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진짜요?'
'당신 진짜요?'
  • 장윤재
  • 승인 2011.07.31 21:5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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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안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중심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

독일 사람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먼저 이걸 묻는다고 한다. “이 물건 얼마나 오래 쓰나요?” 일본 사람들은 먼저 이걸 묻는다. “이거 신제품인가요?”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무얼 먼저 묻는가? 여러 답이 있지만, “이거 진짠가요?”이다.

얼마나 ‘가짜’에 속고 살았으면, 이렇게 ‘진짜’인지를 묻는 것이 생활화가 되었겠는가. 그러다보니 기름도 참, 진짜, 순, 100%, 원조 등의 말이 붙어야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 진짜요?’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 ⓒ 김영사  
 
얼마나 가짜에 속고 살았으면

서점에 나가본 사람들을 다 안다. 요즘도 인문학 분야 스테디셀러를 달리고 있는 책은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영어 원제 The God Delusion)이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나 <눈먼 시계공>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다. 그런데 7,000권만 팔려도 대박이라는 작은 한국 인문학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은 2007년 7월 중순에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4만 권 이상이 팔려나갔고, 그해 연말 40만 권을 훌쩍 넘어섰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후 인문학 도서 분야에서 최대의 돌풍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돈지갑을 흔쾌히 열게 한 이 두껍고 비싼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 한다.”

저자는 가수 존 레넌(John Lennon)의 노랫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한번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자살 폭파범, 9·11도,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 전쟁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도, 또한 보스니아 인종청소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과감히 종교를 버리고 “행복하고 도덕적이며 지적인 무신론자가 되라”고 주문한다.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란 우스개가 유포되는 사회

왜 한국인들은 이 책에 열광하는가. 요즘 우리사회에 ‘안티 기독교’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안티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는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반기독교 정서의 조직화 및 운동화 수위가 심상치 않다. 아마 22세기의 한국 역사학자는 21세기 초 한국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안티 기독교를 꼽을지 모르겠다.

필자가 가르치는 이화대학교에서는 비기독교인 학생들 사이에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라는 우스개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제1계명은 ‘절대 혼자 식당에서 밥 먹지 않기’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약 15분 동안의 평균 식사 시간 동안에 최소한 5명 정도의 전도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제2계명은 누가 다가와 ‘교회 나가시느냐’고 물으면 ‘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넵’하고 단호하게 말하기다. 제3계명은 또 누군가 다가와 ‘나와 같이 성경공부 해보지 않겠냐’고 물으면 ‘아니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아니욥’ 하고 확실하게 거절하기 등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회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때는 베드로가 입을 열어 설교하면 하루에 3,000명씩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던 때였다. 그 이유가 44절에서 47절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다.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대로 나누어 가지며,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들의 본이 되는 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호감’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종교 호감도 조사가 있었다. 1970년대에 조사에서 종교 이미지 선호도는 개신교가 1위, 불교가 2위, 가톨릭이 3위였다. 그런데 2000년도에는 순위가 바뀌어 가톨릭이 1위, 불교는 그대로 2위, 개신교는 3위로 떨어졌다. 개신교에 대한 비호감도가 증가한 것이다.

   
 
  ▲ 일부 개신교인들이 노방전도를 하는 모습. ⓒ 한국 <뉴스앤조이>  
 
그리고 이러한 호감도의 변화는 실제 신도 수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2005년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전 10년간 우리나라 3대 종교 중에서 천주교 신자는 74.4%, 불교 신자는 3.9%가 증가한 반면, 개신교 신자만 1.6% 감소했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 개신교의 신도 수가 줄었다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그때 매우 신기했던 일은 그 -1.6% 성장률을 실제 사람 수로 환산하면 ‘14만4,000’명이 된다는 통계였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상징적인 숫자가 아닌가. 잘 알다시피, 14만 4,000은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나오는 말세 때의 공중 휴거 숫자다. 그렇다면 이번 한국 개신교인 숫자의 감소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보내신 가히 ‘종말론적’ 메시지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무개 목사의 교회인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설득당하는 데 말이나 논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고 한다. 60% 이상은 첫인상의 호감도가 좌우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을 잘해도 첫인상에 왠지 호감이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3분의 2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의 이미지가 갈수록 비호감이 되다보니, 아무리 담대히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외쳐도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좋은데, 기독교는 싫소.”

