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백인 문화의 포로된 미국 기독교"
"서구 백인 문화의 포로된 미국 기독교"
  • 라승찬
  • 승인 2011.07.20 14:2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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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승찬 교수, 찬양과 탄식의 교차점에 서라!

최근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라승찬 교수(노스파크신학교)가 지난 '와일드 구스 축제'에서 강의한 내용을 번역해서 정리한 글이다. 한인 2세인 라 교수는 백인 중심에서 비백인 중심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미국 복음주의 교단인 ECC(The Evangelical Covenant Church)의 목사이며, 교단 산하 신학교인 노스파크신학교에서 교회 성장과 전도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자 주)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상황 속의 문화적 포로 상태(cultural captivity)에 관한 이해'라는 주제를 논하려 한다. 최근 세계 기독교의 흐름은 유럽에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변화는 필립 젠킨스, 라민 사네, 앤드류 월스, 데이빗 배럿, 토드 존슨 등의 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졌다.

1900년에는 80-85% 기독교인들이 유럽과 북미 출신이었으나 2005년 자료를 보면 60%의 기독교인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남미 출신으로 나타났다. 토드 존슨과 데이빗 배럿은 2050년에 이르면 70-75%의 기독교인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출신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독교 중심의 전환: 유럽에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로

지난 1500년 동안 기독교의 지배적 담론은 영미나 유럽 기독교에서 나왔다. 힘은 영미와 유럽에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1900년 기독교 인구의 중심을 북대서양으로 정했던 것이 오늘날 남동쪽으로 움직여 아프리카의 팀북투(Timbuktu)가 새로운 중심이 됐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가 세계 기독교 안에서 경험하는 것들이다. 덧붙이자면, 이런 전환은 세계 기독교뿐만 아니라 미국 기독교에서도 일어나는 듯하다. 이것은 미국 사회를 전체로 바라봤을 때 일어나는 인구 변화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2008년 인구조사에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일이 소수 인종이었지만 2042년과 2050년 사이에는 과반수를 넘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2023년이 되면 아동 인구는 비백인이 다수를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계자료이다. 왜냐하면 이민법이 어떻게 개정되든 12년 내 18살 이하의 다수가 비백인일 것이고 이런 추세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 사회의 인구 변화는 불가피하다. 미국 사회는 다문화적이고 다양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 라승찬 교수. ⓒ 미주뉴스앤조이  
 
미국 기독교의 몰락?

나의 첫 번째 책 <The Next Evangelism: Freeing the Church from Western Cultural Captivity>이 출판될 무렵 두 개의 글이 나왔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인터넷 몽크'라고 불리는 마이클 스펜서가 쓴 '복음주의의 몰락'에 관한 글과 <뉴스위크>가 부활절 때 커버 스토리로 다룬 "미국 기독교의 최후"라는 글이다. 당시 남침례신학교 총장 알버트 말러는 미국이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고 비탄했다.

특히 퓨재단(Pew Foundation)과 미국인 종교 성향 조사 (American Religious Identification Survey)의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미국 기독교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란 질문이 일기 시작했다. 여러 통계자료 중 주목할 만한 점은 '당신은 종교적(religious)이냐 영적(spiritual)이냐'는 질문에 '영적'이라고 답한 사람이 1990년에는 8%이었는데 2005년에 들어 15%로 증가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미국 교회가 형식적 종교 형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많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국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는가. 나는 미국 기독교가 아닌, 미국 내 백인 기독교 공동체가 쇠퇴한다고 분석한다. 사실상, 미국 내 다양한 인종이 섞인 기독교 공동체들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 내 가장 크고 빠르게 성장하는 두 교단은 침례교단(남침례교, 미국침례교, 그 밖에 모든 침례교 포함)과 오순절교단이다. 침례교단의 55%는 백인이고 나머지 45%는 비백인이다. 오순절교단도 침례교단처럼 인종적으로 다양하다. 이것을 볼 때 인종적으로 다양한 교단들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가장 빠르게 쇠퇴하고 있는 세 교단은 교인의 96%가 백인인 루터교단(ELCA), UMC(90% 백인), UCC(99.5% 백인)이다.

얼마전, 미국 주류 교단들과 복음주의 계열 교단들의 지도자들이 모인 컨퍼런스에 갔었다. 미국 주류 교단들은 지속적으로 매해 25%의 교인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에 비해 복음주의 계열의 교단들은 교인 수가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이 복음주의 계열의 교단 내에서 백인 교인들의 숫자는 작아지고 비백인 교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자료가 미국 기독교에 변화가 일어남을 암시한다. 미국 기독교는 점점 다문화적이고 다인종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것이 미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서구, 백인 문화의 포로가 되어버린 미국 기독교

   
 
  ▲ 라승찬 교수가 쓴 < The Next Evangelism: Freeing the Church from Western Cultural Captivity >.  
 
