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 행세하는 이 땅의 괴물들에게
슈퍼맨 행세하는 이 땅의 괴물들에게
  • 김기대
  • 승인 2010.10.08 14:0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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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대 목사의 '영화로 신학하기' [프리스트]…실패의 순간, 비로소 사람이 되다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로 사람을 지배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5:20-21)

한때는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경제는 쇠퇴하고 자랑할 것이라곤 비틀즈의 추억과 축구팀밖에 없는 듯한 리버풀 천주교 교구에 젊고 잘생긴 신부 그렉이 부임한다. 영국에서 천주교의 위상과 쇠락하는 도시의 기운이 어우러진 것처럼 성당도 활기를 잃은 지 이미 오래다.

 

   
 
  ▲ 영화 <프리스트>.  
 

주임신부 매튜는 그렉에게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며 더 이상 이 도시에서 교회가 할 일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젊은 신부는 그렇지 않다. 믿음이라는 것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 되겠는가? 그는 가장 교과서적인 강론을 하며 신도들에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희생양 삼아 면책 받으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의 속죄에 집중하라고 설교 한다. 맞는 설교다. 그런데 이 쇠락한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강요처럼 들린다.

쇠락한 도시에 젊고 잘생긴 그렉 신부의 부임

사제관에서 매튜와 함께 생활하게 된 그렉은 그곳에서 낯선 초상화를 발견한다. 보통 사제관 같으면 교황이나 성자의 사진이 걸려 있을 터인데 이곳에는 미국 원주민 추장 중 하나였던 시팅 불(Sitting Bull)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매튜는 시팅불은 패배의 순간에도 고상함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인디언 수우족 최고의 전투 추장이자 영적 지도자이며 인디언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시팅 불은 자신이 믿고 의지해온 전통적인 가치와 신념을 짓밟는 이질적인 문화를 강요하는 외부의 침입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 정체성과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사람이다.

매튜는 지켜야 할 신념과 외부의 공격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신부다. 그의 설교는 인간은 여전히 창조 과정에 놓여있는 부족한 존재이며 자신 역시 그 존재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그렉의 설교는 아직 죄 속에 있는 그들을 가르치려 한다는 점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그렉은 매튜의 설교를 듣고 불온한 사회적 복음이라고 색깔을 덧입힌다. 게다가 선배 신부 매튜가 사제관 가정부인 마리아와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자 자신과 그들은 다르다는 그렉의 확신은 더 깊어진다.

그러나 마리아의 해명을 듣고 그렉은 그녀에게 사과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신임신부로서 열정적인 그렉은 매튜와 함께 심방을 나서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대뿐이다. 다행히 한 집에서 신부 일행을 환영해 들어갔지만 오히려 전도에 더 열정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사는 집이었다. 보편적(가톨릭)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인들을 가르치려는 신부 일행을 즐겁게 환영하는 이 ‘이단’ 종파의 친절함 앞에 그렉은 잠시 당황한다. 그렉의 고민이 깊어가던 중에 신도의 장례식을 집전하면서 또 한 번 갈등을 경험한다. 그는 응급실에 실려 가는 신도에게 틀에 박힌 기도문을 반복하지만 친지들이 모인 장례식에 종교적 엄숙함이 들어갈 자리는 없고 노래와 술만 있다. 그나마 고인의 아내가 자신은 이 '원수'같은 인간이 죽기를 바란 죄인이었다며 위로를 기다린다. 그렉은 이 순간에도 진심어린 위로보다는 정형화된 속죄 기도를 드릴 뿐이다.

죄 속에 있는 그들을 가려치려는 그렉 신부, 그러나… 

 

   
 
     
 

사제로서 그렉과 슬픔을 당한 사람 사이에, 모범 사제 그렉과 엉터리 같은 사제(매튜)사이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벽이 가로 막고 있다. 매튜 신부를 포함해서 다른 이들은 서로들 잘 어울리는데 그렉 앞에만 벽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 벽이란 다름 아닌 자신이 쌓은 것이다.

