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가 분석한 '삼박자 구원론'
사회학자가 분석한 '삼박자 구원론'
  • 윤영석
  • 승인 2011.08.01 19:1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 조동호 교수의 '현대사회와 신학의 이해' 다섯 번째 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학적 기반인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이 가진 사회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가 기획한 '현대 사회와 신학의 이해'에서 조동호 교수(퀸즈칼리지 사회학과)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소비자의 욕구, 눈높이와 입맛을 따라가는 '소비자 종교' 혹은 종교산업"의 대표적인 예로 삼박자 구원론를 들었다.

   
 
  ▲ 조동호 교수 ⓒ 미주뉴스앤조이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본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세속화된 사회)에서 점차 서비스하는 교회로 변한다. 서비스라는 것은 소비자의 입맛과 요구에 맞춘다. 될 수 있으면 많이 끌어오려고 한다. 이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그렇다면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자리는 어디인가. 종교라고 하는 것이 의식, 느낌, 선호 등의 심리영역에 국한된다. 그 결과로 신조, 교리, 신학이 교회 내에서 후퇴하고 상담과 치유, '실천신학'이 강조된다. 이 소비자 종교의 대표적인 예가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이다." (조동호)

7월 18일 뉴저지 새하늘교회(Sae Ha Neul Church, 방홍석 목사)에서 열린 공개강좌는 기독교와 근대성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았다. 8시에 시작한 강의는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되었으며 참석자들은 세속화 속에서 변화되는 종교의 의미와 역할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 조 교수는 또 삼박자 구원론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며 삼박자 구원론을 징후로 삼아 마치 관상을 보듯이 한국 사회 전체의 됨됨이를 읽고자 했다.
 
세속화와 삼박자 구원론이 무슨 관계?

세속화와 삼박자 구원론이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가. 조 교수는 우선 세속화란 "사회 속에서  종교의 영역, 종교적인 사고방식의 영향범위가 좁아지고 그 힘이 예전보다 약화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세속화가 가진 세 가지 의미는 "종교 영역과 삶의 다른 영역들의 분화"와 "종교적 세계관의 폐지 혹은 주변화", 그리고 "종교의 사생활화(privatization)"이다. 이 세속화는 지역, 세대, 성별에 따라 불균등하게 일어난다.

세속화론의 타당성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종교 영역과 다른 생활 영역들의 분화"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곧 "한 사회에 하나의 지배적인 종교와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 경쟁하는 다른 세계관들과 종교집단들이 공존"하고 "신앙은 (소비자들의) 선택의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세속화가 진전된 사회에서는 이른바 "종교의 자유시장”이 형성된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는 "조직 존폐"와 "존재 의미의 확립"이라는 두겹의 위기에 직면한다.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 종교집단은 소비자의 욕구와 눈높이, 입맛을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 된다. 종단, 교단을 불분하고 종교 단체는 소비자 종교로 되는 경향이 있다. 복음으로 세상의 길잡이가 되기보다는, 이처럼 대중의 요구에 순응한 소비자 종교가 바로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 같은 것이다.

신앙은 기적의 테크놀로지

조 교수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예배, 신앙생활, 기도, 설교, 간증, 선교를 통해 삼박자 구원론을 분석했다. 순복음교회의 예배는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기적이 눈앞에서 발생하는 현장"이다.

"부흥회식 예배의 특징은 바로 그 현장에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난다는 거다. 그래서 예배는 곧 기적의 현장이다. 설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예배 때마다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그들은 기독교는 "기적교"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기적이란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원하는대로 일으킬 수 있는 일상적인 일로 되어버린다. 기적이 일상화되고, 일상이 기적화된다. 신앙생활이란 기적을 바라고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론일 뿐이다. 기적의 테크놀로지이다. 아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식으로 기적을 합리적 통제이라 둔다." (조동호)

