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말썽인 이유가 궁금하세요?
교회가 말썽인 이유가 궁금하세요?
  • 최태선
  • 승인 2010.09.25 14: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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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 교회

이애실 사모는 자신의 책 <어! 성경이 읽어지네>에서 구약을 보는 두 가지 관점 가운데 첫 번째를 "성경은 누가 왕이냐를 다룬 왕 싸움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으로 여러 가지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관점의 제시입니다.

인류는 본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꾀임에 넘어간 인류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왕권을 찬탈하였습니다. 그런 인류에게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왕은 하나이어야 하는데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사람수만큼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왕권을 놓고 서로 싸우는 영원한 갈등과 투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현상을 보고 토마스 홉스는 근대 국가론의 초석이 된 그의 책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늑대’이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그야말로 폭력에 의한 죽음의 공포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인간이 폭력과 혼란 속에서 느끼는 이 공포야말로 인간이 평화를 유지하고 국가를 설립하는 심리적인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제재 없이는 사람들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므로 서로의 동의 아래 계약을 맺어 강제 집행이 가능한 공통의 권력을 구성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회계약론의 시초이자 홉스가 인용한 구약성경 속 거대 괴물, ‘리바이어던’의 탄생입니다. 즉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전쟁과 공포에서 벗어나 개인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 국민 스스로가 선택한 절대 권력을 의미합니다.

전쟁과 공포에서 벗어나 개인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 받기 위해 국민 스스로 선택한 절대 권력을 리바이어던이라고 명명한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인류의 근본적인 불행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누가 절대 권력을 가지건 간에 그것을 가진 자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권력이 가지는 속성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절대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은 광기를 가지고 더 많은 희생양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곧 이전투구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습니다. 필요악이면서도 그만큼 매력적인 대상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자신들을 보호해 줄 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왕이 그들에게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또 주변의 강력했던 이방 나라들을 바라볼 때 그것이 매우 합리적으로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반역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통치 원리는 '자발적 동의'입니다. 하나님나라에는 강요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 제도를 허락하십니다. 재산을 분할해 달라고 요구했던 둘째 아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었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를 먹으며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둘째 아들처럼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권력이라는 막강한 힘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시작은 순조롭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왕이라는 직위에 익숙해지자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말렉 족속을 정복한 후에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고 전리품들을 챙겼습니다. 겉으로 내세운 핑계는 여호와께 좋은 제물을 드리기 위함과 백성들의 요구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악신이 내려 번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난 왕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대신해 다윗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이로다"(삼상 18:7)라는 백성들의 노래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기에 연연하고 경쟁자를 견딜 수 없어하는 권력을 가진 자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은 이스라엘 왕의 모델과도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왕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장수에게 혼쭐이 나고 있을 때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갈 만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에 있어 빼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궁전을 지은 후에도 하나님께서 천막에 거하시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성전 건축을 제안할 정도로 늘 하나님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13년이 넘는 광야 생활과 힘겨운 도피생활을 통해 충분한 영적 성숙의 시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왕위에 앉아 있는 동안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왕들이 전쟁하는 시기에 자신이 직접 출정하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도덕적 타락이라는 치명적인 덫에 걸리게 됩니다. 부하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를 불러 동침한 것입니다. 그 일로 밧세바가 잉태하게 되자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모략을 꾸미고 그것이 실패하자 그녀의 남편을 죽이기까지 하는 죄질이 매우 나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 일은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저지른 범죄였습니다. 왕이라는 권력이 다윗과 같은 신실한 사람까지도 넘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인구 조사를 실시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려는 다윗의 마음이 담겨 있는 범죄였습니다. 그토록 신실했던 다윗조차 강력한 힘을 갖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을 망각해 버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그러한 행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던 다윗마저도 왕이라는 자리가 주는 권세의 노예가 되어 범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사명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백성을 섬기는 것임을 너무도 잘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지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신실한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지혜와 그로 인해 더욱 강해진 그의 왕권이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비록 그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그 이후에 이스라엘 곳곳에는 산당이라는 불신앙과 간음의 상징이 등장하였고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도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진 이후에는 더더욱 형편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전형적인 세상의 길을 걸었고, 남유다의 왕들도 요시아나 히스기야와 같이 부분적으로 인정 받을만한 일을 한 왕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이스라엘 왕의 모델로 제시되었던(용서 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을 받은) 다윗의 길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왕을 세우지 말라고 만류하셨던 이유를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특히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해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응답지 아니하시리라."(삼상8:1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왕이라는 제도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왕이신 당신을 버리는 행위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삼상8:8) 왕 제도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탈이며 왕 제도를 택할 시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자세히 알려주셨음에도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은 여호와께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의 방식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결국 왕 제도를 택한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위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인간과 권력의 속성 그리고 그 둘의 관계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섬기는 자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의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마는 인간과 권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교과서가 되어준 셈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나라의 왕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소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군림하고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서 사랑과 희생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그분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새로운 하나님나라 왕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부름 받은 백성들 모두를 왕 삼아주셨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하나님나라는 모두가 왕인 나라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신들이 왕이며 제사장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습니다.(벧전2:9)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왕이신 그분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임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롬8:15)

그런데 그 왕은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왕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가 세상과는 전혀 상반되는 거꾸로 뒤집어진 나라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오만이며 착각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은 하나님나라의 방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우리의 삶을 규정지어주고 이끌어가야 할 하나님나라의 방식이 교회에서 실종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성공을 자랑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인간들이 저울질해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지향하는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교회들의 타락한 모습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나라의 왕이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전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교회의 지도자들만이 왕처럼 인정받고 받들어지는 세상의 방식이 통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섬기려 한다면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교회가 무한정 커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들의 성적 타락이나 교회 세습과 같은 문제는 처음부터 발생할 가능성이 없어질 것입니다. 헌금이 문제가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민주화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때문에 상처 받는 일과 싸우고 갈라지는 분열의 역사도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부와 권력과 인기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거절해야 할 유혹이요 악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부름 받은 백성 모두가 왕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왕들은 커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작은 자만이 모두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가 되어야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작아져야 서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작은 자가 된 그곳에 하나님나라의 평화(샬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이 소위 집권자(왕)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왕이신 예수님)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2-45)

그것은 다만 이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여러분들 속에 일어난다면, 그런 교회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다면 여러분들은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따라 섬김과 희생의 길을 걷는 하나님나라의 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나라의 여명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 나라는 희생양이 전혀 필요 없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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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2010-09-30 17:40:49
위 글 마지막 문장은 "그 나라는 희생양이 전혀 필요 없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입니다."로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