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자살율이 유독 높은 이유?
개신교의 자살율이 유독 높은 이유?
  • 박지호
  • 승인 2011.06.16 01: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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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 조동호 교수의 '현대사회와 신학의 이해'

‘가톨릭과 개신교와 유대교 중 어느 쪽이 자살율이 더 높을까?’ 미주뉴스앤조이카데미가 기획한 공개 특강 강사로 나선 조동호 교수(퀸즈칼리지 사회학과)는 ‘자살율’과 관련된 간단한 퀴즈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중 종교별 자살율이 흥미로웠다.

“뒤르캠이 가톨릭, 유대교, 개신교 각각의 자살율을 조사했는데, 어느 집단이 가장 높을까. 개신교 자살율이 가장 높았고, 가톨릭이 그 뒤를 이었지만, 개신교보다 훨씬 낮았다. 그리고 유대교가 가장 낮았다. 이런 자살율의 폭은 집단의 크기와 나라나 민족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나타났다."

모더니티, 사회학과 신학에 나타난 성취와 극복’라는 주제로 강의하면서 난데 없는 집단별 자살율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 조동호 교수는 그 사회의 됨됨이를 진단하고,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것인지 돌아보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자살율을 사용한 것이다. 

6월 13일부터 뉴저지 새하늘교회(Sae Ha Neul Church, 방홍석 목사)에서 시작된 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 공개강좌에 20여 명이 참석했다.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한 강의는 밤 11시가 넘어서 끝났지만 참석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질문으로 강사를 괴롭히며 강의에 몰입했다. ‘모더니티, 사회학과 신학에 나타난 성취와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는 이번 공개강좌는 앞으로 6주간 진행될 예정이다. 첫 시간에는 프랑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을 조명하는 것으로 우리가 사는 교회와 사회를 성찰했다.

   
 
  ▲ 조동호 교수(퀸즈칼리지 사회학과).  
 
자살, 개인적 선택보다 사회적 힘에 의한 것

조동호 교수는 뒤르캠의 자살론을 설명하면서 “자살을 개별적 행위로만 규정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사회가 강제하는 측면”을 지적했다. 뒤르캠은 다양한 사회 집단을 비교했는데 집단마다 자살율이 각기 다르다고, 그 편차가 항상 일관되게 유지된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했다.

어떤 집단은 항상 자살율이 계속 높고, 어떤 집단은 계속 낮다는 것인데, 그 차이가 고르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가령 청소년보다는 성인이, 여자보다 남자가, 큰 가족보다 작은 가족이,  빈곤층보다 부유층이, 불안한 혁명의 시기보다 요동없는 안정된 시기에 자살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별 자살율의 차이가 흥미롭다. 유대교보다 가톨릭이, 가톨릭보다 개신교가 월등이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개신교의 개인주의적인 종교 형태

개신교의 자살율이 유독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 조동호 교수는 “사회의 끈끈함(social cohesion)이 아주 느슨해졌을 때” 자살이 늘어난다는 뒤르캠의 분석을 인용하며, 개신교의  개인주의적인 종교 형태 때문이라고 말했다. 

“종교별 자살율 중에 개신교는 나라와 집단의 크기와 무관하게 일관되게 자살율이 높았다.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서 응집력이 느슨하다. 우선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훨씬 조직적 체계가 뚜렷하고 전통을 통해 유지되는 형태다. 이에 비해 개신교는 훨씬 개인적이다. 개신교의 가장 핵심적인 종교 행위가 바로 성경 읽기다. 성경 읽기는 개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종교 행위다. 개신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종교 형태를 가지고 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됐다는 거다.”  (조동호 교수)

무한 경쟁과 대박을 부추기는 시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적 현상은 또 있다. 무한한 욕망을 쫒는 아노미 현상 때문이다. 조 교수는 돈벌이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세태를 지적했다.