왜 이렇게 한국 개신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는가? 무엇이 그 원인인가? 말하기 힘들고 또 듣기 힘든 고언(苦言)이지만 참회하는 심정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고자 한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이 없이 우리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니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일부 교회의 세습 문제로 나타난다. 성공한 제1세대 목회자들의 일부가 자기 자식들에게 교회를 기업처럼 물려주었다. 사회적 질타를 맞자 맞바꿔 물려주었다. 자기 교회는 친구 목사 아들에게, 친구 목사 교회는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보지 않는다. 아무개 목사의 교회로 생각한다.

   
 
  ▲ 세습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모습. ⓒ 한국 <뉴스앤조이>  
 
잘 알다시피,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성 박사의 말대로 사제들의 결혼금지는 11세기까지만 해도 권장 사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교회가 세속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자, 가톨릭교회는 교권의 세습을 막기 위해 사제들의 독신을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 개신교회의 세습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신학생들도 독신을 서원해야 안수를 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둘째로, 교회의 물질적 세속화다. 교회가 대형화되었고 기업이 되었으며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세속화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면 부자도 되고 성공한다고 믿고 나가는지 몰라도, 사람들은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잘 섬길 수 있다고 설교하는 교회로부터 아무런 영적 신비도 느끼지 못한다. 이 세상의 시류와 정확히 일치하는 교회의 메시지에서 아무런 희망과 위안을 얻지 못한다.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

셋째는 도덕성의 위기다. 몇 년 전 신정아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필자는 당시 신 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 다니던 서부지방검찰청사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TV 방송차량이 포진한 그 건물 앞을 지나다니며 당시 국민적 관심사와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신 씨의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였다. 서부지검 앞을 지나다니면서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고 다녔다. 한국에 가짜 미국박사 학위 소지자가 968명이 있는데(정말 믿기지 않지만) 이들의 45%가 신학박사라고 한다.

이 나라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인 것이다. 필자는 가짜 박사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 목사로서 너무 부끄러워 서부지검 앞을 얼굴을 못 들고 다녔다. 가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님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면, ‘교인들의 학력이 높아져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599불에 석사학위증을, 799불에 박사학위증을 사 오신 목사님이 단상 위에서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하면 과연 어느 교인이 그 말씀대로 살려하겠는가.

넷째, 일부 교회들의 잘못된 단기 선교다. 몇 년 전 여름 서울의 한 유명 교회가 전 세계 27개국 53개 도시로 무려 103개나 되는 단기 선교팀을 보내 ‘땅 밟기’ 선교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봉은사 땅 밟기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땅만 밟고 와도 그 땅에 선교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을 하겠다는 이 기괴한 발상의 선교에 필자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인 이유?

한국 개신교의 오만함이 이제는 하늘을 찌르는 것에 경악하고 만다. 필자는 유학중에 한국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교회의 여러 선교대회에 참석하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두 단어가 있다.

선교란 첫째로 “life-long commitment”요, 둘째로 “equal partnership”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교란 첫째로 ‘뼈를 묻는’ 평생 헌신이다. 지금도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가보면, 거기에는 우리보다 이 땅을 더 사랑한, ‘조선 사람을 더 나은 조선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헌신하다 이 땅에 뼈를 묻은 많은 분들이 누워있다.

그리고 선교란 둘째로 ‘평등한 동반자 관계’다. 즉 선교란 문화적·경제적·복음적으로 우위인 자가 앞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 겸손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땅 밟기 선교라니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이화대학 학생들을 면담해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펼쳐지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전도 앞에 상처 입지 않은 학생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인가. 최근 발표된 한 결혼정보회사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신랑 후보들의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이라고 나왔다 하지 않는가. 그들이 뽑은 두 이유가 재미있다. ‘왠지 배타적일 것 같아서’ 그리고 ‘왠지 생활비를 헌금으로 빼돌릴 것 같아서’란다.

‘밥 퍼주는 시인’ 최일도 목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속칭 청량리 588 굴다리 밑에서 노숙자와 행려자들에게 밥 먹이기 운동을 시작한 그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하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신학대학교에 강연 초대를 받아 전철 1호선 타고 가던 중이었다. 자리가 없어 서서 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날 과로를 한 탓에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전철이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리며 한참을 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옆구리를 콱 찌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보니 이마가 약간 벗겨지고 아주 깐깐하게 생긴 초로의 아저씨 한 사람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느닷없이 ‘예수 믿어!’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최 목사는 ‘나 목사인데요’ 라고 말도 못하고 ‘저, 믿고 있는 데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또 한참을 노려보더니 이렇게 또 한마디를 콱 내뱉고 옆 칸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졸지 말고 바로 믿어!’ 그때 최 목사는 너무 창피해서 자신이 목사라는 사실도 잊고 달리는 전철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그는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나 다시는 저렇게 입으로 예수를 증거 하지 않으리라! 나 다시는 저렇게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리라!’

