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힘이 있다"
"진실은 힘이 있다"
  • 김종희
  • 승인 2007.04.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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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장기려, 그 사람], 진실 향한 산고에서 나오는 참된 힘

▲ 장기려 선생은 함석헌 선생과 평생 동지로 지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함석헌 선생과 가까이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기려 선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의 제안도 거절하고 전두환의 제안도 거절할 수 있었다. (사진 제공 홍성사)
지강유철 선생이 쓴 <장기려, 그 사람>(홍성사)에 대한 여러 서평(書評)들은 이 책의 주인공 장기려 선생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는 것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는 이 책의 저자 지강유철과 이 책 자체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장기려 선생보다는 저자 지강유철을 조금은 더 알기 때문이다. 저자가 쓴 책을 통해서 장기려를 얼마나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다.

몇 년 전 지강유철 선생이 장기려 선생 평전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걱정이 되었다. 10년 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지강유철 선생은 평전을 쓰기에는 정서나 행보가 늘 불안해 보였다.

사역하던 교회 담임목사가 총회장이 되려고 돈 봉투 돌리는 일을 거들다가 괴로운 마음을 못 이겨서 <복음과상황>에 양심선언을 하고는 교회에서 쫓겨났다. 세습하는 교회들 쫓아다니면서 피켓 들고 데모하다가 충남 보령이라는 동네에서는 교인들에게 멱살 잡혀서 질식사할 뻔했고, 서울 압구정이라는 동네에서는 그 교회 부목사에 의해 길거리에 패대기쳐져서 객사할 뻔했다. 몇몇 기독교단체 실무자로 일하다가 현지 적응 빈곤으로 조기 명퇴하더니, 최근에는 제법 오래 버티던 교회에서 지휘자 자리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 걸음걸이를 보면 어찌 불안하지 않겠나.

또한 평소 별로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온 저자가 ‘온전한’ 평전을 ‘온전히’ 쓸 수 있을까 의아했다. 저자가 몇 년간 <복음과상황>에 인터뷰를 연재한 코너 이름은 ‘선택과 옹호’였다. 처음부터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마음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코너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걸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지만, 평전을 그렇게 쓰면 곤란하지 않나 싶었고, 그래서 더 불안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다음 “참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인공이 워낙 훌륭한 인물이기도 하려니와, 저자가 책을 잘 썼기 때문이다. 처음 걱정했던 때와 비교해보면, 약간은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표현이지만, “참 잘 썼다”는 칭찬을 몇 번이나 하고 싶다.

▲ 장기려 선생은 돈이 없는 사람을 치료할 때 자신의 피를 대신 대주기도 하고 입원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어떤 때는 병원 뒷문을 열어서 몰래 도망치도록 한 일도 있다. 돈 안 내고 도망치도록 방조하는 그 행위를 무슨 기준으로 옳다 그르다 할 수 있을까. (사진 제공 홍성사)
우선 600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을 성실한 자세로 치밀하게 채워나갔다. 뒷부분에 가서 약간 서둘러서 마무리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그 정도쯤은 “1992년 10월 이후 선생에 대한 기록은 앙상하다”는 설명을 읽고 얼마든지 설득되어줄 용의가 있다. 저자가 평소 온갖 종류의 책을 두루 읽으면서 공부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의학이랑 한국사 분야는 공부량이 조금 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군데군데 발견되는 오자(誤字)는 전문용어에 대한 낯섦 때문이라고 역시 너그럽게 이해해줄 용의가 있다.

색인을 포함해서 575쪽짜리 두꺼운 책을 쓰면서 저자는 드팀없이 일관된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첫째는 주인공 개인과 주인공을 아우르는 시대를 함께 보려고 했다. 둘째는 주인공의 삶을 정치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다. 셋째는 글을 쉽게 쓰려고 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세 가지 원칙을 얘기했는데, 이 책은 시종여일 이 원칙을 잘 지켰다.

이 세 가지 원칙은 우리에게 한 가지 목표를 향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리영희 선생이 자꾸 생각났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어 그것에서 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에서)

리영희 선생이 글 쓰는 작업을 할 때의 자세를 보면 ‘진보’ ‘보수’, ‘좌파’ ‘우파’ 하는 이념적 편 가르기로 규정될 수가 없다. 그는 ‘오직 진실’만을 추구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러운 결과로 진보가 되었다. 여기서 핵심은 ‘진보’가 아니라 ‘진실’이다. 진실이 목적이고 진보는 그 열매다. 진실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짜 진보가 힘이 있고 감동이 있다. 이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그 힘이 우상을 무너뜨리는 이성이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그 힘으로 조금씩 진보해왔다.

10여 년 전 어느 강연회에서 선생에게 “대학생 때 선생님 책을 좀 읽었습니다” 하고 인사하자 “고생 좀 했겠네요” 하고 화답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생의 책을 통해서 삶의 가치와 방향을 바꾸었고, 그 덕분에 옥살이를 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을 선생도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거기에 속할 만한 용기도, 실천도 없었다. 그의 글은 그렇게 젊은이들로 하여금 고생길로 접어들게 만들었고, 그 고생길은 우리 사회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진실의 힘이다.