“특별히 경제적 욕망을 짚어보자. 경제적 기회가 무한대로 늘어나면서 일확천금의 기회가 눈앞에 보인다. 일명 대박을 쫒는 것이다. 대박이라는 건 한도가 없는 거다. ‘얼마든지 벌 수 있는데 그것만 벌고 말 거야?’ 하는 속삭임이 만연한 세상이다. 욕망의 고삐가 풀린 거다. 아노미가 생겨나고 너도나도 무한한 욕망을 쫒는 사회가 되면서 경제가 아닌 다른 목적, 돈이 인생의 다른 가치를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돈벌이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조동호 교수)

미주 한인 사회는?

미주 한인들의 자살율이 높아지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는 한인 사회와 교회의 입장에서는 조동호 교수의 사회 분석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뉴욕타임즈>가 한인들의 높은 자살율을 보도한 적도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쫒아 미국을 건너와 성공을 향해 내달리지만, 타향에서 가족과 떨어져 익명의 그늘에 숨어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이 많은 한인들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인 사회에 교회는 지천에 널려 있고,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오히려 무한 성장과 경쟁을 주도하고 찬양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조동호 교수도 한인들의 자살율이 높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뒤르캠의 분석틀이 한인 사회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한인 사회의 자살율이 높다는 통계가 이미 나와 있다. 자살율과 살인율, 범죄율은 하나의 세트로 나타난다.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면 지역사회를 생동감 있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청소년 범죄율과 자살율이 높은 지역에 체육관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운동을 가르치고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실제로 효과적인 변화를 일궈냈다는 보고가 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한인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 강의 도중 웃음을 터트리는 참석자들. 무거운 내용이지만 분위기는 가벼웠다. 중간중간 참석자들이 강의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코멘트하며 강의에 몰입했다.  
 
뒤르캠의 사회 분석이 교회 공동체에 시사하는 것은?

뒤르캠은 자살이 증가하는 원인으로 사회 공동체의 결속력이 느슨해지고 욕망을 향한 아노미 현상이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 교수는 생동감 있고 소속감 있는 건강한 사회 공동체 형성을 위해 뒤르캠이 제시한 몇 가지 조건을 소개했다. 

"삶을 나누고 가까이 지내는 친밀한 관계를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소규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계속 만나고 교류하면서 서로를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속성이 있어야 하고, 오랜 기간 동안 이런 관계가 지속되도록 장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통일성에 개인적인 자율성이 공존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동호 교수는 뒤르캠이 제시한 생동하고, 소속감 있는 사회는 교회 공동체와 유사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어떤 모임일 수 있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고 이어갔다.

“사회 공동체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만나면서 친밀한 관계를 쌓는 곳이다. 사무적으로 만나는 것 이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적인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교회 공동체가 확실한 대안은 아니지만 근접한 대안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조동호 교수는 사회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도구로서의 종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뒤르캠이 사회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 종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조동호 교수의 강의 전문이다.

왠 모더니티?

이번 공개강좌에 "모더니티, 사회이론과 신학에 나타난 성취와 극복의 시도들"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상 '현대 사회와 신학의 이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미 전근대와 근대를 지나 탈근대, 즉 포스트모던 시대를 말하는 지금 새삼스럽게 무슨 모더니티냐고 반문할 수 있다.

모더니티는 이해가 완료된 사안이 아닌 이해해야 할 사안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지닌, 천사 같기도 하고 괴물 같기도 한,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지칭하고 싶어서 모더니티라는 아리송한 표현을 사용했다. 지속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대상이자, 우리의 과제라는 의미다.

크게 볼 때 아직도 모더니티라고 지칭할 수 있는 시대의 흐름 속에 있다고 본다. 최근 경제 지표를 봐도 그렇다. 2008년 가을부터 대공황 이후 최대의 불황을 맞고 있다. 경제가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고 고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로 인해 모더니티의 경제 구조를 구성하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구조에 대한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칼 폴라 호야니, 케인즈 등의 책을 다시 찾는 사람도 있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새로 읽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현대 경제 구조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던 사람들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다. 

