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가 정의에 앞선다"
"예배가 정의에 앞선다"
  • 김영봉
  • 승인 2011.06.25 01:1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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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목사의 연속 설교(5)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요한복음 4:24; 로마서 12:1-2)

1.
"발트인과 차 한 잔을 나누면, 당신은 낯선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차를 나누면 당신은 손님으로 대접 받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차를 마셨다면, 당신은 가족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말입니다."
 
이것은 그레그 모텐슨(Greg Mortenson)이 지은 베스트셀러 <세 잔의 차(Three Cups of Tea)>에서 하지 알리(Haji Ali)가 한 말입니다. 등산가 그레그 모텐슨은 1993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K2 봉우리 등정에 도전합니다. 등정 과정에서 그는 조난을 당하게 되었고, 일행은 파키스탄의 코르페(Korphe)라는 동네에 이릅니다. 기진맥진했던 모텐슨과 그 일행은 코르페 주민들의 급진적인 환대(radical hospitality)와 극진한 간호 덕분에 건강을 되찾습니다.
 
모텐슨은 주민들에게 은혜 갚을 길을 찾습니다. 그 지역에 학교 건물이 없어서 아이들이 나무 그늘 밑에서 공부를 하고 땅바닥에 글씨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그는 학교를 지어주기로 약속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글과 강연을 통해 경험담을 나누며 모금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여 시작된 구호 단체가 ‘중앙아시아협회(Central Asia Institute)’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을 감동하게 했고, 그 이야기를 담은 책 <세 잔의 차>는 2011년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400만 권이 팔렸습니다. ‘중앙아시아협회’는 지금까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170여개의 학교를 세웠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2011년 4월 15일, 미국의 CBS 방송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인 ‘60 Minutes'에서 그에 관한 충격적인 보도를 내놓았습니다. <세 잔의 차>에 기록된 그의 조난 이야기들이 꾸며낸 것이거나 과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것입니다. 그가 쓴 또 다른 베스트셀러 <Stones Into Schools>에는 탈레반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나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것도 꾸며낸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탈레반 요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책에 실려 있는데, 그 사람들을 찾아 알아보니, 그들은 탈레반 납치범이 아니라 모텐슨의 신변을 보호해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텐슨은 어마어마한 액수의 인세와 강연료 수입을 얻고 있음에도 그 수입이 중앙아시아협회에 기부된 흔적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는 한 번 강연에 3만 달러 정도의 강연료를 받는 최고급 연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학교를 짓기 위해 모금한 돈의 상당 부분이 모텐슨의 모금 활동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중앙아시아협회’에서 세웠다는 학교들도 지원금이 부족하여 부실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어떤 학교는 지난 몇 년 동안 협회로부터 아무런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 ‘60 Minutes'에서 다룬 그레그 모텐슨 편. (출처 : <씨비에스> 웹사이트 갈무리)  
 
이 방송 후에 모텐슨과 중앙아시아협회에서는 간단한 성명서 외에는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노한 기부자들 중에는 모텐슨과 중앙아시아협회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텐슨과 중앙아시아협회는 이 혐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잃어버린 명예와 신뢰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보입니다. 모텐슨이 지난 몇 해 동안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은 ‘세 잔의 차가 쏟아졌다.’고 비유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나 혼자 싸워야 하는 불의도 있지만, 힘을 합하여 싸워야 하는 거대한 불의도 있습니다. 거대한 불의를 대항해 싸우려면 결집된 힘이 필요하고 사람들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서서 희생해야 합니다. ‘월드비전’을 시작한 밥 피어스(Bob Pierce)가 그런 사람이며,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를 설립한 개리 하우겐(Gary Haugen)이 그런 사람입니다. 개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이런 단체들로 인해 가난한 나라에서 고통 받은 어린이들과 불가항력적인 폭력 앞에 노출된 힘없는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단체들이 투명하고 건강하게 사역을 지속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모텐슨의 이야기에서 확인합니다. 