이러한 인구 변동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국 기독교가 여전히 '서구, 백인 문화의 포로 상태 (Western, white cultural captivity) '에 빠져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들은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서구 백인 문화의 포로가 된 미국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는 주변 문화가 교회의 중심이 되어가고, 성서의 가치보다는 문화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미국 기독교는 성서보다 서구와 백인의 문화적 가치를 더욱 반영하고 있다.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프리카•아시아•남미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 신학이 아직도 서구 백인 문화의 포로가 된 상태라면 신학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어떤 부분에서 미국 기독교가 서구 백인 문화의 포로로 붙잡혔는가. '개인주의의 과잉'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은 개인주의를 강조했다. 개인의 요구와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다. 어떻게 개인주의가 성서보다 미국 기독교에 더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까?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성서의 66권 중에서 62권 혹은 63권은 공동체를 위해 쓰여졌다. 반면, 두 권 혹은 세 권 정도(디모데서, 디도서, 빌레몬서)만이 개인에게 쓰여졌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미국 교회 강단에서 얼마나 많이 개인의 삶과 성장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가. 대표적 기독교 베스트셀러인 <목적이 이끄는 삶>, <잘되는 나>, <야베스의 기도>을 봐도 미국 기독교가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서 전체에 빈번히 나오는 '이민자와 고아를 돌보라'는 메시지보다 '무기를 소유하라'는 메시지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무기허용법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찾는 메시지는 성서에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전미총기협회 가입보다 미국 내의 이민자와 고아를 돌보려하는가. 이런 식의 미국 서구 백인 중심 문화에 물든 기독교는 문화를 뛰어넘는 세계 기독교와의 연대에 방해가 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우리는 정의에 헌신하는 것이 문화적 가치가 아닌 성서적 가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정의에 헌신하겠다"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것은 여전히 서구 백인 문화적이다. 나는 교수로서 사회정의와 가난에 관한 많은 책들과 자료들을 접하게 된다. 그 중 한 DVD 자료의 뒷면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우리가 가난을 특정한 때에 끝낼 수 있는 방법"(The poor you will not always have with you: how we will end poverty within a certain time)이라고 써있었다(주: 마태복음 28:16의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있거니와"를 인용). 저자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의도와 가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이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미국 승리주의'로 인해 불쾌해졌다. 어떻게 우리가, 즉 서구 미국인이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성서의 본래 메시지보다 미국 승리주의를 우위에 둬 가난을 끝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없이 우리 자신의 힘과 지식으로 가난과 불의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또 미국 기독교에 대한 의존을 증가시키는 특정한 방법으로만 가난과 불의의 문제를 끝낼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역사를 볼 때 이것은 군사 식민주의(military colonialism)로 나타났고 21세기에는 문화 식민주의(cultural colonialism)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미국 승리주의의 포로가 되어 부끄러운 역사의 실수를 반복할 셈인가.

세계화 가운데 일어나는 가난의 문제에 대한 컨퍼런스에 참여한 적이 있다. 대다수의 패널들은 백인이었고 어떻게 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의논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회자가 그걸 눈치 챘는지 내게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백인들은 백인들이 처음부터 만들어낸 문제를 다른 백인들에게 이야기한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할 지 의문이다."

찬양과 탄식의 교차점에 서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들을 대신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미국 승리주의와 예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성서에서 나타난 '찬양과 탄식의 교차점(the intersection of praise and lament)'에 대해 생각해보자.

요즘 나는 예레미야애가(lament)의 주석 작업을 하고 있다. 즐겁다기보단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책이다. 90년 중반 처음 교회 개척을 시작했을 때 이 예레미야애가를 가지고 설교를 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교인들이 많은 혜택을 받고 성장한 보스턴 근방의MIT나 하버드대학교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애가에서 말하는 고통의 개념 혹은 그 경험조차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고통이란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 밤샘 공부를 해야하는 것 정도였다.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서 내가 주목한 것은 찬양과 탄식의 이야기였다. 월터 브루거만은 그의 저서 <평화(Peace)>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신학'을 논한다. 가진 자의 신학은 가지지 못한 자의 신학과 다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한 부유한 교회의 중고등부 모임에 방문했다고 가정하자. 16살짜리 소년에게 "천국이 어떨 것 같은가"라고 묻는다면 가진 자의 신학을 하는 그 아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천국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완벽하겠죠. 여기서는 델 노트북을 가지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맥북에어를 가지고 있을 거에요. 그리고 토요타가 아닌 마세라티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겠죠." 이 아이에게, 가진 자의 신학을 하는 이에게 천국은 내가 지금 소유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수단 난민자 수용소에 있는 16살짜리 소녀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아이는 가지지 못한 자의 신학을 할 것이다. 이 아이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16살짜리 소년과 다르게 대답할 것이다. "천국은 지금 살고 있는 이 곳과 완전히 다를거에요. 천국은 제 부모님이 살해당하지 않는 곳이죠. 천국은 매일 밤 성폭행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에요. 천국은 음식과 물이 항상 있는 곳일 거에요."