설교는 이러한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노만 빈센트 필, 나폴레온 힐, 조엘 오스틴 등의  "적극적 사고의 힘"이라는 틀로 성경 전체를 해석하고, 성공한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조언한다. 간증은 기적을 경험한 성공담이며 아주 건강, 사업, 가족, 입시, 직장 등 표준화된 “문제”의 목록을 따르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비슷하다. 선교와 교회성장이란 이런 성공비결을 파는 일종의 "다단계 판매조직"에 가깝다. 개인이 하는 “사업”과 “하나님의 사업”이 기묘하게 얽힌다. 역설적이게도, 신학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소비자 기독교는 자유주의신학보다 더 근대사회의 논리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  

종교의 끊임없는 자기비판, 참 종교로 가는 길

결론 및 다음 모임의 서론으로 조 교수는 칼 바르트의 종교 비판을 소개했다. 바르트는 모더니티에 적응하는 데만 골몰해온 자유주의신학의 스승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누구보다 신랄하게,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깃든 인간의 교만과 자기정당화의 숨은 동기를 비판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은혜는 종교의 반대편에 있다. 종교는 은혜의 반대다. 그의 “말씀의 신학”의 출발점은 종교 비판으로 시작하고, 또 종교 비판을 통해서 전개된다. 그의 종교 비판은 삶의 한 부분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서구문화의 꽃, 서구문명의 최고표현으로서의 서구기독교를 겨냥한다. 기독교신앙이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자기비판이 중요하다고 조 교수는 강조했다.

"내가 볼 때 유대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유산은 자기비판의 능력이다. 자신이 지나온 모습 전체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능력이 그 생명력이었다. 모세와 구약의 예언자들, 예수와 바울이 했던 것이 종교 비판 아니던가. 성서에서 살아있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 비판'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보라. 거기 나오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성찰은 종교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아닌가. 율법의 반대편, 종교의 반대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가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바르트는 선언한다. '기독교가 참된 종교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은혜로 의롭게 된 죄인처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그럴 수 있다.'" (조동호)

다음은 조동호 교수의 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이제까지 뒤르켐, 베버, 마르크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학 이론들을 살펴봤다. 오늘은 근대사회, 현대성 혹은 근대성, 새로운 사회가 던지는 도전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을 했고, 또 현대사회에서 종교와 교회의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대한 이론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모더니티의 관계를 묻는 두 가지 방식

그리스도교 신앙과 모더니티의 관계를 묻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생존(번성)할 것인가, 교회는 존속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전히 의미 있고 중요한가, 새로운 사회가 그리스도교의 존속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조건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요즘 종교지도자들, 특히 목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숫자와 교회의 숫자가 줄어드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낀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의 방향과 다르다. 모더니티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복음의 빛에서 볼 때 모더니티는 무엇인가. 복음은 모더니티를 구원할 수 있는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스리는 것(reign)", "판단하는 것(judge)"이다. 이런 권위를 갖는 복음의 빛에서 모더니티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더니티를 인류의 진보와 향상, 해방으로서 인류의 오래된 꿈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는 한편, 그러한 진전과 향상이 새로운 공포, 파괴와 인류의 노예화를 가져왔다는 모더니티의 양면성을 검토했다. 복음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은 주로 첫 번째 화두인 "그리스도교는 근대화 속에서 어떻게 생존(번영)할 것인가"를 다루려 한다.

세속화란?

