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티파티 운동'을 기독교적이라 했나?
누가 '티파티 운동'을 기독교적이라 했나?
  • 짐 월리스
  • 승인 2010.11.09 2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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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월리스, '티파티가 원하는 '자유'는 누굴 위한 것인가'

지난 11월 2일 미국 중간선거는 공화당에게 압승을 안겨줬지만, 실질적 승자는 보수적 풀뿌리 유권자운동단체인 '티파티'라는 사후 분석이 나오고 있다. 빈말이 아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티파티는 위력을 과시하며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티파티에 대거 포진한 탓에 기독교적 정치 운동처럼 덧칠된 경향도 있기에 짐 월리스가 티파티의 신학을 분석한 글을 올린다. (편집자 말)

티파티 운동의 반란이 부상하면서 공화당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있다. 티파티 운동에 확신을 가진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11월 선거의 전면에 나서고 있으며 복음주의자 글랜 백 등이 하는 토크쇼에 자주 등장해 유명세를 타고 있다.

티파티가 한 방향의 운동이나 대변인을 따로 두고 있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자유방임주의 철학에 기반을 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새로 대두되는 현상으로 보긴 어렵다. 자유방임주의라는 명칭은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와 같이 종교 철학이라기보다는 정치 철학에 가깝다. 아직 조직화 되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티파티는 민주당이나 공화당 같은 정당처럼 정치적 힘을 추구하고 있다.

   
 
  ▲ 티파티 운동을 주제로 다룬 <소저너스> 11월 호 표지. (출처 : <소저너스> 웹사이트)  
 

이것은 세속적인 운동이지 기독교 운동이 아니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티파티에 관여하고 있고, 티파티 운동에 동조한다고 해서 티파티 운동이 기독교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 양 당의 정책과 철학을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원칙을 놓고 티파티를 분석해보는 것도 납득할만한 일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왜 티파티 운동과 자유방임주의 정치 철학의 배경이 된다는 것인가?

자유방임주의는 정치 철학으로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삼는다. 자유방임주의는 정부를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큰 방해물로 본다. 자유방임주의는 문화적,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서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한다. 특히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매우 중시하며 경제, 예산 정책에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정부 규제를 최소화 하는 자유 시장을 선호한다.

지금 미국인들의 정치적 인식에는 “그냥 날 놔둬. 내 돈도 쓰지 말고”라는 식의 정서가 자라고 있다. 티파티 운동의 주도자들은 이 운동이 가지는 세 가지 핵심 정신에 대해서 말을 하고 한다. 그 세 가지는 ▲ 근본적인 정부 역할의 제한, ▲ 재정상의 책임, ▲자유시장이다. 많은 티파티 운동의 옹호자들이 경제적 문제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다. 낙태나 동성 결혼 등의 사회·문화·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아끼는 편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자유방임주의가 공화당 기저에 깔리는 정서였었던 적도 있다. 최근 당내 경선에서 티파티 관련자들이 대거 발탁되면서 더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최소한 6명의 상원 의원 후보가 티파티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중 두 명은 현역 상원의원을 꺾었다. 하원 의원 후보로도 다수 선출됐다. 그중 많은 관심을 끌었던 사람은 랜드 폴이다. 그는 예전 대통령 후보였던 론 폴의 아들로 켄터키 주 상원의원 후보가 됐다.

랜드 폴은 진정한 자유방임주의자처럼 이야기해왔다. 그는 1964년에 있었던 민권운동(흑인들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60년대 일어났던 미국의 운동. 역자 주)을 한 예로 들었다. 정부의 간섭이 개인 사업에 관한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인종주의이고 차별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만약 그가 60년대에 정치를 했다면, 개인 사업체가 인종에 근거해서 차별하는 것을 불법화한 법을 뜯어고치려고 시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사람은 매우 구체적인 것을 물어본 것이었다.

점심식사 때 인종 별로 따로 앉히는 법을 폐지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었다. 랜드 폴은 “식당의 주인이 사장입니까? 아니면 정부가 식당을 소유한 것입니까?”라고 대답했다. 며칠 후 그는 멕시코만의 기름 유출과 관련해서도 언급을 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기름 유출의 당사자인 BP(British Petroleum)를 비판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기업체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너무 비미국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것이 기독교인의 철학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몇 개의 도덕적 관점을 검토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유방임주의가 성경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임에 동의할 것이다. 여기 몇 가지 생각해볼만한 내용을 정리해봤다.

1. 개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삼는 자유방임주의자들에 대해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독교적 전통과 가르침인 공익에 의문을 제기하는 개인의 선택에 대한 강조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을까?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형제, 자매를 지키는 사람들인가?”라고 답해야 한다. 물론 대답은 “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계명어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웃들에게 “날 좀 내버려둬”라고 말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더 나은 반응이다. 이러한 결심 없이는 개인의 선택의 강조는 결국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쉽게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2. 자유방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선이 가난이라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인가? 동정심(Compassion)과 사회정의는 기본적인 기독교인의 약속이다. 기독교인과 기독교 공동체가 동정심과 사회정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가난에 대한 대처는 개인의 자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기본적인 기독교의 명령이다. 또한 많은 성경 구절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박해 받는 사람들이 침해당하고 있는 정의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불공평한 사회에 대해 비난하며 공통적으로 하는 언급이 있다. 예언자들은 왕(정부)이 공정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 요구 조건은 이스라엘의 왕과 타국의 지도자들에게 공히 적용된다.

