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 보면 한국 교회가 생각나는 이유
[심청전] 보면 한국 교회가 생각나는 이유
  • 송병주
  • 승인 2010.09.07 21:2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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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 재해석 4, [심청전] 2탄이 나오면 등장인물엔 누가?

어린 시절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위해서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하다가 인당수의 재물로 몸을 바치는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녀의 '약간은 어긋난 듯한 효심'에 대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의도적 해석이라 해도 그녀의 절박한 현실과 지나칠 만큼의 순수함으로 인해 비평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녀의 효심을 이용한 어긋난 종교와 상업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청전은 조선 초에 완성되었지만, 이야기의 배경은 고려 말이다. 소위 불교의 영향력이 가장 크고, 해외 무역이 크게 성공하던 시대이다.

   
 
  ▲ 효녀 <심청전>은 종교의 이름으로, 번영의 이름으로 장애인 아버지를 둔 어린 한 소녀가 죽어간 이야기다.  
 
'종교와 무역이 지배하던 시대'에 장애인 아버지를 둔 어린 한 소녀가 목숨을 던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번영의 이름으로 한 소녀가 죽어간 것이다. 타종교를 비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보는 오늘 기독교의 무너진 현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돈을 벌고자 하는 물질 만능주의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싶다.   

공양미 삼백 석으로 눈을 떴을까?

과연 심 봉사는 과연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한 덕택에 눈을 떴을까?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봉사가 눈 뜬다는 교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어찌 그런 어이없는 요구를 종교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지 마음이 아프다. 찢어지게 가난한 맹인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을 뜰 것이라는 말을 흘리는 것이 진심인지 흑심인지 헷갈린다.

딸은 인당수에 바치고, 공양미 삼백석도 바치고, 여전히 눈 못 뜨는 심봉사에게 과연 그 주지스님은 무엇이라 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도 여전히 착하고 순진한 백성들은 자신이 잘못하고 부족한 탓인 줄 알고 그렇게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이것은 타종교 비판이 아니라, 목사로서 이 시대의  교회들의 동일한 타락을 말하고 싶다. 온갖 명목으로 큰 축복과 고통이 해결될 것이라며 3억을 바치라 요구하며 영혼을 노략질 하는 거짓 목사들을 본다. 헌금을 경매하듯 경쟁시키며 상급을 논하는 거짓 목사들을 본다.

혀끝을 살짝 차며 "눈을 뜰 수 있을 텐데…"하며 흑심을 진심인 듯 흘리는 말기술은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한 교인들의 여린 마음은 그런 거짓 앞에서도 그저 눈먼 심 봉사처럼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인신제사를 불사할 탐욕스런 성공 지상주의

먼저 자신들의 사업적 이익을 위해서 소녀를 돈으로 사서 인신 제사를 드릴 정도의 털 난 심장을 가진 상인들을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자신들의 번영을 위해 돈으로 소녀의 생명을 흥정하는 것을 보며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본다. 미안 때움 하느라 좀 더 값쳐주고, 눈 물리며 명복을 빌어주는 악어의 눈물이 혐오스럽다.

혈액암으로 못다 핀 꽃 한 송이처럼 꽃다운 나이에 세상과 등진 심청이 같은 산업재해의 피해자들이 있다. 산재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문제시 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 기업이 위자료를 준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심청이가 생각난다면 지나친 것일까?

딸 투병 돕느라 빚진 가정 경제 앞에 눈물을 머금고 흔들린 그 부모들은 졸지에 눈먼 심 봉사가 되어 오늘도 딸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경제적 성공을 위해 여자아이 하나정도 희생하는 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탐욕스런 생각이 오늘도 심청이를 내몰고 있다. 돈으로 심청이를 흥정하면서 자녀들에게 심청전을 읽어주며 감히 효를 논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이제 멈춰야 한다.

   
 
  ▲ 이 시대의 기독교 역시 동일하게 각종 헌금 명목 만들어 불쌍한 심학규를 한숨 쉬게 하고, 착한 심청이에게 인당수를 뛰어들도록 하고 있지 않을까.  
 
한편 더 안타까운 것은 털난 심장을 가진 상인들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를 집례하고 주문을 읊었을 사이비 무당이다. 돈에 눈이 먼 상인들만큼 같이 돈에 먼 종교인들, 인신제사를 바치며 명복 빌어주는 병 주고 약 주는 종교적 위선을 본다. 생명의 논리보다 경제의 논리에 편승해서 위대한 번영과 한 몸을 이루어버린 종교인의 모습은 타락과 부패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청전 2탄이 출판된다면

하지만, 이것이 그저 남의 눈의 들보 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 안의 들보 이야기일까? 이 시대의 기독교 역시 동일하게 각종 헌금 명목 만들어 불쌍한 심학규를 한숨 쉬게 하고, 착한 심청이에게 인당수를 뛰어들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백 머리에 백구두 신은 부흥사들이 헌금을 경쟁시키는 그런 촌스러운 일은 사그라졌지만, 작금의 교회의 슬픈 이야기들은 심청전 2탄의 확실한 주연급 조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해본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 역시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재현하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종교와 무역이 가장 번성한 시대에 심청전이 쓰였다. 지금도 역시 번영의 논리와 성공지상주의가 주를 이루고 종교의 외적 번영이 가득한 시대를 살면서 심청전은 더 이상 그때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시대에는 불교와 당종교의 타락이 도마에 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역할을 기독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뱃머리 끝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고 넘실거리는 인당수 앞으로 걸어가는 우리안의 심청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쌀 300석을 바치면 장님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이나, 한 소녀를 인신제물로 바치며 복을 구하는 사이비무당들의 푸닥거리가 교회 안에 있게 해선 안 된다. 긴장할 것은 21세기에 '심청전 2탄'이 나온다면,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봉사가 눈을 뜰 거라는 역할을 담당할 주지스님은 이제 어느 교회 담임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리고 인신제물을 바치는 굿판을 벌릴 무당의 역할을 담당할 사람이 어느 기도원 원장은 아닐지. 괜스레 염려만 앞선다. 조금 더 나가서 행여나 공양미 삼백 석 덕택에 심 봉사가 눈을 떴다고 간증 집회하자는 내용까지 추가될까봐 더 걱정스럽다. 심청이는 예뻤다. 그러나 그 주변의 상황들은 너무 추했다. 

송병주 목사 / LA 선한청지기교회 담임

* 이 글은 송병주 목사의 블로그(http://hanada386.tistory.com/)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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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2010-09-10 23:53:22
이런 사고를 갖고 계신분이 어떻게 기복주의에 푹 젖어 있는 온누리 교회에서 그렇게 오래 시무를 하실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그 교회 사람들이 목사님을 그리워 하는 것 같던데
그냥 저냥 거기서 심학규 우롱한 스님 노릇 하신 거 아닌가요?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야 말로 푸닥거리 한판 한 것 같던데

장나라 2010-09-10 12:54:52
주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중심이 돈에 있는지 영혼에 있는지 아십니다.
교회는 에수그리스도의 몸 입니다.몸을 세우는일이 우리의 일 입니다.물질이 도구가 될떄가 있고 누가 내라고 해서 주는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순종과 마음의 감동이 있습니다.

장나라 2010-09-10 11:56:43
양의 탈을 쓴 사람들이다. 주님은 아실것이다.
더러움에 물들어서 주님의 나라를 웨방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