첫 번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세속화론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세속화(secularization)란 무엇인가. 사회학과 신학 용어로서 세속화란 세상이 타락했다는 개탄이 아니라 종교의 관할영역, 종교적 사고방식의 영향권이 좁아지고 그 힘이 예전보다 약화되어가는 역사적 현상을 가리킨다.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중세 시대와 달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을 보면 교회의 권세, 종교적 사고방식의 영향력이 약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성직자들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성직자가 어떤 사람에게 성찬 주기를 거부하면 교회 밖에서도 배척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있을 경우 다른 교회로 옮겨 가면 된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법, 종교, 과학, 윤리의 영역을 포함해 교회라는 집단이 권위를 가지는 영역은 좁아졌다. 예를 들어 지금은 하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선과 악, 윤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예전에는 하나님한테 인정을 받아야 장례와 결혼이 이뤄졌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1950년에서 1970년대까지 사회학자와 신학자들은 세속화를 거역할 수 없는 추세라고 생각했다. 비서구사회도 서구 사회의 선례를 따라갈 것이라고 믿었다. 세속화의 추세는 세계화적인 추세고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비서구세계와 미국에서 나타난 종교적 근본주의 운동들, 예를 들어 이슬람 운동과 오순절 운동 등이 힘을 얻게 된다. 종교가 새롭게 힘을 얻으면서 세속화가 전세계에서 고르게 막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나타났다. 세속화론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게 된다.

세속화의 세가지 의미

세속화가 가진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종교 영역과 삶의 다른 영역들의 분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정교분리, 즉 정치와 종교의 분리다. 미합중국 건국 때 처음으로 정교분리를 시도했고 지금도 흔들릴 수 없는 원칙으로 굳어져 있다. 미연방의회는 국교를 만드는 것에 대해 의논하지 않는다고 연방헌법 보칙 제 1조에 못박아놨다. 미국 의회가 어떤 일이 있어도 모든 국민들이 강제로 믿어야 하는 종교를 세우지 않는다는 의미다. 미국의 창시자들이 이런 결정을 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미합중국의 창시자들은 (국교가 확립된) 유럽의 종교 전쟁의 끔찍한 결과를 기억했다.  게다가 13개 주의 공식신앙이 각각 달랐다. 연방차원의 정치적 통합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다. 국가가 권력으로 강요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일 수 없다는 신앙관도 작용했다.

사회생활의 분화는 정교분리에서 그치지 않는다. 법률과 행정만이 아니라 경제, 교육, 과학, 예술, 의료 등도 교회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기독교 수학이나 기독교 의학이 따로 없듯이 기업경영이나 기술개발도 신앙의 강제로부터 자유럽다. 은행 대출 이자, 임금, 노동조건 같은 것에 대해서 교회가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간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가 이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간여했다. 신학자가 성서적으로 이자를 붙이는 것이 옳고 그른지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교회가 "이자"에 대한 견해를 바꾸기 시작한다.

세속화가 가진 또 다른 의미는 종교적 세계관이 폐지되고, 주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영역(자연과학, 경제)에서는 종교적 세계관이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고, 종교적 세계관이 폐지되거나 주변화된다.

또 종교가 사생활화(privatization)된다는 변화도 있다. 공공영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종교는 사적인 영역(대인관계, 개인의 영적 상태와 마음의 평화)에서나 존속하게 된다. 

세속화의 불균등 발전

이 중 세속화가 가진 첫 번째 의미는 의심의 여지없이 기정사실이 된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의 세속화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세속화라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한 나라 안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또 남성과 여성, 도시와 농촌, 세대 간을 바라볼 때도 다양한 정도로 진행된다.

유럽의 국가 중 프랑스는 세속화가 많이 진행된 경우다. 혁명기의 프랑스 사회는 가톨릭과 그 성직자들에 대한 반감이 드높았다. 그 당시의 가톨릭 교회는 모더니티의 진전에 반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누리던 중세적 특권들이 눈의 가시였다. 그래서 난폭한 방법으로 그러한 것들을 없앴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세속화가 폭력적으로 빠르고 깊게 진행됐다.

이처럼 교회가 반역사적인 역할의 선두에 서면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때 교회가 청산 대상이 된다. 반면, 미국 사회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특정신앙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모든 종단에 신앙의 자유, 혹은 불신의 자유까지 부여했는데 오히려 교회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고 교회들의 자생력이 생겼다. 교인들 스스로 조직하고 치리하며 전도하는 능력이 생겨나 시민사회의 중요한 축이 된다. 