   
 
  ▲ 돈에 전도 문구를 찍어 전도하는 일부 교인들. ⓒ 한국 <뉴스앤조이>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따로 노는 한국 교회

마지막 다섯째로, 한국 개신교가 비호감이 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종교가 생활화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것’ 때문으로 조사된다. 한 다른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반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는 느낌을 가지는 이유 중 1위는 “교인들이 진실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34%)이고, 2위는 “교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11.8%)이며, 3위는 “타종교에 배타적이기 때문”(10.7%)이다.

192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김활란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혹자(或者)는 종교란 모든 실생활과의 관계를 떠나 자기 혼자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고 일요일에 예배당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이나 다른 방식으로 착취를 하다가도 주일에 양심에 아무 저촉도 없이 예배를 드린다. 그 원인은 종교생활이 실제화 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까닭이다.”

종교가 생활이 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가 되지 못하니까 (달리 말하면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인이란 누군가. 그들은 토요일까지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부터 다시 하려는 사람들이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회개하는 것이 일주일에 단 한 번도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면 우리는 우리가 회개한 일을 다음날 또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진정성’(authenticity)이 의심을 받기에, 사람들은 교회에 등을 돌린다.

어느 도시에 목회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맨 땅에 개척해서 열심히 목회를 하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그런데 그만 과로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콩팥 두개를 다 떼어내고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받아야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평소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으니 교인들 중 누가 콩팥 하나 떼어주지 않을까 싶어 주일 설교 시간에 상황을 설명하고 콩팥을 떼어줄 사람 손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수석 장로님부터 조심조심 손을 들더니 급기야 예배당을 가득 메운 3,000명의 교인이 다 손을 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목회를 잘못하진 않았어!’ 목사님은 마음이 흡족해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3,000개의 콩팥이 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제안했다. 자기가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공중에 날릴 것이니 모두가 ‘주여 삼창’을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동안 그 머리카락이 자기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 콩팥을 기증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눈을 감고 열심히 통성으로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시간이 지나도 그 머리카락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 아무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교인들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더란다. (머리카락이 가까이 오면 입으로 바람을 불며) “주~여” “아~멘” “믿~습니다.”

은퇴하신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에서 기억하고 있던 예화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신구교를 포함해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년이 넘었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되어 나갔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고,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급속히 퍼져나갔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양반과 남성을 세상의 중심으로 믿어온 조선의 유교 체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미천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글자그대로 ‘복음’(福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의 이와 같은 변혁적이고 인습타파적인 특성들을 점차 잃기 시작했다. 한 종교가 소종파적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는 평등적이고 변혁적이며 예언자적 특성을 지니다가도, 그 소종파가 점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무리 없는 안착을 시도할 때가 되면 초기의 특성들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점 강한 현상유지적 성향을 가지게 되고, 변화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위험시 하게 된다.

성차별의 보루가 된 한국 교회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한국 교회는 성차별의 보루가 되었다.(한 교회여성단체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설문자 1,000명 중 51%가 청소 및 음식 만들기, 7.3%가 행사 준비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여성의 약 60%가 집안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항목에서 청소 및 음식 만들기를 택한 사람은 겨우 0.3%에 불과했다.) 언제부턴가 한국 개신교회는 지극히 배타적 신앙 행태를 강화해 왔고,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도덕적 타락과 권력 사유화의 길을 걸었으며, 개 교회들은 수평 이동을 통한 교회 성장을 추구하면서 교인들을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인 경쟁에 몰두해 왔다. 그렇게 교회는 점점 자신의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갔고, 교회의 성장이 곧 복음 선포라는 환상 속에 살다가 급기야 성장 자체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 종교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다수 종교이며 주류 종교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risky) 일이 아니다. 초대교인들과 달리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변에 아무 위협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예수는 나의 주’라 말할 수 있다. 이제 교회 나가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회생활에 보탬과 이득이 된다. 기독교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좁은 문’이 아니라 가장 넓고 평탄한 길이 되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서서히 ‘일상적인’(routine) 일이 되어 갔다. 판에 박힌 일과가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치 중년의 부부들에게 권태기라는 것이 찾아오듯이, 첫 신앙의 감동도 사라져갔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제도교회의 안락함과 기득권 속에 거하게 되었다.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

실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다. 교회는 종종 ‘예수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신학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基督論)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한다. 한인철 교수는 한국 교회가 예수는 잘 믿어도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히 신이신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죄를 다 짊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를 절대 따라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따라 무엇을 하려는 것은 ‘오직 은총’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교묘한 3불(三不) 원칙이다. 참으로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롬 15:1-6)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도 부정되고 있다.