모더니티는 하나의 물음이자 과제이다. 하버마스 같은 사람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성의 자율과 자유는 아직도 미완성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한국의 <창작과비평> 그룹은 근대성 문제에 대해서 복합적으로 사유해보려는 시도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왜 에밀 뒤르켐인가?

오늘은 에밀 뒤르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1858년 4월 15일 ~ 1917년 11월 15일),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팽창하고 경기 변동을 급속히 겪었던 시기를 산 사회학자다. 사회학이 학계에서 사회과학의 분과로 확립되는 데 일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뒤르켐은 일생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 범죄, 종교, 자살, 사회주의 등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수많은 사회학 연구서를 출간했다.

한국 사회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 3위다.(여성은 1위다.) 한국 사회의 자살이 많아졌다고 연일 언론에서 부각하고 있다. 

뒤르켐은 개별적 자살 사례가 아니라 집단의 자살율을 관찰했다. 자살을 개인의 행위로만 보지 않고 무엇보다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사회가 강제하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다양한 사회 집단을 비교했는데 집단 별로 자살율의 편차가 클 뿐 아니라, 그 편차가 항상 일관되게 유지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집단은 항상 자살율이 계속 높고, 어떤 집단은 계속 낮다는 것인데, 그 차이가 고르게 유지 된다는 것이다.

성인일수록, 남자일수록 더 높다. 지금 많이 달라졌지만 패턴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자살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살이 물론 개인의 선택이지만 사회적인 힘이 작용한다는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자살율이 높았고, 작은 가족이 큰 가족보다 높았다. 빈곤층보다 부유층이 더 높고, 불안한 혁명의 시기보다 요동 없는 안정된 시기가 더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종교별 자살율을 비교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가톨릭, 유대교, 개신교 각각의 자살율을 조사했는데, 어느 집단이 가장 높았을까. 개신교 자살율이 가장 높았고  유대교가 가장 낮았다.
뒤르켐이 자살을 연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소위 문명 단계가 발달할수록 자살율이 높아지는데 그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19세기 20세기 서구 사회의 됨됨이를 자살율 분포가 드러낸 것이다.

사회의 끈끈함, 고삐 풀린 욕망

왜 그럴까. 첫째는 사회의 끈끈함(social  cohesion)이 아주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기적(egoistic) 사회가 됐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기적인 것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 느슨해졌을까. 종교별 자살율 중에 개신교는 일관되게 자살율이 높다.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서 응집력이 느슨하다. 우선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훨씬 조직적 체계가 뚜렷하고 일관되다. 성대한 전례와 전통을 통해 신앙생활이 유지된다. 이에 비해 개신교는 훨씬 개인적인 형태다. 개신교의 가장 핵심적인 종교 행위가 바로 성경 읽기다. 교회와 사제라는 매개자, 혹은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 각자가 말씀을 통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종교 형태다. 그래서.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이것이 이성을 자율성, 양심의 자유, 민주주의 같은 모더니티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발생이다.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가족도 소용없어, 오직 하나님만 의자하고 살아야 돼'라고 강조하기도 하잖나. 이게 좋은 점이 있지만 사람을 아주 외롭게 만드는 거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현대로 들어올수록 작아지고, 핵가족으로 움직인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전통적인 부락 공동체 점차 와해됐다. 종교집단, 산업의 형태, 가족의 형태 등 모든 것이 사회 응집력이 약해지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현대사회에 자살율이 높은 두 번째 이유로 뒤르켐은, 고삐 풀린 욕망을 사회가 효과적으로 규제하지 못하고 잇다는 데서 봤다. 도덕도 있고 종교도 있지만 명목상 국가의 규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권력자는 이를 귀찮아하고, 약자는 불공평하게 여기면서 거부했다. 모두가 흔쾌히 동의하고 따라가려는 규범(norm)이 없다는 거다. 이게 유명한 아노미(anomy)다.  