농촌과 도시를 봤을 때 도시가 훨씬 더 세속화되어 있다. 배운 사람들의 근거지는 아무래도 도시이며 법률가, 사업가, 은행가, 과학자, 기술자, 예술가 등 근대화된 직업, 세속화된 직업에 종사한다. 아직까지도 땅에 붙어 사는 농촌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세속화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와 여자의 경우다. 어떤 종교 집단에 가던지 (제도적으로 막지 않는 경우) 여성들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봉사를 더 많이 한다. 왜 여성들은 종교로부터 덜 분리되었는가. 간단치 않은 문제지만, 도구적 이성, 타산적 이성의 기율에 덜 노출된 사람들에게 종교는 아직도 중요한 힘으로 남는 경향이 있다. 과거엔 남성에게만 허용되던 직업군에 여성이 진출히게 되면 여성들도 남성 못지않게 세속화 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게다가 근대의 어머니들은 아이의 양육도 종교보다는 가정학이라는 근대과학에 의지하게 된다.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종교집단이 당면하는 이중의 위기

미국 같은 서구사회, 한국처럼 서구화,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모든 종교 집단은 "조직 존폐의 위기"와 "존재 의미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위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회에 하나의 지배적인 종교와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 경쟁하는 다른 세계관과 종교집단이 공존한다. 어떤 한가지 신앙이나 세계관이 강요될 수 없다. 사회구성원의 국적, 인종, 문화, 종교와 세계관이 갈수록 다원화된다. 어느 사회학자는 그것을 "종교의 자유시장”이라고 불렀다.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하듯 각기 다른 종교집단들이 “자유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제 신앙은 선택의 문제가 된다. 종교와 교단을 옮긴다고 사회적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적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종교는 여러 종교들 중 하나일 뿐이다(No Established Church, all denominations or sects).

대부분의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근대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 “똘레랑스”, 즉 종교의 자유가 법제화된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존재해왔던 종교 집단들은 생존의 문제에 마주친다. 특히 성직자들의 경우에 조직의 존속 문제가 심각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목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성직자에게 이것은 실존적 위기이다. 그러다보니 원하던 원치 않던 조직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 자체가 목적으로 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본래 기독교는 케리그마의 종교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본래 모습이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시장”에서 기독교는 점차 서비스하는 교회로 변한다. 소비자의 입맛과 요구에 맞춘다. 될 수 있으면 많이 끌어오려고 한다. 이런 서비스 없이 교회는 존속될 수 없고 소비자인 교인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같은 장로교단 안에서도 출석하는 교회를 바꿀 수 있지 않은가. 교단끼리만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개 교회끼리도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성직자 자신의 지향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사회 조건이다.

그래서 목사가 너무 어려운 설교를 할 수 없게 된다. 소비자의 의식과 요구에 신앙의 내용을 맞춘다. 현대사회에서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도구적, 공적 생활에서 지친 부분의 회복과 사적 영역의 상담과 치유다. 교회는 상담과 치유를 통해 다시 공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영향 아래 "평신도 신학", "실천신학"과 같은 것들을 신학교 커리큘럼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자리는 어디인가. 종교라고 하는 것이 의식, 느낌, 선호 등의 심리영역에 국한된다. 그 결과로 신조, 교리, 신학이 교회 내에서 후퇴하고 상담과 치유, "실천신학"이 강조된다. 흥미롭게도 거의 모든 교회와 교단에서 동일한 현상을 보이고 목회가 표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면서 교단이 자기 차별화를 위해 교단의 정체성을 부각시킨다. 사회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내용은 동일하되 포장만 다르다고 본다.

