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기 쉬운(Vulnerable), 상처 입어야 하는'
'상처입기 쉬운(Vulnerable), 상처 입어야 하는'
  • 남상곤
  • 승인 2011.05.2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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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잘다니는교회'(7) 상처 받기 원치 않는 시대를 살며

'버너러블(Vulnerable).' 미국으로 유학을 올 때, 지알이(GRE)라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지알이(GRE)라는 시험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갈 때 보는 시험인 에스에이티(SAT)와 비슷하면서 좀 더 어려운 시험으로 보시면 될 듯합니다. 이런 시험을 쳐보신 분은 알겠지만 낯설고 어려운 단어들을 외워야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대다수입니다.

미국 학생들도 어렵고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 같은 사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단어를 매일 외우고 잃어버리고를 반복하고, 가장 덜 까먹을 때를 잡아, 그날 시험을 보고 간신히 원하는 점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어들을 공부하면서도, 실제로 공부할 때는 그러한 단어들을 거의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그 단어들을 우연히 보게 되면 ‘어디서 본 단어인데? 아! 공부할 때 외웠던 단어였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뜻을 모르는 것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어떤 옷의 단추를 뜻하는 단어도 그 당시에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도 많았었습니다. 그런 단어들 중에 유달리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단어가 ‘버너러블(vulnerable)’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그리 어려운 어휘는 아니어서 자주 일상생활에서 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쉽게 보는 단어는 아닙니다. 뜻은 ‘취약한, 연약한 (신체적・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을 나타냄)’ 이었고 발음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버너러블(vulnerable)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예수님을 표현하는 글을 접할 때, 심심찮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상처입기 쉬운'(vulnerable)이라는 형용사로 설명하는 것을 접하지 못했기에 많이 낯설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념이 잘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저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 있고, 그래서 ‘주목해서 봐야할 필요가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상처 입은 치유자'
 
그 즈음, 한국에 ‘헨리 나우엔’이라는 가톨릭 예수회의 사제의 책이 기독교 서점가에 인기였었습니다. 천주교 사제출신의 헨리 나우엔의 책들은 오히려 한국 천주교보다 개신교에서 더 인기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책 대부분이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도 몇 권을 읽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제 출신으로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적으로 공부하던 헨리 나우엔은 예일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데이브레이크라는 캐나다 토론토의 장애우를 섬기는 단체로 가서 섬김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저도 그분의 삶에도 큰 감명을 받았고, 실제로 그 분의 저작들을 몇 권 열심히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저는 무엇인가 깊은 영성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이해는 하지 못한 채로 그냥 참 ‘대단한 영성가다’ 라는 생각으로 흘려버린 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나우엔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는 우리들 사이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용어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그 당시에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버너러블(Vulnerable)과 상처 입은 치유자
 
그런데 이 '버너러블(vulnerable)’이라는 단어와 헨리 나우엔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제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게 되면서 연결된 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상처 입기 쉬우면서(vulnerable)’ 동시에 ‘상처 입은 치유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의 ‘버너러블(vulnerable)’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은 자신이 상처받을 것을 아시고도 몸을 던져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벌거벗긴 채 달려, 친구와 제자들의 배신과, 사람들의 모욕과 오해 속에, 마지막으로 기대었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십자가서 죽임당하는 장면은 이 말을 잘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벽한 인간이셨기에, 외롭고 고독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고뇌,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 그리고 하나였던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 그리고 사람들에게 몸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셨지만, 예수님께 남은 것은 배신과 모욕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잘 상징한 장면이 바로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달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군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면서… 저 꼴 좀 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지’ 갖은 저주, 비아냥, 조롱과 오해, 박해와 질시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으로서도 견디시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온몸을 던져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배신당하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불러보지만,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예수님은 상처받기 쉬운 분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상처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온몸을 던져 상처 입을 것을 알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시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쟁취한다
 