자, 여기서 질문을 하겠다. 둘 중 누구의 답이 옳고 그른것인가. 두 대답 모두 옳다. 완벽한 천국에 대한 그림을 얻기 위해선 두 아이의 답을 경청해야 한다. 다시 말해 찬양하는 이의 이야기와 탄식하는 이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한다. 바로 이때 찬양과 탄식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국인이 예배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방식은 찬양의 범주에 속한다. 약 10-15년 전에 한 목사가 미국 기독교의 다섯가지 대표적 예배 전통을 분석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예배 전통이 찬양에 관한 곡을 다룬데 비해, 탄식에 관한 곡들은 전무했다. 이는 곧, 찬양과 탄식을 이야기하는 성서의 통전성을 담아야 할 예배 전통이 찬양의 범주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이 찬양의 범주가 미국 승리주의를 찬동하기 때문이다.

   
 
  ▲ 와일드 구스 페스티벌 참석자들에게 강의하고 있는 라승찬 교수.  
 
찬양과 탄식의 조화

찬양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탄식은 고통 가운데 "주님, 지금 당장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의 적들을 물리쳐 주십시오"라고 고백한다. 즉, 당신이 고통 가운데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도움과 구원, 그리고 적들을 물리쳐 달라고 탄식의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승리로 감사할 상황에 이런 탄식의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며 오만이다.

우리(미국인)는 특권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이 부르는 탄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찬양의 자리에서 탄식의 시편을 노래한다. 우리가 미국 승리주의와 예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시각으로 고통을 바라본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런 시각으로 "우리 미국은 축복받은 민족이고 나라며 공동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축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겠지만 예외주의의 이면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를 옳게 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는 의식이 자리잡으면서 되풀이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전달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어떻게 미국 승리주의와 예외주의의 이야기 속에 찬양과 탄식의 이야기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우리가 여기 서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열심히 생각하며 서구의 모든 물자들을 동원하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은 '미국 승리주의적 언어'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에 얽힌 이야기로 이 시간을 마치려고 한다. 내 이름은 서구 이름은 아니다. 한국계 미국 이름이다. 내 이름이 원래는 'Sung-Chan'으로 표기되었다. 중학교 시절에 'Sung'보다는 'Soong'이 발음상 더 정확하다고 생각해 'Soong'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가 스무살이 되어 미국 시민권을 딸 때 이름을 바꿀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존이나 에릭이 아닌 'Soong-Chan'으로 변경해 달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나에게 내 이름과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Soong-Chan'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름이고 정체성이다.

미국의 역사를 보자. 하나님이 주신 이름과 정체성이 찢겨진 자들(인디언들과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 기자 주)이 있지 않은가. 내겐 내 이름과 정체성을 지킬 권리가 주어졌지만 그들은 그들 고유의 문화와 이야기들, 정체성과 이름을 빼앗기고 그들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이 그들에게 강요됐다. 너무 자주 우리는 과거를 망각한 채 흑인, 동양인, 히스패닉, 백인이 함께 지내는 것을 찬양한다. 그러나 우리는 탄식의 이야기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탄식해야 한다. 이러한 탄식 없이는 우리는 미국 승리주의와 예외주의를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들어가야 할 탄식의 자리는 어디인가.

글 · 라승찬 교수(노스파크신학교) / 번역  · 윤영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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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2022-01-27 17:18:22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요한 2011-07-27 11:49:30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새길교회 2011-07-21 14:20:18
"나교수의 한글명칭은 "승찬"입니다. 제가 본인과 직접 대화 중에 확인했습니다.
지난 7월 8-13일에 크리스천교회(제자회)--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총회가 있었는데, 그 중 일부에 강사로 왔었습니다.
그 강연이 저희교회 웹사이트에 mp3 파일로 올려져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들어볼만한 내용입니다.

saegilchristian.org/zbxe/27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