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이게 탈인종 사회의 실상이란다
아들아, 이게 탈인종 사회의 실상이란다
  • 브라이언 벤텀
  • 승인 2010.12.06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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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탈인종 시대 관찰기

브라이언 밴텀 교수(시애틀퍼시픽대학)는 히스패닉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인이다. 이 글은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얻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저자의 블로그에 실린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 번역 게재한다. (편집자 주)

이 편지는 열두 살 된 내 아들에게 쓰는 글이다. 아들이 이 편지를 지금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살면서 혼돈과 배척의 순간을 경험하게 되면 그때 내 편지를 다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글을 적는다. 하지만 이 편지는 또한 세상을 향한 글이기도 하다. 무언가 바꾸길 원하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네가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선서를 하는 미국의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봤을 때는 겨우 열 살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의 선서를 할 때 수 세기를 이어왔던 이 나라의 자책감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인종을 뛰어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외친다. 인종 화합에 가장 적절할 것 같은 이 순간에도 인종 화합의 실체를 찾기는 정말 어려운 듯하다.

벌써 2년이 지났구나. 넌 이제 "함의 저주"(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이 흑인이라는 주장 : 역자 주)가 모든 사회의 표면 아래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다름에 대한 거부"라는 사실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구나. 그건 문화적이라기보다는 야만적인 일이다. 이제 네 나이가 되면 인간이 얼마나 "다름"에 집착하는지 아주 조금은 알게 됐을 것이다. 아주 미묘한 차이라도 찾아내서 키우곤 하지. (7학년인 너희들도 그러는 것 같더구나.)

다른 것에 차별을 두는 문화가 여기저기서 드러나긴 하지만, 우리의 현재가 단순히 과거의 반복이 되는 법은 없단다. 너는 물라토(중남미 백인과 흑인의 혼혈 인종: 편집자 주) 아버지와 한국인 엄마를 두고 있단다. 네 존재 자체가 많은 조각, 이야기, 장소와 "가능성"이 공존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탈인종(Post racial)"의 희망에 대해 꿈꿀 때 네가 그 꿈의 압축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탈인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주 오래 전에 (백인들의 눈에) 백인과 유색인종만 존재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개념을 엉터리로 다시 다듬었다는 슬픈 사실을 네가 알게 되니 나는 참 마음이 아팠단다. 네가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이 세상에서 어떤 백인 아이들은 네가 백인이 아니니 널 흑인이라고 부를 꺼다. 다른 한 편에서 소수의 라티노들은 너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깜둥이라고 부르겠지. 그 아이들의 무지나 악의는 악랄한 범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게 네가 살고 있는 탈인종 미국이라는 곳의 실상이다, 아들아.

하지만 이게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더군다나 가능성도 없는 막다른 골목도 아니다. 하지만 난 네가 지금 어떤 세상에 들어와 있는지, 네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지 잘 알아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종적 애매함의 중간도 가운데도 아닌 모호한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지난 12년간 네 인생에서 "나는 누군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즐겁고 호기심 가득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 정체성에 대한 그런 순진한 질문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단다. 아시아인들과 섞이기에는 뭔가 아시안 답지 않은 외모이고, 흑인들과 어울리기엔 충분이 검지 않은 네 피부를 보고 누군가는 "백인이 되긴 너무 까맣다"라고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들아, 너는 이제 이쪽도, 저쪽도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운신의 폭이 좁다고 느끼는 건 네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너는 "가운데 존재하는 사람(in-betweener)"의 2세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세상은 혼혈인 물라토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 던져 버리면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정말 우리 개인을 위한 자리가 되겠지. 나라는 존재가 물라토에게 씌워진 문화적 기대에 의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로 증명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곳이 끝없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곳도 아니고 자율적인 개인들의 세상도 아니란다. 너와 나는 서로에게 연결 되어 있다. 너와 나는 우리를 반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부하는 사람과도 연결 되어 있다. 이 모든 희극과 비극의 역사와 현실과 원천들이 네 핏줄을 타고 네 얼굴로 흐르고 있다.

   
 
  ▲ 벤텀 교수  
 
너와 나는 중간에 놓인 사람들이란다. 우리는 손쉽게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 모든 사람들을 연관시키지 않고는 우리가 누구인지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속해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있단다. (이 이야기를 내가 꺼낼 것을 네가 알고 있었겠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조국에 살고 있거나 이방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은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다"라고 말했단다.   
 
만약 탈인종 시대가 자그마한 뜻이라도 가진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 뜻은 이것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나 고향에 있고, 또 고향에 있지 않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게 자그마한 뜻이라도 가진다면, 그건 우리가 언제나 고향에 있고 또 고향에 있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중간에 놓인 사람"으로서 겪는 소외와 거부가 우리 삶의 전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글·브라이언 벤텀 교수(시애틀퍼시픽대학) / 번역·김성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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