왜 규범이 약해지거나 없어졌을까. 경제적인 욕망, 성적인 욕망의 해방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고 봤다. 특별히 경제적 욕망을 짚어보자. 통상이 발달하고 글로벌 시장이 열리면서 경제적 기회가 무한대로 확장된다. 일확천금의 기회가 눈앞에 보인다. 소위 대박을 쫓는 것이다. 대박에는 한도가 없다. '얼마든지 벌 수 있는데 그것만 벌고 말 거야?' 하는 속삭임이 만연한 세상이다. 욕망의 고삐가 풀렸다.  거다.  너도나도 무한한 욕망을 쫓는 사회가 되면서 돈벌이(경제)가, 돈벌이 이상의 더 높은 가치를 섬기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개인의 삶도 그렇고 국가의 삶도 그렇고 경제성장이 지고의 가치로 되어 있다. 다른 다른 가치들이 돈벌이에 종속되어 있다.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오늘날 사회는 응집력을 잃은 파편화된 사람들의 무리다. 욕망을 실답게 규제할 권위가 사라진 정글이다. 진짜 사회는 없다. 사회다운 사회가 없다는 거다. 적어도 아직은….

사회의 응집력과 욕망 규제 능력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종교 근본주의, 도덕 재무장주의, 가족의 가치 회복 옹호 운동 같은 것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뒤르켐은 그런 식의 복고적 운동은 모더니티의 도전을 제대로 수용한 해법이 아니하고 본다. 모더니티에는 많은 약속도 들어 있다. 뒤르켐이 말하는 모더니티의 특징을 살펴보자. 이성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종교적 독단과 도그마로는 과학자들을 이길 수가 없다. 천동설을 외치던 신학자들과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의 싸움은 결국 어떻게 됐나. 이성의 자율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고 축복이다. 교회가 교리를 절대 진리로 내세우면서 이성의 희생을 부당하게 강요하면 외면 받는다. 

개인의 존엄성이다. 개인의 출현은, 온갖 혈연적, 전통적, 지리적, 종교적, 이념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사람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인간은 오직 인류의 일원일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인 거다. 각자가 하나님과 직통하며 그럼으로써 그의 자녀가 된다고 본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적 공헌이 이것이다. 개인주의야말로 인류 공통체,글로벌 커뮤니티의 기초다. 

모더니티의 또 다른 분업의 확대 심화다.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회다. 뒤르켐은 이것을, 인류의 새로운 유대를 만들어갈 기초라고 봤다. 분업이 진전된 사회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다. 분업이라는 것은 큰 규모의 협동적 사회를 만들어가는 기본 형태일수 있다는 거다. 개신교윤리에서도 분업을 하나님의 이웃 사랑 실천의 형태라고 본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어떤가. 현대를 지배하는 세력은 금융자본이다.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이 생산 유통을 쥐락펴락한다.  분업이 있긴 하지만 협동적 형태는 아니다. 독과점적인 형태다.  분업에 기초한 인류의 새로운 우애(solidarity)는 아직 꿈으로 남아 있다. 

뒤르켐이 종교에 관심을 가진 이유

그럼 이런 현대적인 조건에서 사회다운 사회, 응집력 있고, 기꺼이 규범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뒤르켐은 사회생활의 본질을 종교생활에서 찾았다.  

종교생활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가. 한날,  한시, 한곳에 모여서 춤추고 소리 내는 것이 종교 생활의 기본이다. 날짜 잡고 장소 정해서, 어떤 짓을 함께 것이 종교생활이다. 과거 사회의 단순한 종교로 갈수록 액션(practice, 실천) 중심이다. 이것이 제의(ritual)이다. 오늘의 모든 종교에도 그것이 남아 있다. 모이지 않는 종교는 없다. 그런데 왜 그런 행위를 해야 할까.

