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지식 아닌 사람이 문제다'
'정의, 지식 아닌 사람이 문제다'
  • 김영봉
  • 승인 2011.05.30 23: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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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목사의 연속 설교(2)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창세기 3:1-7, 로마서 12:1-2)

1.
2011년 5월 1일, 오바마 대통령은 알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이 서방 세계와 함께 벌여 온 ‘테러와의 전쟁’에서 아주 의미 있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뉴스를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전한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식에 많은 미국 국민들이 백악관 주변에 몰려들어 “USA! USA!”를 외치며 자축했습니다. 반면, 알카에다와 그들에게 동조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이 소식은 재앙과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빈 라덴의 살해 소식을 전하면서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는데, 알카에다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정의를 위해 죽기까지 싸우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김구 선생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김구 선생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테러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제명 의사나 윤봉길 의사가 일으킨 테러의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테럽니까? 의거지요?”라고 반발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의거’입니다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테러’입니다. 같은 사건도 입장에 따라 이렇게 성격이 달라집니다.

   
 
  ▲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에 많은 미국 국민들이 USA! USA!”를 외치며 자축했습니다. (출처 : 화면 갈무리)  
 
그러니까 빈 라덴과 김구 선생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에 보면, 알카에다가 얼마나 무자비한 살육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방 세계에 대한 ‘지하드’(Jihad) 즉 ‘거룩한 전쟁’ 혹은 ‘정의로운 전쟁’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조직되었지만, 자신들의 권력과 명분을 위해 무슬림 양민들조차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살육해 왔습니다. 그 잔인성이 <연을 쫓는 아이>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 김구 선생은 동족만이 아니라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그분의 박애 정신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 시민들도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불의한 권력자들만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분은 폭력의 사용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그 정신과 도덕성에 있어서 빈 라덴은 김구 선생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서 김구 선생을 두둔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온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와 동일한 판단을 할 것입니다.

빈 라덴의 경우와 김구 선생의 경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정의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알카에다가 생각하는 정의는 미국과 서방 세계에 불의입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정의는 알카에다가 보기에 불의입니다. 김구 선생이 생각하는 정의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불의로 보였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김구 선생과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불의로 보였습니다. 영어 속담에 “누군가의 손해는 다른 누군가의 이익이다.”(Somebody's loss is somebody else's gai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누군가의 정의는 누군가의 불의다”라고 바꾸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정의에 대해 여러 가지의 질문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정의로운 일은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할까”, “그런 정의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과연 우리에게는 그 같은 정의를 실천할 능력이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선뜻 “그럼요. 가능하죠”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2.
살다 보면, 정의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만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확신이 지나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꼴통’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공부 못하는 사람을 부르는 욕설이었는데, 요즈음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믿는 바가 절대적인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꼴통’이 ‘말썽꾸러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믿는 바가 절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말썽꾸러기입니다.

2010년 여름, 9/11을 기념하여 이슬람교 경전을 불태우겠다고 해서 문제를 일으킨 테리 존스(Terry Jones) 목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 때,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서 만류했고, 존스 목사는 결국 물러섰습니다. 하지만 2011년 3월 20일, 존스 목사는 결국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법관 의복을 입고 코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불태웠습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자극 받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유엔 사무소에 테러를 일으켜 여러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켰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테리 목사는 옳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에 어느 방송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테러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독선과 아집에 탄식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좀 극단적인 경우입니다만, 우리 주변에서 이처럼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닌데, 본인들은 착각하고 있음을 모릅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도 그렇고,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싶은 문제가 나오면 얼굴을 붉히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자신의 의견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싸울 듯이 흥분합니다. 그래서 말썽이 생깁니다.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나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자신의 정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경향은 젊은 시절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납니다. 청년 시절부터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일보다는 다른 사람의 불의를 캐내고 고발하고 투쟁하는 일에 더 많은 정열을 쏟은 까닭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은 정의롭고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정의롭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까이 아는 사람이 한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벤처 기업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몇 해 전에 그 회사로부터 스카웃을 받고 이직했는데, 지난 2월 한국 방문 때 아주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회사의 창업자와 간부들은 대학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회사보다도 더 정의로울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곧 실망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의를 위해 투쟁했던 그들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의로울 줄 알았는데, 실은 때로 더 불의하고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현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은 언제나 정의롭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고, 자신들이 하는 모든 행위를 기가 막히는 논리로써 정의로 미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을 만나면 숨이 막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단정하고 정죄합니다. 그 어떤 대화의 여지도 없습니다. 일방적인 선언만 있고, 감정적인 구호만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끔 교인들이 전달해주는 보수주의자들의 글을 보면 섬뜩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시야의 편협함과 주장의 경고함 때문에 놀라게 됩니다.

