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기독교 동맹의 흑마술에 홀린 한반도
MB-기독교 동맹의 흑마술에 홀린 한반도
  • 김민웅
  • 승인 2011.05.22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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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교수의 '리브로스 비바', 존 그레이의 [추악한 동맹]

존 그레이의 <거짓된 여명(False Dawn : The Delusions of Global Capitalism)>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본질과 세계적 구조에 대해 매우 신랄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 그리고 비판을 담아냈다.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유럽 사상 분야의 교수를 지낸 그의 저작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억압과 폭력에 대해 매우 선명한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국가 폭력의 근원

<거짓된 여명>의 경우 칼 폴라니의 시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의 폭력이 어떻게 시장 내부에 내장되어 있는가를 파헤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자유를 확대하고 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해를 위해 국가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는지를 주목했다. 이러한 기조는 <추악한 동맹>(추선영 옮김, 이후 펴냄)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 경우는, 지난 시기의 혁명과 현실 사회주의를 비롯해서 오늘날 미국의 거대한 폭력 체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고가 폭력의 탄생과 격화에 기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폭력의 근원적 기반이 되고 있는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 <추악한 동맹>(존 그레이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펴냄). ⓒ이후  
 
검은 미사의 그림자

이 책의 원제는 <검은 미사 : 종말론적 종교와 유토피아의 죽음(Black Mass : Apocalyptic religion and The Death of Utopia)>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검은 미사"란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신성 모독적 종교 의식으로 마녀들의 제사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기독교가 본래의 출발점과는 달리, 종말론적 의식을 통해 도리어 죽음과 폭력을 낳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는 결국 검은 미사, 즉 죽음의 종교, 마녀들의 제의로 변모하고 만 것을 지탄하고 있는 것이다.

존 그레이의 비판 대상은 좌나 우로 구별되는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나 볼셰비키 혁명을 비롯해서 미국의 네오콘을 포함해서 이들 모두가 종말론적 사고방식과 확신이 그 안에 가동됨으로써 세상의 전격적인 변모를 위해서라면 폭력과 전쟁도 정당화된다는 식으로 상황을 만들어 간 것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이런 그의 비판은 기독교의 종말론이 사실은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단죄와 투쟁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 부정의한 체제의 억압과 폭력에 시달려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역사적 소산이라는 점을 너무 과도하게 저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쥔 혁명과 기득권 질서가 종말론적 유토피아와 결합할 때 어떤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는지를 밝혀낸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그는 가령 나치스의 파시즘적 폭력도 서구 문명의 일탈이 아니라 서구 문명이 내장하고 있는 논리와 폭력의 결과라고 단언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시도하고 이를 폭력을 통해서라도 성취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와 결별한 계몽주의조차도 사실은 그 안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목표가 견고하게 담겨져 있어 이것이 권력화될 때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서구 문명에 내장된 폭력과 종말론적 환상

그런 까닭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치스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파시즘이 자행한 인종 말살이나 생체 실험은 나치스만의 범죄가 아니라 미국에서나 소련에서 인간에 대한 생체 실험이 이루어진 현실과 그대로 이어져 있으며 서구 제국주의가 도처에서 저지른 인간 학살의 역사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하고, 스탈린 체제가 강제 수용소를 통해 무수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들 모두가 다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를 종말론적 의지로 만들어가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는 미국의 원주민 대량 학살과 집단 이주의 기술적 효율성을 부러워하면서 이를 베끼려 했다는 것을 언급한 존 그레이는 이와 같은 서구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폭력의 출발에는 기독교의 종말론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서구 기독교의 종말론이 폭력 체제와 결합한 가장 극명한 사례로 그는 미국의 네오콘을 들고 있다. 그가 네오콘 문제를 분석하는 장을 읽어나가면, 존 그레이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명료하게 분석하는 동시에 정치철학적 흐름을 깊이 있게 잡아내는 것을 보게 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와 이를 통해 이루어진 현실을 놓고 벌이는 정치철학적 논쟁의 풍성함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적 종말론이 미국에 와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본 그는 이것이 본래 소수파였던 네오콘에게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과 동맹을 맺을 수 있도록 해주는 기반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네오콘의 사상적 기초가 근본주의 기독교와 손을 잡고 "무장된 선교사"가 되는 경로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현대 십자군의 형성 과정을 고발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국가 폭력은 일상적인 현대 서구의 모습이라고까지 말한다.