예레미야는 요시아왕에 대해 이야기하며 쓴 글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았다”(예레미야 22:16)고 했다. 아모스가 법원(정부)을 지도하면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아모스 5:15)고 했다. 예언자들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왕들과 지배자들과 재판관들에게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3. 진보와 보수 기독교인이 공히 자유방임주의자에 대한 의문들을 가지고 있는 지점은 그들이 이 세상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유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취약한 계층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일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한낱 우리 자신을 위한 개인의 자유가 아닌 타인의 인권을 지키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소명이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공간을 지키는 것이 기독교인에게서 최우선의 과제인가? 공공의 영역이 공정하게 유지되게 해서 우리 뒤로 쳐져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동등한 기회와 품위를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4. 반정부적 이데올로기가 정말 성경적인 것일까? 로마서 13장에 보면 (상원 의원 후보가 아닌) 사도 바울이 정부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역할에 더해서 정부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로마서 13장은 12장의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 12장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이 공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십시오”(로마서 12:16)라고 경고한다.

사회 질서를 지키고, 악을 벌하고, 선을 옹호하며, 공익을 보호하라는 것은 이미 규정된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러한 활동을 위해 세금을 내라고 교육까지 받았다. 물론 정부의 크기와 역할에 대한 토론은 언제나 있어왔고 정당한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작은 정부”와 “큰 정부”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3장은 국가를 전체주의의 괴물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있었던 로마 정부에 대한 은유였다. 이 구절은 정부의 힘을 오용하는 경우에 대한 분명한 경고를 담고 있다. 정부는 시민들을 위해 공정과 정의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에 굶주린 정부는 정부 본연의 역할을 망각한다. 정부의 존재가 모든 문제의 중심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5. 자유방임주의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시장'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의 관점과 일치할 수 있을까? 성경은 인간의 근원과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 하고 있을까? 정부를 문제에 중심에 놓는 편협한 시각이 다른 사회적 문제를 놓치게 할 수 있다. 지금 사회의 은행이나 기업체의 거대한 권력을 보자면 정부를 능가하는 형편이다.

정부의 규제가 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상황에서 시장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삐가 풀려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시장은 공공의 안전, 공익, 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보호 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죄가 없는(sinless) 시장”의 미신을 믿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사업체의 주인과 회사들이 사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 문제를 고치는 주체는 자유 시장이지 정부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유의 이론화는 공공의 영역이 풀어야만 하는 실질적인 문제를 무시하게 된다. BP(British Petroleum)과 같은 큰 회사들이 바다에 기름을 쏟는 일이 허가되어도 될까? 10개의 은행이 미국 신용카드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규제가 과연 비미국적(un-American)인 일일까? 우리는 우리가 먹는 고기를 검역한다던가,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의 안전성을 점검한다던가, 깨끗한 공기를 위해 공해 물질 배출을 감시하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길 진정 바라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호텔이나 식당의 주인이 손님을 가릴 권한을 주고 싶은 것인가? 주류 판매점 사장이 우리 아이들에게 술을 팔 수 있도록 허가되어야 하는 걸까?

모든 인간이 만든 기관들의 죄라는 현실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공정성을 점검하고 책임을 다하게 하는 과정이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맞는 이야기 아닌가? C. S. 루이스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시장이 기업 전체주의의 괴물로 자라지 못하게 하는 주요한 역할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책임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상공회의소가 내세우는 우선순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선순위에 따라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것이다.

6. 자유방임주의자들이 내포하고 있는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긴다는 생각이 기독교의 가치라고 볼 수 있나? “나를 그냥 내버려둬. 내 마음대로 선택하고 내 마음대로 내 돈을 쓸 거야”라는 정치적인 철학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현실적으로 불리하게 만든다. 기독교가 정치 철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매우 요소가 된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이 읊는 팔복 중 “혼자 남은 이에게 복이 있나니”는 아직 산상수훈에 끼지 못했다. 만약 제도가 가진 자들 것을 보호하고 기댈 데 없고 보호막도 없는 약한 자들을 더 약하게 만든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응당 약한 자들을 보살펴야 한다.

7. 티파티 운동은 백인 중심의 운동인가? 최근 <CBS>와 <뉴욕타임스>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티파티 활동가의 인종을 묻는 질문에 89%가 백인이라고 대답했고 1%가 흑인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티파티 운동의 동조자들은 모두 인종주의자들인가? 물론 아니다. 한 티파티 운동 주동자는 인종차별주의자의 블로그에 글을 쓰고 나서 모임 탈퇴를 요구 받았다.

그러나 아직 백인들의 분노가 티파티의 기저에 깔려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만약 흑인이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에 들어가 대통령을 하는 일이 없었다면, 티파티 운동이라는 게 일어났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 솔직한 답을 내놓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 진 것이 무엇인가? 다른 이들의 인권이 우리 자신의 자유만큼 중요하지 않은가? 기업체의 이익을 공개하고 공공이 감시를 하는 것이 정말 “전체주의 정부”의 활동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며 좋은 장치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선택 말고 공공의 영역에서 활동해가는 기관을 위해 이런 정도의 도덕적 질문은 던져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척 구탠슨 박사는 <소저너스>의 최고운영책임자고 애스배리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던 교수이기도 하다. 구탠슨 박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수년간 강의하고 연구해왔다. 구탠슨 박사는 “지금까지 자유방임주의자들이 내세운 정책과 철학을 기본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들의 입장은 성경적 가르침과는 완전히 어긋나 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정치적 철학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유방임주의이다”라고 말했다. 구탠슨 박사의 말이 너무 강한 것인가? 아니면 그의 말이 맞는 것인가?

글·짐 월리스 <소저너스> 대표 / 번역·김성회 기자

* 이 글은 <소저너스>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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