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자생력은 없다
선의 자생력은 없다
  • 김기대
  • 승인 2011.07.07 17:3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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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대 목사의 '영화로 신학하기'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 농담으로 풀어쓴 영화판 성서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는 다섯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마치 옴니버스 영화처럼 하나의 챕터는 개별적으로 이야기의 힘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서로를 가로 지르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간다.

제 1장 - 태초의 인간은 선이 자생력을 가진 것으로 알았다

창세기 1장으로 세계가 시작되듯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시작한다. “옛날 옛적에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어 있을 때 ”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에 살던 라파디트, 세 딸의 아버지인 그는 전형적인 순박한 농부다. 장작을 패는 그의 근육이 암시하듯 그는 땀의 댓가만을 믿고 산다. 유태인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졌다든가 예수 죽음의 주범이라든가 하는 식의 선동을 믿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집 마루 밑에 유태인 일가를 숨겨준다.

위험의 요소는 늘 품고 있지만 평온했던 이 세계에 악이 침투한다. 누군가의 제보가 있었을 터, 나치의 란다 대령이 유태인을 색출하기 위하여 온다. 란다의 말은 예의바르고 논리적이다. 말이 이러 저리 튀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한 가지 목표로 귀결된다. 유태인을 이 집에 숨겨둔 것을 알고 있으니 밝히라는 것이다. 독일 장교이지만 불어도 능숙하게 구사하는 란다는 마루 밑에 숨어 있는 유태인 가족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라파디트와 영어로 이야기한다. 라파디트의 순박한 감성은 란다 앞에서 점점 무너진다. 결국 라파디트는 영어로 그들이 서 있는 발밑에 유태인들이 숨어 있음을 자백한다. 나치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유태인들은 마루 밑에서 죽어간다.

 

   
 
  ▲ 란다 대령이 자신이 잡아온 레인에게 사면을 전제로 히틀러 암살 계획을 묵인해주겠다고 협상하고 있다.  
 

지상위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마루 밑 인간들은 라파디트에 대한 신뢰에만 의지한 채 숨어 있었지만 선악의 대결은 악의 승리로 끝나 버린다. 그 중 쇼샤나라는 소녀 하나만 필사적으로 살아 도망친다. 란다 대령은 얼마든지 소녀를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둔다. 유태인을 몰살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다. 섣부른 동정, 감상주의, 감당도 못할 휴머니즘 따위에 비해 힘에의 의지(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이길 것이라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 란다는 형이상학적 미몽에 싸인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으로서의 초인(위버멘쉬)이다. 오히려 한 명 쯤의 생존자가 그를 증언해 주는 것도 괜찮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는 했지만 예수가 그 말씀을 육신화하기 전에는 그 말씀이 죽이는 말씀인지 살리는 말씀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선을 믿었지만 선 자체에는 선을 영구적으로 지속시킬 힘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라파디트는 선한 마음 좋은 체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 왜소한 란다를 이기지 못한다. 낙원에도 뱀처럼 왜소한 악이 침투한다. 뱀의 유혹은 얼마나 초인적(탈형이상학적)인가?

오늘도 여전히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놓아둔 하나님의 의도는 난제다. 이 난제를 뱀은 쉽게 풀어준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신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 3:5) 그렇다, 라파디트도 밝아졌다. 내 가족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굳이 유태인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잠시 가책에만 시달리면 된다. 라파디트는 이제 세상을 편하게 사는 방법- 즉 죄를 터득했다. 아직도 선의 자생적 영속력을 믿던 유태인 가족은 땅 밑에서 위 세계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채 죽어간다.

제 2장 재미없는 관객, 건조한 기독교인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in- glorious) 무뢰배들(basterds)이 있다. 인디언의 피가 섞인 레인 중위와 유태인들로 구성된 특수부대다. 이들은 나치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에 침투한다. 시중의 각종 영화 소개에서는 각기 최고의 실력을 가진 8명이 모였다는 설명을 달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특수부대 영화의 문법에 물든 탓이다.

이 영화 속 특수부대원들은 최고이기는커녕 주변부 유태인들일 뿐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아서는 안 되지만 이들이 결코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타란티노 감독은 배역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1940년대 미국에 살던 유태인들도 차별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 곰 유대인이라 불리는 도니가 몽둥이를 들고 나와 독일군을 때려죽이려하고 있다.  
 