저는 일 년에 두세 차례 외부 집회에 다녀옵니다. 그럴 때 가끔 정의감이 특심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은 강사인 제게 자신이 속한 교회의 문제점들을 털어 놓으면서 조언을 구합니다. 처음에는 그분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배우자에게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제게 쏟아놓는 비판의 말들은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소외감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좋아하지만, 정작 아집과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말썽꾸러기가 되었는데, 본인은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정의감이 없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정의감이 지나친 사람들 문제가 생길 때가 더 많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믿는 바를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며 고집을 피우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자신의 주장을 절대화시키고 고집불통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폐하고 싶은 열등감이 있거나, 과거에 심하게 무시당한 경험이 있거나, 그와 유사한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 9/11을 기념하여 이슬람교 경전을 불태우겠다고 해서 문제를 일으킨 테리 존스 목사.(출처 : <로이터통신>)  
 
3.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진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고, 무엇이 옳은지 알더라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삼척동자가 보아도 명명백백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인생살이 경험만을 가지고도 그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너무도 자주, 나의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 불의가 됩니다.

성경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줍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16-17)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종교적인 천재들이 선악과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는지, 왜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가 곧 그 명령에 불복종하게 될 것을 예측하지 못하셨는지? 이처럼 풀기 어려운 질문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하며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그분과 하나가 될 때, 그분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 넘어 들어옵니다.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우리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행하면 그것이 곧 진리가 되고 정의가 되며 사랑이 됩니다. 보통 이것을 ‘순종’(obedience)이라고 부릅니다만, 적당한 단어가 아닙니다. 순종 혹은 복종이라는 말은 뭔가 억지로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고안된 것은 억지로 하는 ‘순종의 삶’(life of obedience)이 아니었습니다. ‘동화의 삶’(life of union)이 원래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살아 선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화되어 살아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을 하면서 사탄이 하와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 3:5)

사탄이 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협한 시각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의의 이름으로 서로 충돌하여 온갖 비극이 일어날 것을 내다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이 진실을 왜곡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속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기보다는 독립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아 보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옆에 있는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과 하와가 몇 살쯤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볼 때, 창조되고 나서 한참 지났을 때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 아담이 하와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림처럼 서 있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습니다. 하와가 다 알아서 처리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로 결심한 것도 하와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먹고 하나 더 따서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은 눈을 껌뻑이며 아무 말 없이 선악과를 먹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대개 50세가 넘어야 일어납니다. 50세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제 고집대로 사는 남편들도 있지만, 대개는 고분고분해집니다. 50세가 안 되었는데도 그렇게 사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될 터이니, 미리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과 분리되어 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그 능력은 더욱 심하게 손상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나 혹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인류와 우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물질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조건 중에서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은 기껏해야 나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게만 유익한 것이며,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조건에서만 옳은 것이며, 당장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정의는 다른 사람에게 불의가 될 수 있고, 가까운 장래에 재앙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보실 때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믿는 것을 절대 옳다고 고집을 부리고 살아갑니다.

4.
바로 이런 까닭에 정의로운 삶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말하면서 바울 사도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서로 대조 되는 두 단어 즉 ‘수스케마티조마이’(suschematizomai)와 ‘메타모르포마이’(metamorphomai)를 붙여놓았습니다. 많은 영어 번역 성경들은 이 두 단어를 con-form과 trans-form으로 번역하여 원문의 뉘앙스를 전하고 있습니다. 숭실대의 권연경 교수는 우리말로 이 대조를 잘 담아냈습니다.

"이 세대와 ‘동형’이 되지 말고, ‘변형’되라."