테러, 서구 역사의 몸

"서구가 비서구 지역에 자신의 발전 모델을 강제적으로 이식하려는 과정은 대대적인 테러 사태를 만들어 낸다. 사실 20세기의 유럽은 그 자신이 곧 전례가 없는 국가 폭력과 학살의 현장이었다. 테러는 현대 서구의 분리할 수 없는 본질적인 부분으로 존재해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가 폭력의 종교적 기반은 계속 확대 재생산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세계적 수출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를 결과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란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워 다른 나라에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군사적으로 그 상대 국가의 변모를 꾀하려는 작업을 말한다.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humannitarian intervention)" 정책이라고 하겠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바로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임을 강조한 존 그레이는 그러나 그 결과는 도리어 무질서라고 비판했다.

기독교의 범죄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은 이라크의 국가 체제를 해체하면서 만들어진 무질서 상태를 도리어 제도화해버리고 말았다. 미국이 지지를 표하고 만들어낸 권력의 구조는 제도화된 정부라고 할 수 없었다. 이는 종파 세력과 비정규 군벌들의 탈취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결국 이라크는 미국이 점령한 이래 지금까지 종족 학살과 종파 분쟁에 의한 대량 학살 사태를 겪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존중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네오콘의 종말론적 전쟁은 인간에게 죽음과 폭력만을 강요하고 있으며,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의 진정한 동기는 이런 과정에서 은폐되고 만다고 언급했다. 또 종교와 권력이 이렇게 손을 잡고 벌인 비극을 통해 폭력도 끊임없이 정당화되고 있다고 탄식한다.

존 그레이가 그리는 세계는 그래서 매우 참담하고 암울하다. 종교, 특히 기독교가 그 본래적 가치와 의미를 잃고 종말론적 환상을 권력화하고 테러와 대량 학살을 가져오고 있는 현실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그는 고뇌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대한 그의 해석도 그래서 의미 있게 다가온다.

존 그레이가 내놓는 해답은 현실주의다. 유토피아적 열정과 도덕주의가 도리어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다주는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현실적 선택과 판단을 치열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런 점에서 그는 홉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홉스가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절대적 권력에게 일정하게 그 자유를 양도함으로써 강제력을 가진 사회적 안전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존 그레이는 동의한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거대한 국가권력의 등장과 그 절대적 위치를 정당화하면서 오게 될 가공할 결과까지 그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영국이 내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생명이 도처에서 무참하게 살육되고 종교적 열정이 폭력으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한 홉스의 진정성을 다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세계가 겪고 있는 무수한 폭력과 죽음의 체제, 그 배후에 기독교의 논리와 실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거대한 권력이 일상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을 정당화하고 그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짓밟히고 있는 상황은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매우 위험한 수준에까지 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적 세력의 발호는 정치의 폭력과 대결주의적 한반도의 상황을 그대로 옹호하고 있다. 이들 역시 "검은 미사"를 벌이는 세력이다. "추악한 동맹"의 한 축이다.

추방과 학살, 망명과 억압의 현실에서 태어난 유대교 그리고 그 자식인 기독교가 생명과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 폭력과 욕망의 종교로 세상을 지배하려 들면서 인간은 깊은 고통에 빠지고 있다. 이 죽음의 세력과 맞서서 생명의 역사를 펼쳐내는 도도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는 비극의 역사는 계속 되풀이 되고 말 것이다.

종말론의 본래 의미는 폭력과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결정적 단절과,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공동체의 탄생을 확신하는 믿음과 용기에 있다. 종말론의 진실을 다시 읽어낸다면, 추악한 동맹의 고리를 깨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폭력과 탐욕, 이기심과 특권의식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는 지금의 기독교는 돌 하나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는 편이 세상을 위해 좋을 것이다. 사랑과 생명, 평화의 예수를 쫓아낸 교회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김민웅 / 성공회대학교 교수 

* <프레시안>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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