갑자기 그렉은 벽 없이 사람을 직접 만나고 싶어진다. 사제가 아니라 사람이 되고 싶다. 그는 사제복을 벗고 동네 술집을 찾았다가 거기서 만난 남자 그레이엄과 사랑을 나눈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만난 그는 일말의 죄책감을 갖지만 삶은 활기차졌다.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하며 교구 학교 아이들에게 엄숙한 교리 대신 노래로 수업을 대신한다. 헬스클럽에서 만난 사람이 그에게 엉터리 설교를 잔뜩 늘어놓아도 항상 가르치던 입장에 있던 그렉이 듣는 사람이 될 줄 아는 여유도 생겼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때쯤 고해성사에서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리사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다른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고해된 내용에 대해서 사제는 함구해야 한다. 함구하면 리사 아버지의 추행은 계속될 것이다. 그렉은 이 고민을 그레이엄에게 이야기하며 둘의 관계는 깊어진다. 그렉은 성찬식을 거행하며 자신이 지은 죄와 속죄의 선포가 겹쳐져서 괴로워한다.

그동안 해왔던 모든 속죄의 설교는 그들을 향한 것이었지 이처럼 자신을 향한 것이 될지 생각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레이엄이 영성체를 받아먹겠다고 그 앞에 입을 벌리고 선 순간 그는 다시 자신의 죄보다는 그레이엄의 죄가 더 커 보이는 신부로 돌아가서 그레이엄을 성찬에서 배제한다. 그동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속죄를 선포해왔지만 자신의 죄도 용서해주지 않고 리사의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그리스도가 갑자기 무능해 보인다. 신실한 신부 그렉은 십자가상을 향해 거기에 매달려 있지 말고 내려오라고 소리친다.

 

   
 
     
 

모범적 신부에서 보통 사람들의 고민으로

이제 모범적 신부에서 보통 사람들의 고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삶에서 많은 모순을 경험하면서도 믿음 생활을 유지 해왔던 그렉의 목회 대상 즉 일반 사람들이 겪는 고충을 그렉은 몰랐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조건이 믿을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는 성직자들의 삶이라는 것은 평신도들의 삶에 비한다면 얼마나 평온한 것인가?

리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리사 아버지의 추행은 마침내 어머니에게 발각이 된다. 그 동안의 정황을 되짚어본 리사의 어머니는 그렉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렉은 그레이엄과 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사제의 동성애 사건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된다. 그렉은 수치심에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교구청으로부터 회복 기간을 갖도록 지시 받는다. 그가 회복을 위해 들어간 곳에서 더 강직한 노(老)신부를 만난다. 노신부는 거룩한 언어 라틴어로만 말할 뿐이다.

그렉은 이 끝없는 경건의 단계가 종착점이 없음을 깨닫고 마치 다 이루었던 것과 같았던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나 위로 차 찾아온 매튜에게 그레이엄을 사탄이라고 지칭했다가 매튜로부터 질책을 받을 정도로 그렉의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사람은 늘 창조 과정 속에 있는 부족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 다만 그 사랑이 순수했다면 그것으로 가치가 있었다고 매튜는 그렉을 위로한다. 회복의 기간을 거친 후 교회로 돌아온 그렉은 신도들의 차가운 시선 앞에 마주 선다. 신도들은 그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이 회복을 거친 신부는 난데없이 누구도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며 자신을 방어한다. 정죄하던 그가 정죄하지 말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상대방을 향한 것이다.

 

   
 
     
 

상처받은 리사에게 치유 받는 그렉 신부

새롭게 깨달은 이 고백도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때 리사가 나타난다. 리사는 그렉을 껴안고 둘은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렉은 마침내 상처받은 치유자 리사에게 치유 받는다. 속죄의 교리도,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매튜도, 변했다고 믿었던 자신도 아닌, 상처투성이 리사의 눈물에 의해 그의 죄는 씻기어 지고 영혼은 자유로움을 얻는다.

젊은 신부 그렉은 천주교에서 호칭이 그렇듯이 아버지(father)다. 그는 리사의 아버지 따위의 인간들과는 질이 다르다. 그는 항상 옳기에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털어 놓고 그는 사죄를 선포한다. 그런데 죄가 없는 존재가 어디 인간인가? 죄 없는 이는 하나님뿐이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죄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라면 하나님은 아닐 것이고 괴물이거나 사탄일 수밖에 없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죄가 아니라며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을 것을 권고한다. 그렉은 스스로 죄 없다고 생각한 것이 사탄적일 수 있음을 모르고 사제의 역할이라 착각했다.