소비자 종교(혹은 종교산업)의 대표적인 예: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

세속화된 사회에서 소비자의 욕구, 눈높이와 입맛을 따라가는 "소비자 종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이 소비자 종교의 대표적인 예가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이다. 삼박자 구원론의 특징은 "현세성(worldliness)의 회복", "현실의 절실한 요구 수용과 통제"다. 조용기 목사는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은 실제 생활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 자체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도 공유하는 전제다. 또 기독교 목회가 현세성이라는 것을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르트와 본회퍼도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조 목사는 삼박자 구원론에서 영육이원론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조 목사는 "전인적 신앙생활"을 주장하는데 과연 그것이 전인적 생활인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조 목사는 인간을 영과 혼과 육을 가진 존재로 본다. 영과 혼과 육 사이에 위계질서를 정한다. 영이 그 최고를 차지한다. 영은 "절대군주"로서 하나님과 연결하는 채널이다. 혼은 "꽤가 많은 모사"다. 혼은 "철저히 지배해야 할 일꾼"이며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몸이라는 것은 철저히 파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몸에는 악한 것밖에 없기 때문에 철저히 때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존재를 계층적으로 내세우고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은 과거 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과거 이 모델이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혼과 몸의 충동을 제어하려는 것은 서구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조 목사의 인간 이해는 홀리즘(holism)과 유사하다. 홀리즘이란 몸이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몸이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내 몸의 감동이 내 영혼을 살찌게 한다. 그래서 조 목사의 홀리즘은 잘못 이해된 것이다. 조 목사는 "너의 몸은 아무런 영향이 없어. 까불면 맞아야 돼. 혼나야 돼. '혼'이 '영에 대들어서 까불면 '혼'이 나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몸'이 죽고 '혼'이 혼나야 한다"는 방식으로 몸과 영을 이해한다.

삼박자 구원론의 분석: 예배, 신앙생활, 기도, 설교, 간증, 선교

삼박자 구원론에서 예배는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순복음교회의 예배는 하나의 퍼포먼스다. “기적”의 스펙터클이다.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눈 앞에 기적의 현장이 전시된다. 예배가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앞부분은 다른 교회처럼 찬송, 기도, 성경봉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게임 앞에 있는 부속 게임 같다. 당회장 목사가 등장하면, 마치 이제부터 본예배가 시작되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찬송과 기도를 또 한다. 일반 예배의 틀 안에 또 다른 예배가 들어 있다. 이 예배 속의 예배는 감리교나 성결교의 부흥회식 형식에 따라 찬송, 기도, 설교, 회개로의 초대를 자유롭게 섞어 진행하지만, 절정은 고조된 방언기도 속에서 그 현장에서 위장병, 류마티스 등 특정 질병의 치유를 선포하는 순간이다. 

삼박자 구원론은 기독교는 "기적교"라고 한다. 기적이 없는 삶은 비참하다고 한다. 기적을 강조하다보니 역설적으로 기적은 예외적으로나 일어나는 놀랍운 사건이 아니라 일상사가 되어 버린다. 기적이 일상화되는 것이다. 정해진 신앙생활의 규칙(“법칙”으로 지칭된다)을 따르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기적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이런 식으로 기적은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발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 된다. 신의 초자연적 권능을 인간의 합리적 통제 아래 두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앙생활은 믿음은 그 저체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효과” 때문에 중요하다. 믿음은 각종 문제 해결에 가장 유효하다. 신앙생활은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기적의 테크놀로지"가 된다. 헌금도 일종의 투자다. 십일조는 신도의 당연한 의무이고 십일조 이상을 “주어야만” 넘치게 받는다. 은혜는 투자의 크기에 따른다. "믿음의 분량대로" 그저 믿고 투자를 해야 많은 축복도 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곧 "시니어 파트너"다. 아침마다 시니어 파트너에게 기도(의논)하면 사업성공의 비결을 알려준다고 한다.

이런 신앙인들에게 기도는 "기적(성공)을 가져오는 테크놀로지"다. 소원을 막연하게 기대하는 게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 각인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성취된 소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함으로써 마침내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도 개념은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의 힘>, 나폴레온 힐의 <성공철학> 등 1950-60년대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고 요즘도 끝없이 변주되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힘에 대한 주술적 믿음에 빚진 것이다. 순복음교회의 초기 간행물들은 이런 글을 번역 소개했다. 무게있는 출판사의 하나였던 현암사가 빈센트 필의 베스트셀러를 <현대사상총서>의 하나로 발행하는 시절이었다.

