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면?
과연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면?
  • 정용섭
  • 승인 2011.05.15 2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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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의 신학단상(16) '교회와 종말'

교회는 지난 20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종말론적 공동체로 인식해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런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만약 오늘의 교회가 이런 전통적 교회론에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시켜 나가기만 한다면 교회의 영적인 건강은 회복되고 그렇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한국 교회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이 말에는 우선 교회가 자기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가 새겨져 있다. 왜냐하면 종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화려하게 꾸미는 일에, 그리고 역동적으로 작동시키는 일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지만 이런 간절한 수고와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역시 종말이 오기 전인 이 중간시기의 ‘잠시’에만 해당될 뿐이다.

물론 교회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물도, 조직도, 이념도 종말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목적으로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인간 문명 이후로 가장 절대적인 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국가도 역시 종말론적인 힘이 없다. 많은 제국의 흥망성쇠를 약간만 들여다보면 인간의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한 국가 조직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은 곧 국가는 결코 절대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종말론적인 힘에 의해 지배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의 현실 교회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자리를 상실했으며, 따라서 그 능력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요즘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들은 교회가 자신을 목적으로 해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 사회가 교회와 신자들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교회가 자기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목적으로 삼았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지면도 지면이지만 약간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자기를 상대화시키는 연습부터

교회가 자신을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여긴다면 우선 자기를 상대화시키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우습게 여기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지켜온 공동체라는 점에서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는 종말론적 우선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워내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방식을 세상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간혹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또는 교묘한 술책으로 교회당을 지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행태는 하나님나라에 기대어 존재근거를 갖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를 목적으로 삼은 교회의 모습에 불과하다.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를 초석으로 삼는 교회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자기와 자기 조직을 절대화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는 태도이다.

종말론적 지평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에서 말한 부분이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의 내면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외면적인 관점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주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내용이 있듯이 우리는 이 세상이 종말론적 지평에서 변화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인간과 자연이 일치되는 세상, 인간 삶의 무의미성이 극복되는 세상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현재 남북의 분단 체제가 극복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교회에 앉아서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복 받고 잘살게 되는 것만을 기도한다면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갈 것도 없이 기본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종말론적인 미래는 이런 사회 개혁이나 발전으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완벽한 복지사회가 도래했다고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한계가 있다. 자칫 그런 복지 시스템이 하나님나라를 끌어올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그런 프로그램의 개발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더 크게 훼손시킨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절대 사이에서

여기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인식에 담겨 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형상화시킬 수 없는 그 미래의 세상을 향한 열린 자세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구체적인 땅의 삶에 제한 받으면서도 그것과 전혀 다른 종말론적인 삶으로 열려져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독특한 긴장이 있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절대 사이에서, 즉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종말 사이에서 어떻게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근본에 대한 질문을 열어둠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야 하며, 그것이 곧 종말론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나라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선교적 몫이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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