그러던 그가 죄 가운데 들어왔다. 그는 괴물에서 인간이 되었다. 리사의 아버지의 추행의 죄나 해결 못한 그렉의 죄나 모든 것은 마찬가지다. 가정부와 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매튜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그는 자신도 속죄의 대상임을 깨닫고 그 속죄가 바로 자신이 고민을 해결해 주지 못했던 리사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깨닫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는 비로서 성직자라는 위선 탈을 벗고 나와 그들을 나누던 벽을 깨고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 축하할 일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그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속죄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선포다.

그런데 이 선포처럼 편의에 맞게 사용되는 교리도 없다. 타인의 죄를 누구도 정죄할 수 없지만 그것이 죄지은 자 또는 그 측근에 의해 선포될 때 이것은 또 다른 죄이다. 회복의 기간을 거친 그렉이 바로 이 단계에 와 있다. 그는 참으로 뻔뻔하게도(속마음이야 타들어갔겠지만)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라며 목청을 높인다. 속죄와 은총의 교리가 낳은 피해자들이다. 속죄의 보편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이들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죄가 죄인지도 모른다. 죄가 죄인지 모를 때 모든 죄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삶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이른바 성공한 목회자들 또는 일부 신흥 교단들이 속죄(구원)의 시간을 들추어내며 그날 이후로 모든 것에 자유로와졌음을 선포하는 것 등에서 이런 피해자들이 발견된다.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또 다른 피해자들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있다.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가치 기준은 그들의 손 안에 있다. 그래서 그 기준을 가지고 모든 이들을 배척한다. 이성과 상식의 이름으로 때로는 정의의 이름으로 정죄를 일삼는다. 이들은 자신들은 속죄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고 착각한다.

그렉의 앞뒤 꽉 막힌 것을 비판하던 장례식의 조문객들이 그런 부류다. 그들은 장례식을 엄숙하게 이끌려던 그렉의 종교성을 비웃으며 자신들의 자유로움을 자랑했지만 그렉의 죄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다. 진보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들에게는 윤동주의 시가 필요하다.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태초의 아침)

누구보다도 신앙이 깊었고 독립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아름다움을 구사할 줄 알았던 이 젊은이를 억누르던 죄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하나님에게 역설적으로 굴복한다. 죄를 지음이 숙명이라면 빨리 지어버리고 그냥 인간으로 살아가야겠다는 푸념은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와 민족 시인이기에 앞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진정한 속죄는 눈물(때로는 땀)을 동반한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성서의 언어이지 내 판단의 언어가 아니다. 함부로 판단하는 이들이 밉지만 그들을 향해 인간은 모두 똑같으니 정죄하지 말라며 목청을 높이는 이들은 더 한심하다. 속죄를 선포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진솔한 눈물이 없으면 속죄는 거짓이다.

위태위태했던 어느 목회자의 실족

최근 한 위태위태했던 목회자의 이성애적 실족을 두고 말이 많다. 사람들은 그의 실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젊고 유능한, 교회를 키운, 대표적인 등등의 수식어로 대비시키지만 나는 그가 항상 위태해 보였었다. 그는 괴물의 또 다른 형태인 슈퍼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교회를 키우고 나서는 '하면 된다'의 비복음적 개발 독재 이론의 수호자가 되어 버렸다. 노력하면 되는데 하지 않아 되지 못한 이들의 무능을 일깨운다.