2.
모텐슨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예배의 중요성을 확인했다고 말씀 드리면 매우 뜬금  없다고 느끼시겠지요? 모텐슨의 신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동안 정직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텐슨의 추문을 통해 역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의롭게 살고 또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략 세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예배자의 정직성을 지켜 줍니다. 물론, 예배가 자동으로 예배자의 정직성을 지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영과 진리로”(요 4:24) 예배를 드려야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과 진리로”라는 표현은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헬라어의 뜻을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곤란하기는 하지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써 드리는 예배를 생각하면 됩니다. 형식적으로, 율법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반대 개념입니다.
 
형식적인 예배 혹은 율법적인 예배는 부정직함을 위장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 예배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예배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장해제 됩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투시하는 눈앞에 벌거벗고 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하나님의 투시하는 광선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는데, 어찌 거짓과 술수와 기만을 마음에 품을 수 있겠습니까?
 
때로, 목회자의 감추어진 부정이 드러나 뉴스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라는 바울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넘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할까?’라는 질문을 해 봅니다. 저는, 그에 대한 처방은 하나밖에 없음을 압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그 처방입니다. 새벽마다 드리는 예배와 주일마다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기만 한다면, 저는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노출시키는 순간, 제 아무리 강력한 유혹도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 최고의 재앙은 예배가 죽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버리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으면 예배가 꺼려집니다. 우리 마음 안에 누군가에 대한 분노가 있으면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 싶을 때는 예배가 부담스러워집니다. 예배의 자리에 간다 해도 멀찌감치 앉게 되고, 예배 시간에 다른 일로 주위를 분산시킵니다. 우리의 삶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예배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배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아 틀림이 없습니다.
 
예배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두고 반성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보지 않고 손으로 더듬어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절대 거룩’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우리의 부정함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절대 선’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우리의 악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으며, ‘절대 정의’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우리의 불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절대자라는 거울 앞에 서는 일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3.
둘째, 불의를 대항해 싸우는 것은 물리적인 싸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적인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불의의 세력들 배후에 영적 세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의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한 편,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영적 세력을 보지 못하고 불의한 사람들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비유하자면, 잡초의 줄기만을 뜯어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를 위한 싸움은 국지전이 아니라 거대한 영적 전쟁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엡 6:12)
 
그렇다고 하여,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의가 사탄의 직접적인 조종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연결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악한 영과의 관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불의를 행하는 경우도 있고, 사탄에 완전히 사로잡혀 악의 화신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는 불의한 세상 현실의 배경에 악한 영적 세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우선 불의를 대항해 싸우는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불의한 현실을 고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레그 모텐슨의 경우에서 보듯 스스로의 정직성을 지키고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영역이 침식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아주 교묘한 전술로 속여 넘깁니다. 이 세상에 널려 있는 불의에 부르르 떨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일어섰던 사람들이 재정적인 비리 혹은 성적인 유혹으로 인해 추락하는 이유는 영적인 방비를 허술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 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엡 6:11, 13)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불의의 배후에 영적 세력이 있음을 인정하면, 정의를 위한 노력이 가장 먼저 예배로써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선언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입어 불의와 싸워야만 승리할 수 있음을 압니다. 동시에, 정의를 위한 사역에 늘 복음이 같이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불의의 세력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을 보는 사람은 한 사람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올 때 그는 온전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게리 하우겐의 <정의를 위한 용기>.  
 