뒤르켐은 "제의는 거룩한 것(the sacred)에 가까이 가고 거룩한 것과 하나되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거룩해지기 위한 과정으로 "보통 때 하는 것 안 하기 (negative ritual)와 보통 때 안 하던 것 하기(positive rituals)"가 있다. 속을 벗고 성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속된 실존을 벗어버리고 단절되어야 한다. 속을 벗어버리고 성에 가까이 가는 것. 보통 때의 내가 새로운 나로 변형되는 것,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난장(collective effervescence)' 모든 일탈이 허용되는 그 순간을 통과해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 집단적인 뿜어냄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입은 새로운 존재가 바로, 사적 실존을 초월한 사회적 인간이다.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응원도 그렇고, 교회의 부흥회도 비슷한 경험이다. 

집단 표상을 통해서 현실이 되는 사회

뒤르켐은 "신은 사회의 집단 표상"이라고 했다. 거룩한 것으로 지칭하는 어떤 것, 그것을 믿는 집단을 상징적으로 표상한다는 것이다. 신과 가까이 간다는 것은 나의 자아를 벗어버리고 신과 하나가 된 자아로 나아가는 거듭남이다. 탈아 혹은 초월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옹졸한 나를 벗어버리고 더 큰 자아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적 존재에서 공적 존재로의 변화를 말한다. 사회는 오직 이 집단 표상 속에서, 이 집단 표상을 통해서만 현실이 된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어떤 상징으로 표현되나? 성조기를 생각해보자. 하나의 헝겊조각이지만 그 자체는 미국이라는 사회를 상징한다. 올림픽 때 국기를 들고 나가면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상징이 만질 수 없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이 표상이다. 상징적인 대체물이 없이는 사회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일종의 픽션이지만 실제하는 리얼리티다. 그 힘은 엄청나다. 국가라는 상징적인 리얼리티를 위해 세금이라는 돈을 바치고,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버린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회, 혹은 국가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 약속에 기반한다. 그 상징의 힘을 믿는 약속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결혼반지라는 상징은 두 남녀의 믿음에 근거하고, 그 믿음 위에서 지탱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을 상실할 때는 사랑이란 수증기처럼 사라지는 것이고, 그 결혼반지는 오히려 가증스런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뒤르켐은 상징 질서를 통해 사회가 유지된다고 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그 사회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유지될 때 활기가 나오고 창조성이 분출된다. 그 사회의 규범을 기쁘고 즐겁게 자발적으로 따를 때 참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사회를 우리 마음 속에서 내면화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뒤르켐은 말했다. 내면화(혹은 사회화)란 무엇인가.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자크 라캉의 표현)  우리가 "신자되기 원합니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이라는 타자(The Other)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만드는 신자가 되기 원한다는 결단이 들어 있다. 결국 자기를 초월하여 더 큰 실재로 들어가는 것이다. 

과학도, 참다운 의미의 윤리, 정의도 그런 것이다. 참된 과학, 윤리, 정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을 초월할  때 가능하다. 윤리성은 개인이 자신만의 관점을 넘어서는 능력, 그리하여 사견으로부터 해방된 관점으로부터 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안명무 선생은 "하나님은 '공(公)'이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응집력 있고 살아 있는 공동체 가능할까?

뒤르켐은 어떤 공동체의 모습을 지향할까. 뒤르켐은 생동하는 사회, 소속감 있는 사회를 위해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삶을 나누고 가까이 지내는 친밀한 관계를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소규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계속 만나고 교류하면서 서로를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속성이 있어야 하고, 오랜 기간 동안 이런 관계가 지속되도록 장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통일성에 개인적인 자율성이 공존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뒤르켐은 이를 '분산 자율형 직업 공동체(Occupational de-centralization)'라고 명명했다.