곰 유대인으로 알려진 도니는 야구방방이로 독일군 포로를 때려죽인다.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야구 선수의 꿈을 접었을지도 모른다(1940년대 유명 메이저 리거였던 . 유태인 행크 그린버그는 경기장에서 엄청난 수모를 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동족이 아우슈비츠에서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나치 포로의 머리통을 부수는 그 잔혹함에는 주류 문명에 대한 전반적인 분노를 담고 있다. 레인 중위 역시 인디언으로서 차별을 받고 살아왔다. 이들이 힘을 합쳐 당한 자들의 한을 보여준다. 일차적으로는 나치를 향한 절규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고상한'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이다.

이들은 포로를 모두 죽인 뒤 한 명만을 히틀러에게 보낸다. 란다 대령이 쇼샤나를 살려 주었듯이 레인 중위는 나치 사병을 풀어준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란다는 쇼샤나가 그 무서움을 간직하며 평생을 살아 갈 것이라고 믿었지만 레인은 자신들의 무식함을 가르쳐주기 위해 포로의 머리에 나치의 문양을 문신한다. 위대한 아리안 족의 지도자 히틀러는 이 무식함 앞에서 분노한다.

이것은 타란티노 감독의 농담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무뢰배들의 철자를 틀리게 쓴다. 이런 잔인한 보복이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어린이고 노약자고 이유 없이 죽이는 무차별 폭격에 비해 포로의 시체에서 머리 가죽을 벗겨내고, 방망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잔인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백인 토벌대에 저항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전투방법을 야만적으로 묘사하던 시각과 다르지 않다) 포로에서 돌아온 일개 사병이 히틀러를 만났을 리도 만무하다.

영화에는 한 맺힌 자들의 절규와 의지를 신봉하던 자의 분노가 농담처럼 그려질 뿐이다. 그러나 관객은 잔인한 장면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그동안 2차 대전 영화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미묘한 만족감을 경험한다. 영화는 절대로 '피아를 불문한 인간의 잔혹함'이라는 심각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도록 관객을 시종 다른 감정으로 유도한다. 연출의 뛰어남이다.

광야시대의 히브리인들은 바스터즈 못지않게 잔인했다. 이방인들을 잡는 족족 몰살시켰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다. 간혹 이 승전의 증인이 되도록 살려준 이방인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에 반기독교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보여주었던 잔혹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inglorious) 사건으로 재연되기 때문에 건전한 호교론자들은 힘들다.

이런 성서의 증언을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자들 뿐 아니라 성서의 잔혹함을 문자 그대로 개탄하는 진보적 신학자들도 문제다. 광야의 히브리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또는 마녀 사냥으로 죽어가던, 페스트의 배후 세력으로 화형 당하던, 소외된 인민을 대표할 것 같았던 볼셰비키에 의해 더 추운 땅으로 쫓겨나던 20세기 중엽까지 역사의 단골 피해자였던 그 유태인들이다. 그들은 고통 받는 민중을 대변하며 기득권 앞에서 자기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뺏길지 모른다는 절박함에 치를 떨던 이들이다.

안토니오 네글리가 그의 저서 제국에서 LA 한인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흑인 폭동을 저항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그린 것과 같은 경우이다. 바다를 건너 광야에서 유랑하던 히브리 걸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병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청결해야 했다. 할례를 했고, 음식 규정을 지켰으며 토착민들보다 더 깨끗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들의 저항은 때론 잔인했으며 승전의 경험은 과장되었다. 구약의 기자들은 이런 이야기들에 가려 성서 본연의 맥을 놓치지 않도록 편집(연출)력을 발휘하고 있으나 현대의 진보적 기독교인들 또는 반기독교인들은 마치 타란티노의 영화 속 농담을 보면서 인간의 잔인성을 개탄하는 재미없는 관객들처럼 성서를 읽는다.

3장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없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던 1944년 6월에 파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라이언 일병 형제들의 비극과 같은 수많은 희생과 무용담을 남기며 전세를 연합군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타란티노가 보는 민중의 역사는 다르다.

쇼샤나는 살아남아 어엿한 극장주가 되어있다. 그런데 이 극장에서 나치의 선전영화 '민족의 자랑'을 상영하기로 되어 있다. 혼자서 300여명이나 죽였다는 나치군인 졸러를 직접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영화를 통해 제 3제국을 알리려 했던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이 영화 속 영화를 연출한다.

 

   
 
  ▲ 나치 영웅 졸러가 쇼샤나를 괴벨스에게 소개시켜주고 있다.  
 