개리 하우겐이 쓴 책 <정의를 위한 용기(Just Courage)>에 보면, '국제정의선교회'(IJM)에서는 매일 아침 30분 동안 기도와 침묵으로 시작하고, 오전 11시에 모든 일을 중단하고 다시 모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는 테레사 수녀가 “나는 기도하지 않고는 30분도 일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당신과 내가 하는 일도 기도 없이는 30분도 하지 못하는 일인가?”(24쪽)라고 묻습니다. 만일 내가 하는 일이 기도 없이도 할 수 있고, 기도 없이 해도 되는 일이라면, 그 일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테레사 수녀가 말한 것처럼 “기도 없이는 이 일을 30분도 할 수 없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 무엇도 기도 없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정의를 위한 노력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4.
셋째,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보고 그 나라로부터 정의로운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배웁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나라로서의 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지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하에 들어갈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온전한 의미에서의 정의가 실현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갈망하며 기도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자기 나라의 국가를 부르며 자기 나라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며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과정입니다. 예배가 아니고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그 나라의 이상을 마음에 품고 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히 실현된 나라가 어떨 것인지, 그 나라에서의 삶이 어떨 것인지를 예언한 말씀들이 많이 나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사 65:17, 23)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자주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날 즉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을 그리며 노래했습니다. 그로부터 수백 년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나라에 대해 아주 선명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저 같은 하수(下手) 설교자들은 매 주일 제목과 주제가 바뀌지만, 설교의 고수(高手)이신 예수님은 항상 같은 제목으로,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저 같은 사람의 설교는 매 주일 새로운 주제를 다뤄도 ‘늘 하던 소리’처럼 들릴 때가 많은데, 예수님은 늘 같은 제목, 같은 주제로 설교를 하셔도 늘 새롭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이 우주를 탐험하는 것과 같이 알수록 더 신비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신비에 대해, 그 나라의 삶에 대해, 그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해 배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나라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그 나라를 배웁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비밀들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날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 체험들을 통해 그 나라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고 예배로 모여 그 나라를 찬양하고 또한 경험합니다. 이 체험이 없이는 정의를 알 수도 없고, 정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 통일 찬송가 204장)"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는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나라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 가사도 충분히 좋지만, 영어 원문의 가사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어쩌면 그토록 압축된 표현에 그토록 깊은 의미를 담았을까 싶습니다. 그것을 곡조에 맞추어 우리말로 번역하다 보니 원문의 의미를 절반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곡조에 신경 쓰지 않고, 의미만을 담아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는 나의 것이라는 이 복된 확신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맛봄이여!
나는 구원의 상속자요 하나님이 사신 사람,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분의 피로 씻겼네.
 
완전한 순종을 통해 맛보는 이 완전한 기쁨,
들려 올려 질 모습이 지금 내 눈에 보이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니,
자비의 메아리와 사랑의 속삭임을 듣네.
 
완전한 내어 맡김을 통해 얻는 이 평안,
주님 안에 있는 나는 행복하고 복되어라.
바라고 기다리며 위를 쳐다보는 나,
그분의 선하심에 잠기고
그분의 사랑에 혼절하네.
 
이것이 나의 이야기요, 이것이 나의 노래.
온 종일 주님을 찬양하네.
이것이 나의 이야기, 이것이 나의 노래.
온 종일 주님을 찬양하네.
 
번역하고 보니, 흡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더 절실하게 느끼게 해 주었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같은 경험을 하고 이 같이 고백하면서 그 상태에 머물러 살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사이비 종교로 가는 것입니다. 그 같이 가슴 벅찬 경험을 했다면, 그 비전과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죽고 나서 가는 곳이기 이전,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실현시켜야 할 상태입니다.
 
5.
하나님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 땅에 존재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힘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경쟁하여 높아지기를 힘쓰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 낮아져서 섬기는 사회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서 실천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막 10:43-44)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귀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외모 때문에, 신분 때문에, 피부 색깔 때문에,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혹은 학벌 때문에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모든 종류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힘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을 꾸중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막 14-15)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오해되어 온 말씀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함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오해한 어떤 교육학자는 어린이들이 결코 순진무구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면서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이를 과대평가했다. 아이를 낳고 길러보지 않았으니 오판한 것이다.” 예수님이 오판한 것이 아니라 그 학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오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던 어린이들을 하나님나라의 주인으로 높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는 또한 부한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미래를 위해 욕심껏 비축해 두지 않고 서로 나누며 베풀며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경제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하나님나라의 특성을 알기에 이 땅에서 가난의 문제와 경제적인 불평등 문제에 대해 깊이 관심합니다. 인간성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시키는 것이 바로 가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인간 중에 그 누구도 그 심성이 피폐해지고 자존심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을 치유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지대한 관심을 두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가난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 하나님나라를 보면, 환경 문제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되고,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 하나님나라를 보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법과 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더 정의롭게 개선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 하나님나라를 보면, 이 세상의 문화를 걱정하는 눈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악한 문화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심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6.
이렇듯,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하나님나라를 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정의로운 삶은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정의로운 사회는 하나님나라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최상의 정의입니다. 그처럼 높은 기준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상태에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절대적인 이상에 비추어 보면 늘 모자라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항상 이방인이요, 항상 야당이요, 항상 소수자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이상을 본 사람은 그 어떤 이념이나 제도에 100%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자유시장경제도,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Pro-Life도, Pro-Choice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선거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후보자 중 누가 기독교인이냐, 누가 내게 가장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투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전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 표를 줍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당선된 후에는 그 사람의 건설적인 비판자가 됩니다. 그가 하나님나라의 이상에 더 가까이 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과거에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을 메시아처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절대적인 이상을 잊은 것입니다. 만일 지금 누군가가 바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을 메시아로 여긴다면, 그도 역시 하나님나라를 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지지한다면, 그 사람도 하나님나라를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대통령,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과 진보를 위해 노력합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예배가 정의에 앞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배를 사모한다고 하면서 정의에 대해 무심하거나 불의를 일삼는다면, 그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혹은 그가 예배한 것이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일 수 있습니다. 정의의 문제에 대해 무심하고 불의를 일삼으면서 많은 제물을 드려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사 1:15-17)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고 있던 ‘합당치 않은 예배’를 비판하십니다. ‘합당치 않은 예배’라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사용한 ‘합당한 예배’라는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롬 12:1)
 