이런 신앙생활에서 설교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힘"이라는 틀 속에서 성경을 푸는 것이다. 미국 감리교 목사였던 빈센트 필은 그의 베스트셀러와 아울러 <Thought Conditioner>(생각조절기)라는 조그만 책자도 출판했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힘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모은 책이다. 에어컨디셔너가 공기의 온도를 조절하듯이 성경 말씀으로 생각을 조절하면 현실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공한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어야 성공 쪽으로 이끌릴 수 있다는 기회주의적 처신술도 이런 맥락에서 정당화된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삼박자 구원론에서 간증은 기적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서 효험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성공 사례 발표다. 신제품의 놀라운 효험을 선전하는 인포머셜(infomercial: 정보(information)과 광고(commercial)의 합성어), 광고의 성공 체험담처럼 판에 밖은 뻔한 이야기들을 교회가 보유한 전단, 신문, 잡지, 카세트 테입, 인터넷 등 첨단 매체를 통해 확산한다. 선교는 이런 성공을 파는 "다단계 판매조직"이다. 

삼박자 구원론과 개발독재

삼박자 구원론은 어째서 그러도 큰 인기를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가. 삼박자 구원론의 인기를 한국사회의 어떤 특징과 연관된 게 아닌가. 삼박자 구원론이라는 종교현상을 하나의 징후로 보고 한국사회 전체의 됨됨이를 읽어내는 사회적 관상보기를 시도해보자.

개발독재의 시대는 기적의 시대였다. "한강의 기적"은 이 시기 숱한 사람들의 욕망을 표현한다. 마치 기적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 몫을 잡았고 이 시기에 중산층과 상류층으로 올라섰다. 기적같은 성공을 이룬 소수의 다른 한편에는 매일의 생존이 기적으로 여겨질 만큼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민중이 있었다. 기적에 대한 기대의 일상화는 이렇게 두 면을 지닌다. 개발독재 시기의 자본주의 발전이 예측가능한 기획과 절차에 따르 것이 아니라 독재 권력의 자의적 결정, 밀실담합, 뇌물의 연쇄에 의해 이뤄졌던 만큼 성공은 “기적”처럼 오기 마련이었다. 조용기 목사가 상대해야 했던 불광동 서대문시장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내일의 끼니와 건강이 불확실했으니 생존이 곧 기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시대 경제 역시 기적 같은 “대박”의 기대를 한껏 부풀리는 한편 그만큼 내일의 불확실성, 불안을 키웠다.

또 방언의 시대였다. 방언은 소통이 단절된 시대의 (비)언어이다. 방언은 언어의 의미와 논리를 넘어선다. 방언에게 상식, 절차, 사리의 분별은 불편하고 심지어 불온하다. 개발독재 시대의 한국사회는 논리, 사리, 상식, 절차를 기피하고 불온시하던 시대였다. 정치인의 말, 기업인의 말, 소위 전문가의 말, 미디어의 말은 방언에 가까웠다. 방언은 참말의 권위가 사라진 사회, 언어가 권력과 금력 추구를 위해 교묘하게 남용되는 시대의 징후이다.

뇌물의 시대이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부패의 그물망이랄 수 있다. 위 아래 옆으로 뇌물, 촌지, 접대의 그물망이 널리 깊게 퍼져있다. 사업가의 능력은 이런 그물망을 적절히 주무르는 능력을 포험한다. 성공한 사람, 힘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그 힘을 활용할 기회를 낚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성공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은 이런 태도를 일상화한다. 막스 베버가 서구자본주의 전개의 주요인으로 꼽았던 근면과 절제 따위의 개신교윤리와 달리, 한국의 압축성장과정에서는 권력에 접근하고, 개발에 관한 비밀정보를 얻어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삼박자 구원론에는 금욕주의가 없다. 근면도 없다. 자기의 시간과 조건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것도 없다. 그대신 기적이 있다. 베버식의 합리적 경영으로 파앋되지 않는 한국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이 거기에 상응한다.