   
 
  신학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基督論)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한다. ⓒ 뉴스앤조이  
 
필자가 보기에 문제의 뿌리는 종교개혁 신학 안에 잉태해 있고 그에 대한 우리의 불철저한 사유(思惟)와 전유(專有)에 있다. 우리는 “sola fide”를 이유로 행함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sola gratia”를 이유로 이웃에 대한 책무로부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sola scriptura”를 이유로 자연을 하나님 계시의 통로에서 배제해버렸으며 그 결과 자연을 자기 맘대로 착취하게 되었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신학적 유산 안에 있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성찰하지 못한 신학자들과 신학 교육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닌 ‘크리스천’

필자 자신부터 참회해야 한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 안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위기를 운운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우리들을 향해 길거리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던졌던 바로 그 질문, 즉 ‘당신 진짜요?’를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우리의 믿음은 진정성이 있는가?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참된 크리스천인가?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을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이 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과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다가가 묻는다. “What is your name?”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My name is Christian.”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장윤재 교수. ⓒ 한국 <뉴스앤조이>  
 
그때 그는 자기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총탄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사지 한복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나가게 만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렇게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목숨을 건 이름이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혹 이런 ‘진짜’ 크리스천의 수가 적어서는 아니겠는가?

장윤재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 <기독교사상> 7월호에 실린 글을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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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5 03:12:12
[[ 문제의 뿌리는 종교개혁 신학 안에 잉태해 있고 그에 대한 우리의 불철저한 사유(思惟)와 전유(專有)에 있다. 우리는 “sola fide”를 이유로 행함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sola gratia”를 이유로 이웃에 대한 책무로부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sola scriptura”를 이유로 자연을 하나님 계시의 통로에서 배제해버렸으며 그 결과 자연을 자기 맘대로 착취하게 되었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신학적 유산 안에 있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성찰하지 못한 신학자들과 신학 교육 안에 자리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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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 2011-08-01 23:56:50
기~인 글 내용... 구구구절절절 좋은 내용인데... 글을 쓰면서 그 예가 하필이면 왜 '김활란'인가.

김활란의 고백을 이런 말도 교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혹자(或者)는 종교란... 그러기 때문에 적극적 친일이나 다른 방식으로 민족을 이용하다가도 주일에 양심에 아무 저촉도 없이 예배를 드린다. 그 원인은 종교생활이 실제화 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까닭이다.”

다음은 위키 백과에 나온 김활란의 적극적인 친일행위임.

1936년 말부터 교육과 여성계몽 분야에서 친일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 조선총독부가 지원하는 조선부인연구회, 방송선전협의회에 참여했다. 김복완 등 상류층 여성들과 함께 애국금차회를 조직하여 금비녀와 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는 운동을 벌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조선언론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을 통해 시국 강연에 수백차례 나섰으며, 《동양지광》, 《조광》,매일신보등 신문이나 잡지등에 일본 제국의 전쟁 지원을 적극 장려하는 선동과 내선일체, 친일 및 전쟁지원 활동등 논설글들을 수백차례 기고하는등 일제말기 전시체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또한 일본 제국의 한민족 말살정책인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고, 징병을 권유하는 강연에도 앞장섰다....

내생각 2011-08-01 23:53:25
창조과학회, 지적설계론 따위를 빨리 청소해야 합니다. 사실 무식한 노상전도자들은 차라리 순수해보이기라도 합니다. 배울만큼 배웠다는 학자나 교수들이 저런 엉터리 사이비과학이나 유포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기독교에 미치면 멀쩡한 사람도 바보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되요. 제일 심각한 문제입니다.

짜장라면 2011-08-01 13:18:18
좋은 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개혁시기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이 왜 일어났으며 왜 오직, 은혜, 믿음, 성경이란 구호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실천하지 않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지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의 선배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수님! 더 쉽게 설명해 드릴께요. 문제는 말이죠, 길자연, 조용기, 김홍도 등의 목사님들께 비롯된다는 것 입니다. 위의 분들로 대표되는 수준, 자질 미달의 기복주의적인 목사님들께 있는 것 입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요?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