사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는 많은 남자 후배들이, 두세 살 많은 저에게 자주 연애상담을 하러 오곤 했습니다. ‘형님, 저 A 자매가 좋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럴 때마다 저는 거리낌 없이 후배들에게 ‘가서 고백해라,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는 거야’ 하면서 후배들의 등을 떠밀어 주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 번도 성공했던 후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막 20대가 된 자매의 눈에 백마를 타고 왕자님이 나타난 들,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저는 비교적 어린나이에 그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격려하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가라! 이 자매(산지)를 내가 주소서! 하고 갈렙의 믿음으로 나아가라!’ 보통 거절당하고 온 후배들은 너무 괴로워했었고, 저는 등을 떠민 죄가 있기에, 그 후배들을 주로 맛있는 것을 사줌으로써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 남자 후배들은 그렇게 마음이 강해져 갔고, 지금은 다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자매들을 만나 좋은 가정들을 다들 이루고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말하고자 하려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고백을 하러 나아갈 때, 그 때가 바로 상처 입기 쉬운(vulnerable)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살다보면 이렇게 무방비상태의 상처 입기 쉬운 채로 다른 사람에게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하러 나가던 제 남자 후배들은, 갑옷을 해체하고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방어가 없기에 그때 당하는 상처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상처 입을 각오를 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하는 것이고, 자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없으면 사랑도 얻지 못하고, 상대방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 20대 초반의 자매가 당연히 거절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남자 후배가 상처받을 것도 너무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그 후배를 말린다고 한들, 그 후배가 그 마음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몸과 마음을 던져 상처 입은 채로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그 도전을 하지 못한 사람은 그 아픔이 어떤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아프고 고통스러우나, 뜻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란?
 
헨리 나우엔의 ‘상처 입은 치유자’는 정말 제가 단순무식하게 요약하면(이렇게 하는 제가 참 무식해서 용감하다고 자부합니다), 상처 입은 자가 상처받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이용되는 방법을 사역자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나아갈 때 우리는 환대(hospitality)의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환대는 상처받은 사람이 제공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치유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상처가 치료되고 아픔이 경감되어서가 아니라 상처와 아픔이 새로운 비전을 위한 출구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고백할 때 서로의 소망이 깊어지며, 서로의 나약함을 공유할 때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힘을 기억하게 됩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중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해서 그것을 온몸으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의 상처는 (깊이 있게 나누기는 지면상 곤란하지만) 소외감, 분리, 고립,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그를 깊은 영성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들 자신의 고뇌를 통해 영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게 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은 상처를, 내가 이웃과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각오를 하고 마주하는 상처들을 통해 새로이 사람들을 치유하기 원하시고, 또 그러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상처가 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상태로 벌거벗은 채 몸과 마음을 던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소명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가볍고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러한 고통은 내 죄로 인한 것이거나 상대방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고통과 상처는 남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상처 입을 각오로 나아갈 때 받는 상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나아가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할 때도 마음을 던져 상처 입기 쉬운(vulnerable) 상태가 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데 마음을 던지지 않으면 치유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한 예수님 앞에서 언제나 무한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것임을 아시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을 아시고 몸과 마음을 던지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습니다.
 
그 길 가시렵니까?
 
제가 헨리 나우엔의 영성에 대한 이해가 짧아 글이 횡설수설하고 길어짐을 느낍니다. 짧게 정리하면, 아무도 상처받기 원하지 않은 이 시대에, 하지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지금에 하나님께서는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름에 답하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고 벌거벗은 상처 입기 쉬운(vulnerable)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받게 되는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그 길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정 나아가는 ‘너의 이웃을 너의 몸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의 가장 큰 두 번째 계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길에 초대받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아직 때가 아닐 수도 있고, 아직 웬지 ‘나는 멀었다’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히 준비하고 가는 길이 아니라 바로 지금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첫 발자국을 디디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물론 탄탄대로는 더욱 아닙니다. 사막이 될 수도 있고, 거친 비탈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고난의 길입니다. 이 길에 초대받은 사람도 소수이지만, 초대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그 길을 실제로 걷기로 한 사람은 더 소수입니다. 모두가 나이스하고 쿨하고 깔끔하고 상처받기 원하지 않는 지금의 시대에는 정말 더 좁은 문입니다.
 
그래도 그길 가시겠습니까. 자신 있으십니까. 이 길은 정말 아픕니다.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가시렵니까. 그 여정에 많지는 않지만 친구들도 있고, 먼저 걸어갔던 선배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가셔서 길을 내셨기 때문에 곳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나가면서
 
정말 헨리 나우엔의 깊은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체, 이렇게 글을 쓰는 제가 참 한심하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하고, 걱정이 앞섭니다만, 읽으시는 분들을 잘 이해하게 해 주실 성령하나님을 기대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헨리 나우웬의 책들을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나 <영적 발돋움> <모든 것을 새롭게> <춤추시는 하나님> <친밀함> 등등 많은 책들이 잘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 헨리 나우엔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사이트입니다. (http://blog.ohmynews.com/junnamu/29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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