뒤르켐은 생산와 생활을 결합한 새로운 사회구조를 고민했다. 이런 거대 기획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뒤르켐이 제시한 생동하고, 소속감 있는 사회의 조건으로부터, 생동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교회 공동체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만나면서 친밀한 관계를 쌓는 곳이다. 사무적 관계를 넘어선 풍요로운 우애가 가능한 곳이 교회 아닌가. 이런 면에서 지역사회 전체를 생동하는 우애의 사회로 변화시키는 누룩의 역할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뒤르켐의 글을 인용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주요 순간들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새로운 윤리 헌장의 제정이나 국경일을 기념하는 시민들의 모임에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미래의 축제와 기념일을 상상하는 걸 어렵게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랄의 기운이 약한 전환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위대한 것들, 우리의 선조들을 설레게 하던 것들은 오늘 우리를 그처럼 감동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흔하게 되어서 시들해졌거나 오늘 우리의 염원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그것을 대체할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기독교가 노예 소유주들에게까지 노예를 너그럽게 대우할 것을 요구하던 그 원칙들은 오늘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 않는다. 나아가 기독교의 평등론, 만인 형제론 등은 오늘날 정의롭지 못한 불평등을 너무나 많이 허용하는 듯 보인다. 비천한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이 자비는 너무 플라토닉해보인다. 오늘 우리는 한결 더 실효성 있는 자비를 원한다. 요컨대, 옛 신들은 늙거나 죽었고, 새로운 신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서 종교를 재건코자 했던 콩트의 시도는 헛일이다. 살아 있는 제의가 나오는 것은 죽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삶 자체로부터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과 혼돈의 상대는 오래 갈 수 없다. 우리 사회들이 창의성의 분출을 다시금 경험하고 참신한 생각과 신선한 제도가 등장하여 한동안 인류를 이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시기를 겪은 인류는 이따금씩 기념축제를 통해 그 사건들을 기억하고 그 열매를 새롭게 창조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우리는 일련의 축제일을 통하여 혁명이 불러일으켰던 원리들을 어떻게 늘 싱싱하게 보전하는가를 배웠다. 그 제도가 속히 시들어버렸다면 그것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 단명했고, 첫 열정에 뒤이어 곧 실망과 환멸이 따랐기 때문이다. 비록 혁명은 불발로 끝났지만 다른 조건에서라면 어떠했을지를 상상케 해주었다.

모든 사정이 조만간 혁명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말해준다. 영원한 복음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새로운 복음을 낳을 수 없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새로운 신앙을 표현할 상징이 무엇일지, 그것이 과거의 상징을 닮은 것일지 아닐지, 그 상징들이 현실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할지 등의 문제는 인간의 예견 능력을 벗어난 것이며 핵심에서 빗나간 문제다."

[뉴욕·뉴저지] 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 공개강좌

- 장소 : 뉴저지 새하늘교회(방홍석 목사) Sae Ha Neul Church, 440 Bergen blvd Palisade Park NJ 07650
- 일정 : 매주 월요일(6주간)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6월 13일 - 에밀 뒤르켐 : 옛 신들은 늙었고 새 신은 아직 오지 않았다
6월 20일 - 막스 베버 : 합리성의 쇠우리에 갇힌 “막장 인류,” 카리스마를 기다리다
6월 27일 - 카를 마르크스: 허무에 종살이하는 만물이 자유를 대망하다
7월 4일 - (독립기념일) 휴강
7월 11일 - 테오도르 아도루노: 우상 금지 계명의 철저한 수행으로서의 비판이론
7월 18일 - 신학과 교회의 대응 (1)
7월 25일 - 신학과 교회의 대응 (2)

-  문의 및 참가 신청 : <미주뉴스앤조이> newsnjoy@www.newsnjoy.us 201-665-9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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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2011-06-16 20:05:14
이런 강좌를 마련해서 시행하는 교회와 내용들을 정리해서 올려주는 미주뉴스앤조이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신앙과 신학이 폭 넓게 토의되어 신앙의 삶이 풍성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