현대사회 속의 공공종교(de-privatization; public religion) 형태

종교가 삼박자 구원론과 같이 사생활화(privatization)되어 가는 반면, 공공 영역으로 진출, 사회 참여를 하는 것이 있다. 이런 공공종교에는 사회 영역 분화를 인정 여부에 따라 둘로 나눠볼 수 있다.
 
사회 영역 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공공 종교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주의를 들 수 있다. 흔히 이슬람근본주의라고 잘못 불리는 이들은 이슬람을 종교(din)나 생활양식(dunya)으로만 보지 않고 이것들과 더불어 국가( Dawla)를 포함하는 총체적 실체로 회복하고자 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세속화란 서구의 일일 뿐이라고 여긴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외래의 것이다.  이들에게 이슬람교라는 것은 분리할 수 없는 전체이다. 종교인 동시에 국가이다.   이란은 이슬람주의 혁명이 성공한 사례이다. 

다른 사례로 아직 성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기독교적 미국 재건 운동"이 있다. 미국이 원래 기독교 국가이며, 곁길로 빠진 타락한 미국을 하나님께 다시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교과과정에 기독교 창조론과 도덕을 넣기 위해 교육위원회에 진출하고 기독교 정치인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캠페인이 뛰어든다.

미국이 원래 기독교 국가로 시작했는가하는 문제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역사의 초기에 문제가 된 것은 기독교냐 비기독교냐가 아니라 영국국교냐 회중교회냐, 장로교냐 감리교냐 등의 문제였다. 개신교단들은 가톨릭과 유대교를 백안시했고 침례교, 감리교, 퀘이커 등의 군소교단들은 박해받았다.  

미국의 독립과 합중국 건설을 이끈 지도자들은 당대 유럽의 선진사상이었던 존 로크, 루소와 같은 계몽사상에 심취했기 때문에 전통 기독교를 아예 적대하거나 적어도 경계했다. 토마스 페인처럼 종교의 우매함과 위험성을 폭로하는 팜플렛을 쓰거나, 아니면 딱히 “기독교적” 신관은 아닌 이신론(deism)을 수용하거나, 그도 아니면 남들 따라서 교회에 나가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유럽 기독교의 우매함과 종교전쟁의 참혹함을 신대륙에서 되풀이할 수 없다는 인식만큼은 분명했다.

상당한 선진 교양계층이었던 건국 지도자들와는 달리 일반 이주민들도 별난 종교적 열성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세가 확장된 된 것은 정교분리 아래 자원집단으로 된 각 교단이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벌인 결과이다. 대각성운동이 왜 필요했겠는가. 그러니까 미국의 역사에서 가령 회중교회 이주공동체, 개혁교회 이주공동체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적 미국”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이런 표현은 정확한 역사 기술이 아니라 선전문구다.