본래는 다른 극장에서 상영예정이었으나 쇼샤나의 극장 앞을 지나던 나치 영웅 졸러가 쇼샤나에게 반하면서 괴벨스를 설득해 시사회 장소가 바뀌게 된 것이었다. 졸러의 소개로 괴벨스와 만난 쇼샤나는 그 자리에서 시사회의 보안 책임자가 그의 가족을 죽인 란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하늘이 도운 기회다.

쇼샤나는 극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니트로 성분의 필름은 좋은 화력 무기가 된다. 게다가 쇼샤나는 졸러의 학살극이 주 내용인 영화 필름을 잘라내 중간에 나치를 비웃는 내용을 삽입한다. 선한 세계에 개입한 악으로 피해를 본 쇼샤나는 이제 악한 영화 속에 선을 개입하려 한다.

영화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치는 오히려 영화의 힘을 믿는다. 타란티노 감독도 영화의 힘을 믿는다. 심지어는 영화의 하드웨어인 필름도 무기가 될 수 있다. 잘 계획된 작전과 무기에 의해 2차 대전의 전세가 뒤집힌 것이 아니라 '인문 예술'과 졸러와 쇼샤나의 우연한 만남이 역사를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인가? 다소 불교적일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해 역사적 사건과 명망가들이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 아니라고 영화는 대답한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와 작은 존재들이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영화 속 세계 1944년 6월에 노르망디의 기억이 희미하듯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존재했던 전쟁마저도 희미해질 것이다. 악한 현실에 개입한 하나님이 역사를 직접 기술할 것이다. 하나님이 기술한 역사에서 인간의 역할은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인문적으로 행동하는 일이다.

4장 – 같은 언어 다른 의미

영국의 특수부대원들도 독일 요인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작전명은 키노(kino), 책임자는 영화 평론가인 히콕스 중위다. 히콕스 중위가 장군과 작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한쪽 구석에 노인이 시가를 물고 앉아 있다. 중위는 그를 발견하고 잠시 놀라지만 경례는 직속상관에게만 한다. 그 노인은 누가 보아도 2차 대전의 영웅 처칠이다. 그런데 노르망디가 희미하듯이 이 주요한 작전에 처칠이 할 일은 없다. 영국의 특수부대와 바스터즈들은 키노 작전에 함께 하기로 하고 연합군 스파이인 독일의 여배우 브리짓과 만나기로 한다. 쇼샤나의 계획과 상관없이 또 다른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브리짓과 가짜 독일 장교 복장을 한 히콕스와 바스터즈 일부는 첫 대면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여기서 술에 취한 독일군 사병들과 시비가 벌어진다. 가짜 장교들은 진짜 사병들을 겨우 제압하려는 순간 , 한족 구석에 앉아 있던 진짜 독일군 장교가 개입한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사소한 동작이 독일식이 아님을 파악한 진짜 독일군과 가짜 독일군 총격전이 발생하고 양쪽 모두 전멸한다.

 

   
 
  ▲ 독일군 장교가 셋을 세는 방식이 독일식이 아닌 것을 보고 상대방이 스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데 이 장소는 지하에 있다. 지하는 1장에서 마루 밑을 연상시킨다. 1장에서 지하와 지상의 대화는 단절되었지만 지하 술집에서는 독일어만 사용되기에 소통에는 불편이 없다. 그러나 대화는 같은 의미를 지향하지 못한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숨기는 도구이다.

진짜와 가짜, 장교와 사병, 남자와 여자는 같은 언어로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가짜들의 낯선 악센트를 눈치 챈 진짜 장교는 끈질기게 가짜임을 밝히려 하지만 좀처럼 증거를 잡지 못한다. 다른 언어로 자기의 목표를 성사시켰던 란다에 비해 지하실의 장교는 같은 언어로도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다. 오히려 셋을 표현하는 손가락 표시가 독일식이 아님에 이 장교는 이들이 가짜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런 의미의 차이 속에서 지하실은 두 번째 비극의 현장이 된다.

뒤늦게 이 자리에 온 레인 중위에 의해 영화배우 브리짓만 한 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구출된다. 이튿날 란다는 현장 조사를 하고 여기서 브리짓이 사병들에게 해준 사인과 그녀의 한쪽 구두를 발견한다. 반면 레인은 브리짓으로부터 이 시사회에 히틀러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을 강행한다.

