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조차 통제하려는 욕망의 습기
말씀조차 통제하려는 욕망의 습기
  • 최태선
  • 승인 2011.05.13 11:2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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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좋은 교회'

한때 좋은 교회들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명불허전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보고 들을 것이 많아서 책들과 교재들 그리고 테이프들을 잔뜩 사오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사온 테이프들을 이민 가방에 집어넣었는데 간신히 지퍼를 잠그고 보니 너무 무거워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진열되어 보물처럼 여겨지던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이 가방 속 신세가 된 것은 어느날 그것들이 머릿속 지식과 감성만을 채우고 자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은 참 설교를 잘하시고 성도들은 진지했습니다. 예배시 찬양을 할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말씀을 들을 때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짧았고 미소로 헤어지는 인사가 정겨웠습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에는 부드러워진 제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것이 다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변죽만을 울리다 마는 종교 놀음에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 콧물 쏙 빼는 것이 설교 잘 하는 것이고,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것이 찬양 잘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아니 그것이야말로 말씀으로부터 폭발력과 혁명성을 제거하는 일종의 곁길이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명불허전이었던 좋은 교회 순례
 
말씀과 만난 사람은 삶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말씀은 사람을 만나 육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새로운 몸을 필요로 합니다. 프랑스의 문예 비평가인 르네 지라르는 성경을 가리켜 "산고(産苦) 속에 있는 텍스트"라 하였습니다. 절묘한 표현입니다. 성경은 새로운 인생을 태어나게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새로운 삶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과 만난 사람에게 있어 삶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고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것처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그래야 하는 것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알짬입니다.
 
교회가 바르다는 것이,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이 오히려 말씀의 생명력을 앗아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작은 충격이었습니다. 말씀에 의해 변화되어 자신을 내어놓기보다는 말씀을 간직한 채 말씀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거룩한 존재들로 말씀에 깊이 중독된 그 모습은 또 다른 유혹이요 함정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안주하기를 원하고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성이 강한 존재인가를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씀마저 자기의 통제 하에 두려는 인간들의 욕망은 인간이 얼마나 구제불능의 죄악 된 존재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욕망의 습기로 축축해 불꽃이 타오르지 못하는 영혼
 
마커스 보그는 성경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볼 것을 제안하면서 역사적(historical), 은유적(metaphorical), 성례전적(sacramental)이라는 세 개의 단어를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이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기록된 텍스트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이고, 문자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뜻에서 ‘은유적’이고, 신성한 것을 매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례전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셋은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배경을 연구하고 역사 자체를 타산지석으로 삼으며, 말씀 속으로 들어가 깊이 묵상하여 오늘의 상황과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내 삶 속에서 예배가 되도록 말씀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성경을 삶의 ‘척도’로 삼아 그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고 자기 삶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징표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폭발력이 그들 안의 갈급한 영혼과 만나 성스러운 불꽃을 타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영혼은 욕망의 습기로 축축하기 때문에 불꽃으로 타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덕지덕지 껍데기로 떡이 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위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런 자신들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 도취되어 종교적인 '나르시스트'가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찾아가는 모험과 도전에 뛰어드는 것이기에 자기중심성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자 혹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고 삶의 평온이 깨지기도 합니다.

확실하던 것이 불명확해지고, 확신이 회의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내맡기게 됩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처절한 외로움에 오래도록 몸부림치기도 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상한 불꽃 앞에 서기도 하고, 영혼과 육체가 갈가리 찢어지는 처절한 자기 부인의 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모리아 산을 향해 가는 침묵과 순종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의 유일한 공통점은 갈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으면 복음은 폭발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모험에 뛰어들겠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창조적인 거친 야성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불확실한 여정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가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하나님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 중심의 교회도 사람 많이 모이면 성령의 역사?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공 조미료에 길들여진 입맛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의 전복적 메시지를 꺼려하고, 설교자들은 성경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서로 간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준음으로 삼아 삶을 조율해야 하는 인간들이 자기 욕망을 투사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탐욕을 합리화해주는 도구로 말씀을 오용합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교인들이 상처받을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말씀의 뇌관을 제거하여 폭발하지 못하도록 안전조치를 취합니다. 결국 인간들이 성경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 중심의 교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자화자찬을 거룩함으로 포장하기까지 합니다. 실존주의 작가 카프카는 책을 읽는 행위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나지 않는다면, 그 책을 왜 읽는단 말인가?… 책이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쪼개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실존주의자다운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표현입니다. 그 어떤 책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런 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히4:12)한다고 성경 스스로도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정신이 번쩍 난 후에,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쪼갠 후에 흐지부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정신이 난 것도 얼어붙은 마음이 쪼개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변화로 이어져 반드시 삶과 행동으로 가시적으로 환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도 끝내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지 못해 자기 삶을 조율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명의 불길 그대론 못 견뎌 불은 끄고 미지근한 재만을 안는 가슴"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절묘한 그의 지적을 들으며 가슴이 저린 것은 선생의 가슴속의 타는 불길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노력이요 과정입니다.
 
한국 교회가 불의에 대해 저항할 줄도 모르고, 소외된 이웃에 대해 구색 맞추기나 생색내기 정도의 관심만을 보이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한국 교회가 말씀에 담겨 있는 폭발력과 혁명성을 애써 외면해온 지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좋은 교회란 말씀에 감동하여 눈물 많이 흘리고, 무아지경에 빠져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별 탈 없이 이 세상을 선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세상을 치유하고, 폭력에 근거한 불의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세상을 종식시키며, 서로 화합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에 전인적으로 반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아!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일에 뛰어들게 합니다. 말씀이 눈물 콧물 쏟아내는 카타르시스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말씀은 새로운 인생으로의 기폭제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교회는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교회입니다. 말씀으로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좋은 교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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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le 2011-07-18 07:50:01
You've hit the ball out the park! Inecridble!

여행자 2011-05-14 10:25:04
무더운 여름의 얼음 냉수 한 사발 같은 글입니다. 깊은 깨우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