사회 영역 분화를 받아들이는 공공 종교도 있다. 이것은 종교가 정치와 교육, 과학과 분리된 것을 수용하지만 종교는 공공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고 가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종교가 공공 영역에 참여하는 데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형태는 해당 종교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려는 시도다. 이것은 일종의 신정정치다. 둘째로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다른 정당들과 경쟁하면서 국가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다. 독일이나 스웨덴에는 기독교 정당이 있다. 미국에서 이런 시도가 있었지만 양당독점 구조 때문에 실패했다. 기독교 역사가 오래된 나라는 기독교 정당이 존재하고 가끔 정권을 잡기도 한다. 종교의 사회참여의 떠 다른 형태는,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참여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버마스의 사회분석을 볼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가 체제(system)와 생활 세계(life world), 이 두 가지 층으로 나눠져 있다고 본다. 체제란 도구적 이성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삶의 영역을 말한다. 쉬운 예로 국가다. 그 다음에 자본이고 이 논리를 따르는 게 기업이다. 이 체제 속에서는 모든 게 다 계약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체계 속에서만 사는 게 아니다. 생활 세계에서도 살아간다. 이런 곳에서 사는 것은 권력과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보람과 가치를 위한다. 이런 영역에서는 도구적 이성보다는 윤리적 이성, 가치합리성의 상징적 의미가 생활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어떤 때에는 생활 세계가 활발해지는 시기도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가기구가 비대해지고 자본의 힘이 커지면서 생활 세계가 식민화되었다. 생활 세계의 활력이 시들어가고 있다. 하버마스는 건강한 사회에서는 이 생활 세계의 영역, 곧 가치 합리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삶의 영역들이 국가 영역과 자본 영역을 규정하는 힘을 갖는다고 본다.

이 생활 세계 영역의 확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 집단이다. 종교 집단은 영혼과 문화 속에 깊이 각인된 상징과 의미, 거룩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종교 집단의 상징체계와 가치체계 속에 국가와 자본의 횡포를 막고 길잡이 역할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물론 종교가 체제에 종속될 수도 있다. 한국의 모 기업의 경우, 회사 안에 목사가 있다. 그 경우, 교회가 기업에 붙어있어 기업과 교회가 구분이 안 간다. 기구적으로 분리되어 있어도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기구들도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도 체제에 의해 식민화 되어있다. 그렇게 되면 종교는 노무관리 역할은 알지 몰라도 빛과 소금의 역할, 혹은 예언자의 역할은 못한다. 한국 교회가 국가와 기업에 의해 얼마나 깊이 식민화 되어있는지 평가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절대권위에 분명히 의지해야만 근대성의 맹목에 대한 살아있는 비판이 가능하다.

종교 비판을 통해 참 종교로 나아가는 길 

자신을 사적 영역에 스스로 가둔 종교, 내면 속에 은둔한 종교인 소비자 종교는 제아무리 “보수정통”이나 “순복음”을 표방해도 결국 자유주의신학 못지않게 모더니티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격이다. 근대 이래 “종교”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나 본 회퍼의 신학이 “종교 비판"에서 출발하고, 또 “종교 비판"을 통해 전개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종교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필요하고 잘못되어 있다는 게 아니라 “종교”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는 종교의 한계를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는 거다.

<로마서 강해>에서 나오는 바르트의 종교 비판은 가령 마르크스나 니체의 종교 비판 못지않게 싸늘하다. 자유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바르트는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스승을 포함한 당대 지식인들이 지지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계몽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모더니티, 그리고 그 일부인 서구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바르트의 신학혁명의 동기였다. 바르트는, 종교를 "인간의 자기 정당화, 스스로 거룩하게 되는 가장 고차적 방법"으로 보았다. 기독교도 이 비판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서구 종교사학자들이 종교 발전의 최고 단계라고 치켜세운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착각하는 가장 세련된 형식이었던 것이다. 복음은 종교의 반대이다. 하나님의 자유인 은혜는 인간의 자유가 결국 노예의 자유임을 폭로한다. 참된 종교라는 게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게 되듯, 오직 은혜의 산물일 뿐이다. 

내가 볼 때 유대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유산은 자기비판의 능력이다. 자신이 지나온 모습 전체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능력이 그 생명력이었다. 모세와 구약의 예언자들, 예수와 바울이 했던 것이 종교 비판 아니던가. 성서에서 살아있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 비판"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보라. 거기 나오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성찰은 종교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아닌가. 율법의 반대편, 종교의 반대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가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바르트는 선언한다. "기독교가 참된 종교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은혜로 의롭게 된 죄인처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그럴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광야2 2011-08-05 08:38:31
조동호 교수님의 이번 글을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앞으로도 강의 내용 전체를 빠짐없이 올려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주변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정말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들입니다. 윤기자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