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끼리 경쟁하고 증오하는 시대
교회끼리 경쟁하고 증오하는 시대
  • 최태선
  • 승인 2010.08.26 13: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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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란한 십자가 불빛, 갈가리 찢긴 그리스도의 몸

예전에 다니던 교회가 있던 건물에는 교회가 둘이었습니다. 4층에도 5층에도 교회가 세 들어 있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를 갈 때면 교인들이 마주치게 됩니다. 같은 교회 교인들끼리는 반색을 하며 인사를 나누면서도 다른 교회 교인들과 마주치면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도 그리 낯선 일만은 아닙니다.

어쩌다 아래층에서 찬양 소리가 크게 들려오거나 기도 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자연스럽게 지어집니다. 때 맞춰 찬양이나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이면 갑자기 찬양 소리와 기도 소리가 자연스럽게 커집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래층 교회의 찬양과 기도 소리도 커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복도 많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경쟁적으로 여러 곳에서 찬양과 기도를 받으시니 말입니다.

참 가슴 아픈 현상입니다. 언제부터 교회들이 이렇게 내외를 하고 경쟁심을 넘어 서로 간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은 신앙심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 간의 경쟁심과 증오는 도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걸 단순히 개교회주의라는 말 한마디로 담아내기에는 너무도 많은 복합적인 현상들이 뒤엉켜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조금 풀었다 싶으면 풀 수 없는 매듭이 나타나 더 이상은 진행이 어렵게 되고 맙니다. 이 문제가 정말 방법이 없어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것일까요?

며칠 전에도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을 만났으니 교회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요. 당연히 교회의 잘못된 부분들에 대한 지적이 이야기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분은 매우 인자한 표정으로 지긋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냅도'입니다. 내버려 두세요!"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저는 그런 말에 웃음이 나오질 않습니다. 오히려 사납게 반응하고 싶은 마음을 참자니 제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이럴 때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라는 말씀이 생각난다고 말했다면 불 같은 싸움이 났었겠지요? 어쨌든 말씀 한 구절을 실감 나게 느껴 본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6-28)

가히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오래도록 인류를 갈라놓았던 인종과 성과 계급을 철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초대 교회에 너무도 중요한 신조였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회심자를 공동체의 삶으로 인도하는 세례의 신조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낡은 분열들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인류가 탄생함으로써 오래도록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던 힘과 권세가 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새것이 되었다가 또 다시 헌 것이 되어 버린 것일까요?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것이 되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1)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 됨입니다. 그 하나 됨이 깨어진다면 교회는 결코 하나님나라 백성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결코 주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교회의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 또한 그와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주가 되시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신학자 멜데니우스는 말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이미 사람들이 오랫동안 하도 많이 사용해서 고리타분해진 감이 없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여전히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은 본질 가운데서도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일치해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절대 과제입니다. 그것은 도무지 '냅도'라고 말하며 '나 몰라라' 방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헌신이 진심으로 행해져야 함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주되심) 하지만 성경은 동일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그의 백성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다는 점이다. 머리이신 그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분의 몸에 관한 우리의 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머리되심) 따라서 그의 교회에 대해서는 냉담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더 윌리스, <급진적 그리스도인>)
 
성경은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머리되심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항상 성도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마7:21-22, 눅6:46, 행16:31, 롬10:9, 고전6:17) 그리고 머리되심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그의 몸과의 관계성과 연관되어 나타납니다. (엡1:22-23, 4:15, 5:23, 골1:18, 2:19)

주되심이 그리스도와 성도 개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면, 머리되심은 그리스도와 전체 교회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주되심과 머리되심은 어느 하나로 따로 분리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개인들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하나님 백성 공동체에서도 머리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더 윌리스의 마지막 질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진지하고 신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의 교회에 대해서는 냉담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선교의 목적을 양적 성장과 외형적 번영으로 둔갑시킨 교회들이 축복과 형통함의 약속을 내걸고 이 땅의 거리를 휘황찬란한 십자가의 불빛으로 뒤덮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들이 해놓은 일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참담한 비극의 원인은 그들이 혹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교회들의 모든 추한 행태들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망각한 당연한 결과물들입니다. 그들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유업을 가로챘던 농부들의 말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마21:33-41)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골1:18)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인정되고, 이 지상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그분이 우주 만물의 머리가 되실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교회의 간판을 내리고, 높이 걸었던 십자가를 내리고서라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명심하면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순종하여, 모든 교회가 하나 되는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기를 소망해봅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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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manse 2010-08-30 08:46:45
한국 내 교회나 교민 교회 모두가 뒤담아 들어야 할 귀한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