성서가 전달하는 '기표'로서의 언어는 여전히 하나다. 번역본은 다양하지만 성서는 여전히 사랑과 구원,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동일한 기표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 언어를 말하는 이들의 의미(기의)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이 언어로 정복과 착취를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평화를 생각한다. 의미의 충돌은 비극을 가져온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의 분화가 아니라 의미의 분화다.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의미의 분화를 가져왔다. 의미의 일치가 없이 평화는 멀어 보인다.

5장 신데렐라의 죽음과 무뢰배의 승리

쇼샤나의 극장, 쇼샤나는 모두 불태워 죽일 계획을 세우고 레인과 브릿지는 이탈리아 출신의 영화계 종사자로 위장해 브리짓과 극장에 들어간다. 보안책임자 란다는 이미 브리짓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은 터였기에 어제 사고 현장에서 주은 구두를 브리짓에 신겨본다. 자기의 신발임을 확인한 이 가엾은 신데렐라는 란다에게 목 졸라 죽임을 당하고 레인은 체포당한다.

란다는 보안의 책임은 뒤로하고 미국인 레인과 거래를 시도한다. 레인의 나머지 부하들에 의해 시도될 히틀러 암살계획이 성공하면 종전은 앞당겨질 것이라는 것이 란다의 생각, 그는 작전을 눈감아 주는 대신 자신의 안전한 미국행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잡은 자가 잡힌 자에게 자신의 안위를 맡긴다. 란다는 나치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기에 새롭게 다가올 미국의 시대를 예측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란다는 나치즘에 스며든 니체의 초인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세상은 이처럼 초인들만 살아남는 세상 같다.

 

   
 
  ▲ 란다 대령이 자신이 잡아온 레인에게 사면을 전제로 히틀러 암살 계획을 묵인해주겠다고 협상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가면서 알 수 없는 허무감에 빠져든다. 제 3제국, 프랑스의 나치 괴뢰 정부인 비쉬 정부, 영화광이었던 선동가 괴벨스, 히틀러가 나의 양심이었다던 괴링 등등의 단어에 익숙한 지식인일수록 이 영화의 결말을 예측하며 슬픔에 젖는다. 주인공 레인도 잡혀가서 불의한 거래를 받아들이고, 히틀러가 그날 파리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영화는 작전의 실패에 따른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이 관객들의 예측이다.

그러나 작전은 성공한다. 슈샤나도 죽지만 히틀러도 죽는다. 역사적 고증은 필요 없다. 세상이 못한 일을 영화가 했을 뿐이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이성과 지식은 타란티노의 농담 앞에서 무시당한다.

 

   
 
  ▲ 쇼샤나가 ”너희들을 다 여기서 죽을 것”이라 말하는 영상이 상영되면서 극장은 불타오르고 히틀러와 지도부는 최후를 맞게 된다.  
 

레인은 약속대로 란다를 연합군 지역으로 안전하게 넘긴다. 미국인과 독일인의 교양이 약속을 성사시켰다. 관객의 지성을 무시하던 영화가 이처럼 교양의 틀에 갇혀 교활한 란다를 살려둘 수밖에 없는가? 그러나 알도 레인 중위는 100% 미국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원주민의 피가 섞여있다. 그는 약속을 지켰지만 란다의 머리에 나치 문양을 남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는 비극이다. 양심과 도덕, 이성이 세계를 이끌어 나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때로는 불의한 거래를 정당화한다. 레인의 투박함은 란다의 머리에 흔적을 남기고 인간은 흔적 없이 계몽되지 않는다는 슬픈 교훈을 남긴다.

그러나 그 비극은 기독교적 영성의 출발이다. 선의 자생력은 없다. 우리의 의지와 이성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세상은 이 불완전한 것으로 기술되지만 성서는 새로운 역사를 쓴다. 하나님은 이 악한 세계에 선으로 개입하며 거기에 응답하는 인간은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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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ful 2011-07-17 13:01:25
이 영화 안에 이처럼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풍성하게 들어있는 줄 몰랐습니다.
목사님의 영화/신학 강의에 깊이 감명 받았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 디비디를 다시 꺼내보려고 합니다.
잔인한 폭력도 야비한 술수도 실은 인간의 나약함과 악(선의 결여)의 반증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귀한 평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기요 2011-07-10 15:04:40
어휴....부끄러워요. 좀 내려요 이런 글.. 불필요하고 부정확한, 현학적인 언어로 점철되어 있군요.. 인문학을 갖다 쓰려면 좀 제대로 공부하고 하든지...한숨만 나옵니다. 아니면 목사라는 직함 빼고 본인 이름으로만 글을 쓰든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하나만이라도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