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도록 지탱해준 하나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도록 지탱해준 하나님
  • 홍성종
  • 승인 2007.04.15 0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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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메이저리그 진출 60주년 맞은 첫 흑인 야구선수 재키 로빈슨의 기념비적 생애

▲ 어린 재키 로빈슨이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행 열차를 탔던 남부의 시골 카이로(Cairo, GA) 정거장. 지금은 여객 열차는 사라지고 화물 열차만이 다니고 있고, 당시의 역사(驛舍)는 경찰서로 쓰이고 있다. ©홍성종
지난주 미 대륙의 봄철 기상도에는 인종차별이라는 황사가 한차례 몰아 닥쳤다. 황사의 발원지는 CBS 라디오 ‘아이머스 인 더 모닝’의 진행자로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단 아이머스(Don Imus, 65). 피플지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한 아이머스는 지난 4월 4일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럿커스 대학 여자 농구팀의 흑인 여자 선수들을 향해 ‘곱슬머리 창녀” 운운하며 인종을 비하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아이머스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언론인·흑인 인권 운동 단체와, 심지어는 해당 프로그램의 출연자와 광고주에 이르기까지 거센 항의를 불러 일으켰고, 결국 CBS 측은 지난 4월 12일 아이머스를 해고했다.

아이머스의 사건은 인종차별이라는 낡은 시대의 도그마가 미국 사회의 이면에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여준 단면이다.

인종차별, 미국 사회의 이면에 뿌리깊게 자리 차지

인종차별의 황사가 미 대륙을 덮은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며칠 전과는 사뭇 다른 청명한 하늘을 맞이하고 있다. 인종의 장벽을 넘어 흑인으로는 첫 프로야구 선구가 된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의 메이저리그 진출 60주년을 맞이하여 차별과 편견에 당당히 맞선 그의 기념비적인 생애에 대해 언론이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1947년 4월 15일. 역사적인 그 날을 기념하고자 LA 다저스의 구단주인 프랭크 맥코오트(Frank McCourt)는 15일을 ‘재키 로빈슨의 날’로 공식 선언했다. 또한 메이저리그의 최고책임자인 버드 실릭(bud Selig)은 로빈슨의 등번호인 ‘42번’의 유니폼을 이번 4월 15일에 LA 다저스의 선수뿐만 아니라 코치나 매니저 등 원하는 모든 사람이 입도록 했다. ‘42번’은 전설의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50주년을 기념하고자 지난 1997년에 30개 구단이 합의하여 ‘42’번을 함부로 달 수 없도록 영구적으로 은퇴시킨 번호였다.

재키 로빈슨는 1919년 1월 31일, 사탕수수와 면화농사로 둘러싸인 남부의 작은 도시 조지아주 카이로(Cairo, GA)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제리(Jerry)와 어머니 말리(Mallie)는 인근의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일했다. 아버지 제리는 로빈슨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어머니 말리는 오빠의 권유에 따라 이듬해 가족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홀어머니 아래서 어린 시절 가난과 함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자랐다.

로빈슨은 학창 시절 야구·농구·미식축구, 그리고 육상 등 전천후 운동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번번이 좌절했고, 한때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재키의 형인 맥(Mack) 역시 운동에 남달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해 육상 200미터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로빈슨은 제대 후 1945년에 니그로 야구 리그에 참가하여 주로 중서부 지역의 변방을 돌며 운동을 계속했다. 그런 그에게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회장 브랜치 릭키(Branch Rickey)가 다가와 다저스에 입단할 것을 권유했다. 1889년 이후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선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로빈슨은 흑인 야구선수로 개인적인 영예를 안은 반면에 주변 사람과 관중으로부터 온갖 야유와 모멸감을 받아야만 했다. 동료 선수들로부터는 합숙을 거부하거나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외면 당하는 등 갖은 차별과 편견에 시달렸다. 그러나 어떠한 차별과 편견도 로빈슨의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로빈슨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어떠한 장애를 발견한다 해도 그 장애는 나를 더욱 강하게 싸우도록 할 뿐이다”고 굳은 의지를 밝히며, “ 나의 싸움에는 반드시 ‘기회’가 내재하여 있다는 개인적이고 심오한 믿음을 붙들지 못했다면 이 같은 싸움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로빈슨은 데뷔 첫해에 ‘내셔널리그 신인상(National League Rookie)’을 수상했고, 12개 홈런을 비롯해 29개의 도루, 그리고 2할 9푼 7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 여세를 몰아 1949년에는 내셔널리그의 최우수 선수가 되었다. 그해 평균 타율은 3할 4푼 2리. 로빈슨이 속한 팀은 그의 공헌에 힘입어 월드시리즈 우승을 비롯해 여섯 차례의 정규 레이스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 재키 로빈슨이 태어난 곳인 남부 조지아주 작은 도시 카이로(Cairo). 이곳 도로 역시 '재키 로빈슨 기념대로(Jackie Robinson Memorial Parkway)'라고 이름을 붙였다. ©홍성종
"어떠한 장애가 닥친다 해도 나는 더욱 강하게 싸울 뿐"

