 10만 명 정도 되는 트위터의 밑바닥 민심이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사각형 안에도 밖에도 없는 어정쩡한 교회

   
 
  ▲ 최근에 새로이 등장한 SNS는 기본 구조가 사각형이 아니라 형상 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저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 같은 네크워크가 있다고 할까?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사각형 안에도 밖에도 존재하지 못한 채 정말 교회 방송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온라인 인맥 구축에 대한 대응은 고사하고 사각형 권력 앞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어정쩡한 시대에 있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화두로 인해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선거에 패배했다. 그때 이회창 후보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그 발언을 보고 필자는 “그래서 당신은 졌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니요? 이미 변했습니다. 선거에 지고도 아직 변하고 있다고 보십니까”라고 답글을 적었던 적이 있다. 이제는 이  댓글을 교회에도 달고 싶다.

물론 SNS가 단순하게 좋다.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정보의 통제' 만큼이나 필자는 '정보의 과잉'의 위험성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통제'로 인한 '결핍'보다 무서운 것은 '과잉'으로 인한 '잉여'의 문제이다.

통제에 의한 결핍도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과잉에 의한 잉여 역시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동일하다. 과잉 생산된 정보는 강박관념과 자포자기를 초래하여 운동 에너지를 상실하게 하여 손쉬운 통제가 가능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소셜 네트워크가 치명적인 독소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함께 듣고 말하고 나누려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상황 앞에 서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한다. '내가 말할 테니 들어!' 하는 식의 대화는 '소통'아 아니라 '호통'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이 '소통'을 외치지만 '호통'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그맨 박명수의 호통개그는 웃어줄 수라도 있지만, 교회의 호통은 소음이다.
 
언제까지 소수의 발신을 집단적으로 수신할 거 같나?

매스 미디어의 수동적 수신자였던 대중은 이제 소셜 네트워크에서 능동적 발신자로서 미디어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소비자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 익숙한 현 시대의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도 제한된 소수의 '발신'을 집단적으로 '수신'하고 만족할 청중들로 교회 안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지 필자는 확신이 가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 변화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시대의 도전은 우리에게 성도들을 단순한 '복수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수형'이 만든 네트워크로 보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시작이라고 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론이었던 금속활자 인쇄술로 인해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쿠텐베르크가 없었다면 루터도 없었고, 대량 인쇄가 없었다면 95개조 반박문도 없었으며, 금속활자가 없었으면 종교개혁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번역된 독일어 성경은 새로운 미디어 방법론으로 인해 유럽에 퍼져갔고, 그것은 권력이 막을 수 있는 통제권을 넘어 있었다. "개혁을 위한 성령의 열정은 루터를 준비시켰고 쿠텐베르크를 준비시켰다"는 필자의 아이디어가 그저 역사의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억지 논리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해본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분명코 우리의 삶을 변혁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개혁의 후예'라는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송병주 목사 / LA 선한청지기교회 담임

* 이 글은 송병주 목사의 블로그(http://hanada386.tistory.com/)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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