이 말씀에 따르면,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무신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행동 양식이 이 세상의 틀에 찍히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새로워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상태 그대로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안다 해도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변화를 받으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 ‘메타모르포마이’는 그 사람의 근본적인 성격이 변화하는 것, 즉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태로 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번역하면서 “변화하라”고 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결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지’(will power)까지도 타락해 있기 때문에 작심삼일 혹은 작심삼주가 되어 버립니다.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누스’(nous)는 우리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투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내면’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마다, 사람마다 그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 다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누스’라는 말로써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그 내면의 영역이 새로워져야만 우리는 비로소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 내면의 영역이 새로워지려면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신이 되어 살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인간의 내면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져 있지만, 실은 판단하고 이해하고 질문하고 결론짓는 모든 과정이 한계와 오류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 결과, 인류의 역사는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불의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정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갈등과 싸움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가 그 같은 오류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이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 있는지 모릅니다.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신이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참된 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로부터 치유 받고 우리의 내면은 혼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우리의 내면이 그분의 정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파악하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결론짓는 모든 과정을 통해 의와 선이 이루어집니다. 그 때에만, 우리는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 ⓒ 김영사.  
 
5.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옳은 것을 판단하는 방법으로서 제안된 이론들을 소개합니다. 샌델에 의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해지는 것이 정의라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liberalism), 그리고 각 행동에는 고유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선택이 가장 옳은 것이라는 입장(teleological justice) 등이 있습니다. 샌델 교수는 이 이론들의 약점들을 지적하면서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라는 입장을 옹호합니다.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책임을 가지며, 그 관계 속에서 옳은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만일 이 이론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의 전부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survey)를 해 보면 입장이 다 각각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물을 것입니다. “이 넷 중에서 기독교는 어느 입장에 가장 가깝습니까?” 반드시 물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을 논하기에 앞서, 기독교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사람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사람 자신에게 그 같은 판단과 선택의 능력이 없다면, 방법과 이론을 두고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동안에 쏟아져 나온 정의에 관한 탁월한 이론에 공통적으로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 정의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정의를 알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정의를 아는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정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그 반대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복음에 담긴 두 번째의 불편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정의를 알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와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엡 4:18-19)

혹시, 이 말씀을 들으며 ‘나는 아니야.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닐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내면이 어두워지고 완고해졌습니다. 내면이 어두워졌기에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완고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편견을 고집합니다. 지난 주, 예배를 마친 후, 한 교우께서 제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참 불의한 사람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저와 여러분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다 그렇게 고백해야 옳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지 않고는 제 아무리 샌델의 책을 섭렵하고 윤리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쌓는다 해도, 정의로울 수도 없고 정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움을 얻는 것뿐입니다. 정의를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과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정의롭게 되기를 결심하고 주먹을 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기대어 주먹을 펴고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자신의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희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말씀에 이어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엡 4:21-24)

6.
부족하지만, 저는 그동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이 진실을 확인하곤 합니다. 제 내면이 주님에게 깊이 조율되어 있으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하게 되고, 굳이 따지지 않아도 정의를 행하게 됩니다. 반면, 주님과의 사귐이 부실해지면 애써서 노력해야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도 자주 이기적인 사랑이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과의 하나 됨이 부실해질 때면,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고, 그렇게 하여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 해도 그것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과 일치되는 만큼 사랑과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이 강해지고, 일치됨이 떨어질수록 그 열망이 약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며, 매일 회개하고, 매일 항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의롭기를 바라십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꼴통’이 아니라, 고집불통의 사고뭉치가 아니라, 겸손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정의를 행하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정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셔야 합니다. 정의에 관한 복잡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기 전, 진리와 정의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더욱 기도하고 예배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겸손한 소망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참된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 안에서 정의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먼저 우리 자신이 참된 자유와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통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축복’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만든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때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을 때입니다.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가 사는 모든 사회 안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 정의의 원천이신 주님,
저희의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께 항복하게 하소서.
정의의 투사가 되려는 헛된 열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의지하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저희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어
세상에 대해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

* 김영봉 목사의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이라는 주제의 연속 설교를 앞으로 5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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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라면 2011-06-01 23:22:37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