재키 로빈슨은 1956년 은퇴한 후 흑인 인권 운동에 공헌했고, 1970년에는 잭키 로빈슨 건축회사를 설립하여 저소득 계층을 위한 집짓기 사업 등에 헌신했다. 로빈슨은 야구에서 흑백의 장벽을 깨트린 것뿐 아니라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악습에 시달린 북부와 남부의 모든 흑인들에게 용기와 도전을 준 영웅이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볼 때, 로빈슨의 메이저리스 진출은 흑인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듬해 ∆트루먼 대통령의 미군 내 차별 금지 발표(1948)를 시작으로 ∆미 대법원 학교 내 차별 위헌 선언(1954) ∆로자 팍스(Rosa Parks)의 앨라바마 몽고메리에 버스 승차 거부 운동으로 시작된 흑인 인권 운동의 점화(1955) ∆C. K. Steele 목사의 플로리다 주도인 탈라하시에서 버스 보이콧(1956) ∆그 이듬해 마틴 루터킹 주니어, Steele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남부크리스찬리더연맹 결성(1957) ∆Freedom rides(1961)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혼을 흔드는 연설 “I have a dream”(1963) ∆의회 시민권리헌장 통과(1964) ∆ 흑인 선거권 의회 통과(1964), 그리고 ∆흑인 최초의 대법원 판사 Thurgood Marshall 임명(1967) 등으로 이어져 갔다.

재키 로빈슨은 1962년에 명예의 전당(The Hall of Fame)에 이름이 올랐고, 1972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후세에 꺼지지 않는 불로 번져 나가고 있다. 지난 2005년에는 민주사회에 이바지한 공로로 의회가 수여하는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

로빈슨은 단순한 야구 수퍼스타를 넘어 지난 60년 동안 미국 정치와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온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흑백 간의 소득 격차와 교육 불균형, 그리고 아직도 잠재하고 있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당당히 맞설 로빈슨의 정신을 이어갈 ‘42번’의 영웅을 미국 사회는 기대하고 있다. 특히 상업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오늘날의 프로선수들과 성공한 흑인들이 로빈슨과 같은 정신으로 거듭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사회 개선에 나서도록 요구하고 있다.

▲ 재키 로빈슨이 태어난 곳인 조지아주 카이로(Cairo)의 동네 아이들. 로빈슨이 평생 싸워온 불완전한 사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남부의 아이들은 가난 속에서도 제2의 로빈슨을 꿈꾸며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다.좌로부터 Kalleo Scott(8), Jamichael Samuel(9), DJ Cosby(10), Dontavious Mallald(6), Quez Scott(7), Tae Scott(9). ©홍성종
다음은 재키 로빈슨이 1952년에 쓴 글 전문을 옮긴 것이다.

자유하고자 하는 마음과 온 힘을 다하는 열정 (Free Minds and Hearts at Work)

1947년 월드시리즈 개막 순간 국가가 울려 퍼질 때 나는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감정을 경험했다. 생각컨대, 이 순간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경기를 하는 것처럼 나 역시 자신을 위해 경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야구. 여기 이 자리에 나도 당당히 한 구성원이 되어 다른 선수들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약 1년 후 나는 시범 경기에 출전하고자 조지아주 애틀란타를 방문했다. 경기장에는 애틀란타에서는 처음으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있었다. 경기장을 찾은 내 주변에 다른 흑인들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비로소 내가 항상 믿어왔던 것들이 실현되었구나.

내가 항상 믿어왔던 것,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불완전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 속의 이러한 불완전한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숨을 쉴 여지가 있다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가 완전함을 이룰 수 있다거나 완전함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조건, 장애물, 편견-이러한 모든 것은 불완전한 요소들인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들로 여긴다.

어떠한 장애를 발견한다 해도 그 장애는 나를 더욱 강하게 싸우도록 할 뿐이다. 그러나 나의 싸움에는 반드시 ‘기회’가 내재하여 있다는 개인적이고 심오한 믿음을 붙들지 못했다면 이 같은 싸움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자유로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한 반드시 기회가 있다. 단 한 번도 부동의 목표물과의 싸움에 직면하거나 내몰리지는 않는다. 단 한 번도 전혀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요지부동의 상황은 없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자유로운 마음과 열정으로 온 힘을 다했다. 그 결과 개선의 가능성을 보았다. 나는 지금 내 자녀를 바라보며, 앞으로 그들이 장애와 편견들을 맞닥뜨리도록 준비시켜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현재 당하는 편견 중에 상당 부분은 그들보다 앞서간 사람들로 인해 저들이 마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진보는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처한 낡은 신조들의 많은 부분은 자녀들이 자라 어른이 될 무렵에는 사라질 것이다. 자녀들에게 단언할 수 있다. 반드시 너희에게도 기회가 있다. 저절로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찾아온 기회는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을 묶어둘 수 없다. 앞을 향해가는 거대한 흐름을 인간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중세시대의 논리를 나는 신봉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완벽해질 것이다. 내가 확실하게 믿는 것은 과거의 낡은 신조들을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뒤로 하고 오늘의 진리를 발견하고, 아마도 내일의 위대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류를 믿는다. 나는 인간의 따스한 가슴을 믿는다. 나는 사람의 정직성을 믿는다. 나는 자유로운 사회가 지닌 선을 신뢰한다. 어떤 불완전함이 존재하더라도 이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있는 한, 우리 사회가 공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싸움은 야구라는 운동에 흑인을 배제하는 장벽을 향한 싸움이었다. 그곳이 내가 발견한 불완전함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리고 나는 이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았다. 자유 사회에서 패배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나 자신이 행해온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나를 싸움에서 지탱해준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장차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겪어야 할 싸움이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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