‘합당한’으로 번역된 헬라 말은 ‘로기코스’(logikos)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true to real nature’(‘본질에 일치하는’)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예배’라는 말은 ‘본질에 일치하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정의에 눈을 뜨고, 예배에서 얻은 정신과 능력으로 정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 바로 그것이 ‘합당한 예배’ 즉 ‘본질에 일치하는 예배’입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합당치 않은 예배’ 즉 ‘본질에 일치하지 않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 형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 순서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에 사용하는 악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도 아니며, 예배에서 부르는 찬양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자들이 정의롭게 살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했다면, 그 예배는 예배자로 하여금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문제입니까?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본질에 일치하는 예배입니까? 예배를 준비하고 섬기는 이들은 그 같은 마음과 태도로 섬기고 있습니까? 예배드리러 나오는 이들은 과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눈 뜨게 하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변화시켰습니까? 우리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책망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7.
오늘 우리는 정의에 관한 복음의 다섯 번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합니다. 예배가 정의에 앞선다는 진실입니다. 정의에 눈을 뜨게 하고 정의를 위해 헌신하게 만들지 않는 예배는 가짜라는 진실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정의에 대해 활짝 깨어나게 하고, 자신이 서 있는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도록 만듭니다.
 
서두에서 저는 그레그 모텐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만일 그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질문해 봅니다. 그는 탄자니아와 동아프리카에서 일한 선교사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글에서 느낀 바로는 진실한 예배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신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그가 섬기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호하고, 또한 그 신 앞에 신실하게 예배하는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었다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마음에 품고 지구의 한 구석이라도 참되게 변화시키기 위해 진실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레그 모텐슨의 이야기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저의 이야기요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예배드릴 때마다 무장해제 되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위선과 거짓을 하나님의 거울에 비추어 보십니까? 예배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영적 현실을 깨닫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 아름다운 나라를 마음에 품고 그 나라가 우리 각자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우리나라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온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또한 그 일을 위해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있습니까?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참된 예배가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영적 눈이 열리며 영적 귀가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본질에 충실한 예배’를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상상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
저희의 무너진 성소를 회복시키시고
저희의 예배를 회복시키소서.
영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여
하나님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를 살게 하소서.
본질에 충실한 예배를 드림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의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이라는 주제의 연속 설교를 5차례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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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 2011-06-28 14:22:4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게 뭐죠? 예배가 먼저(독립변수)고 정의가 나중(종속변수)가 되는데... 이렇게 꼭 이분법적으로 갈라야 하는 건지. 우리의 예배는 세속에서 떨어져 나와 종교적 영역 속으로 들어가거나, 또 다른 저 세상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의식'이 되어 주저 않히는 예배가 될 가능성이 훨 많은 거 같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 삶의 와중에서 초월을 경험케 하는 예배가 아닌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 2011-06-25 17:20:53
정의에 대한 말씀 증거는 이 시대 교회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은 설교의 내용과 반대를 증언합니다. 에배가 정의에 앞선다는 내용이 아니라 정의를 찾는 일이 손에 피를 씻고 진정한 예배임을 말합니다. 게리 하우겐이 말하는 기도 역시 예배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머무는 삶을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