그의 칼럼 곳곳에서 그는 비오는 날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능한데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말한다며 그들을 비웃는다. 새벽잠이 많았던 그는 새벽기도가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시간 개념을 바꾸어 버리니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며 새벽잠 많은 사람들을 훈계했다. 최대한 노력해서 토익 만점을 맞아도 마치 천형처럼 따라 다니는 비명문대의 졸업장으로 대기업에는 원서도 못 내보는 해도 안 되는 젊은이들의 눈물을 그는 모른다. 아니 명문대를 나오면 다 해도 되는가. 그들 중 일부는 장관의 자제가 아니어서 가고 싶은 직장을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눈물을 흘리는 젊은이들에게 슈퍼맨의 탈을 쓴 대통령은 “좀 눈을 낮추어 가면 될 터인데”라고 말하며 제 수준에 맞게 살라고 한 번 더 좌절하게 만든다. 이건 사람이 할 말이 아니고 할 짓도 아니다. ‘하면’(선악과를 먹으면) ‘된다’(하나님처럼)고 꾀는 낙원의 뱀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해도 안 되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였다. 그는 심지어 천사와도 싸웠으나 남은 것은 절름발이 다리뿐이었다. 인생을 후원하고 재산을 축적하고 일가를 일군 야곱을 지탱해온 그 튼튼한 발의 힘줄이 끊어지는 순간 그는 비로소 하나님과 맞선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설교가들은 야곱의 적극적인 성격을 본받으라고 사탄의 언설을 늘어놓는다.

나는 자세한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목사가 도착증의 수준에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지친 목회 현장에서 위로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했거나 속죄의 잘못된 두 번째 유형처럼 모든 것을 초월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는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짓을 그만 둘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렉 신부처럼 그의 실족의 원인을 상대방에서 찾고 그들을 사탄이라 부르며 빠져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 돌파구를 찾을 능력이 있는 슈퍼맨이 이제 죄 속에 놓인 사람이 되었다.

비로소 사람이 되는 축복을 받았음을

기뻐할 일이다.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성직자는 결코 사람과 다른 존재가 아니기에 언제든지 죄에 노출될 수 있으며 바로 거기서부터 목회가 시작될 때 더욱 겸손해 질 수 있다. 하나님 같은 슈퍼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못 살아갈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인데 함께 격려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회복의 기간 동안 슈퍼맨의 버릇을 못 버리고 개척교회를 돌보겠다는 언론 보도도 있다. 그에게 멘토가 있다면, 그가 회복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이 짓을 막아야 한다. 그는 회복의 기간 동안 '해도 안 되는 사람들'의 눈물로부터 용서받아야 하며 ‘무능한’ 젊은이들에게 치유 받아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다른 죄인들과 함께 부둥켜 울어야 한다. 자신이 복음이라고 믿었던 것이 하나님을 맞서는 불경한 일이었음을 회개해야 한다. 그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 되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패배의 순간에서 고상할 수 있는 시팅불의 기독교전 버전은 무엇일까? 그것은 매튜 신부의 화두인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화두다. 기독교인에게 패배의 순간이란 투자가 실패해서 돈을 못 버는 순간이 아니라 죄에 굴복하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행동은 하나님께 굴복하는 인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어떤 변명도 없이 그냥 사람이 되는 일이다. 스스로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던 그렉은 한 소녀에게 위로 받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과 한 몸이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었다. 그렉이 자신을 찾은 것은 부끄러움 끝에 찾아왔지만 자신의 실존을 알았다는 점에서 정말 기쁜 일이다. 오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의인 행세를 하고 슈퍼맨 행세를 하는 이 땅의 모든 괴물들에게 사람이 되는 축복이 임했으면 좋겠다.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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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swill 2010-10-14 02:40:40
신조나 교리가 아니라,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 같네요. 깊게 호흡합니다.

leenoah 2010-10-13 10:28:32
진정으로 기도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결코 슈퍼맨이 아니라 지극히 연약한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능력을 많이 부어주시길 기도도 중요하지만, 죄의 유혹으로부터도 항상 지켜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함께 짊어지고 가는 것이 성숙한 성도일 것입니다. 정죄는 하지말고, 철저하게 함께 회개하면서 거룩함으로 갈 수 있도록 끌어안고 가야합니다. 남의 연약함이 나에게 강함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나의 연약함이 남에게 강함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 강함은 바로 사랑과 위로, 치유가 되는 것이겠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끄럼을 개의치 않으시고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을 함께 지고 갈 때 하나님의 기적은 놀랍도록 일어날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연합해야 교회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