▲ 책의 표지가 된 사진. 장기려 선생이 젊었을 때 모습이다. 그는 착한 의사일 뿐 아니라 실력 있는 의사였다. 성공하기 위해서 실력을 갖추는 이들이 더 많지만, 때로는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 실력을 갖추는 이들도 있다. (사진 제공 홍성사)
장기려 선생도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예수의 삶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예수의 삶을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청빈한 삶을 위해 예수를 인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삶을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청빈하게 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의 정직함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웬만한 진보주의자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진보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저자는 함석헌과 장기려의 우애를 설명하면서 “함석헌 주변의 인사들이 장기려 선생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선생의 정치적 보수성을 들어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그것이 아쉬웠는지 모르나, 그런 태도를 갖는 사람은 언제 어디나 있기 마련이다. 예수는 안 그랬나? 당시 젤롯당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는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나는 인간이었나.

평화주의운동을 폭력적으로 하고 민주화운동을 비민주적으로 하는 것은 ‘평화주의’나 ‘민주주의’가 ‘진실’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나 장기려 같은 존재는 민춤해 보일 뿐이다. 진실의 힘으로 평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때 남들 눈에는 미욱한 것 같아도, 평화주의운동을 평화적으로, 민주주의운동을 민주적으로 해나가면서 지치지 않고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한길로 매진할 수 있다.

<장기려…>의 저자도 ‘진실’의 힘을 믿은 것일까. 진실을 추구하는 일념으로 이 책을 썼다는 것은 그가 섭렵한 자료와 만든 인물들의 양과 질에서 증명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11개의 장에 동원된 주(註)가 729개다. 저자에게 물어보니, 정독한 가장 중요한 자료는 부산모임 영인본인데, 총 6권으로 약 3,500~4,000쪽 정도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소식지 영인본 2권 역시 4,000쪽 정도 되고, 장기려 선생의 의학 논문과 의료보험 관련 논문 몇 편, 그리고 당시 일간지와 잡지 기고문 등도 상당한 분량이다. 이밖에 장기려 선생에 대한 수상록·회고록·위인전기·교과서·장기려 관련 논문·설교문·칼럼 등을 모두 합하면 참고자료만 수백 권이다. 게다가 서울과 부산과 포항을 오가면서 50명 정도의 관련자들을 인터뷰했다.

그러기를 2년여. 중간에 6개월 가까이는 장기려에 짓눌려 손을 놓고 방황도 했다. 저자가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기간에 병약한 노모가 하늘나라로 가신 것도 저자의 방황 기간을 길게 만든 가슴 아픈 사건일지 모른다.

문제는 진실을 추구하는 글쓰기야말로 죽을 맛이라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의 말이다.

“나는 막연하게 이념이나 이론 조작이 아닌, 엄밀한 실증적인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 우선 찾아야 하고, 읽어야 하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고, 정확하고 치밀하게 체계화해서 글을 써야 하는데, 이것은 너무 힘든 작업이야. 글 하나 쓰기 위해 몇 천 페이지를 읽어야 할 때도 있어. 가령 한반도에서 미국 군사 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정부와 의회의 비밀문서를 찾아내서 읽어야 해. 현실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시간 투자와 노력이 필요해.” (2006년 9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시대의 대가 리영희 선생도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수 천 페이지의 글을 읽어야 하는 이물리는 고통과 괴로움을 토로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장기려가 아니고 진실에 훨씬 가까운 그 사람 장기려를 찾아 나선 2년은 지강유철 선생에게 도를 닦는 세월이었으리라.

“시대 문제는 박홍규 선생이 쓴 대다수 평전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특히 <프란시스 데 고야 평전>의 시대 서술은 탁월했지요. 김형수 시인의 <문익환 평전>도 도움을 입었구요. 명료해지고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할 땐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 강준만과 유시민의 인물 서적들을 읽었고, 강대석의 <김남주 평전>, 솔로몬의 <베토벤 평전>, 살림출판사의 <칼 헨리>, <김재준 평전>, 감탄을 하며 읽었던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과 이제 읽기 시작한 <미테랑 평전>과 함께 놀았습니다. 그리고 평전을 쓰는 동안 반듯한 문장, 정확한 문장을 위해서는 고종석, 김진석, 김훈, 김병익의 글들 중 좋아하는 글들을 반복해서 읽었지요.” (기자와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 장기려 선생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결국 북에 두고 온 그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나 혼자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거절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호사를 누리고 있을까. (사진 제공 홍성사)
이런 간난신고 끝에 만들어진 책이 어찌 ‘좋은 책’이 되지 않을 수 있으랴. 저자의 땀방울로 엮인 이 책을 통해서 만난 장기려는 믿을 만했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신뢰가 저절로 생겼다. 저자가 ‘이전의 연구나 전기들이 빠뜨렸거나 에둘러 갔던 문제들’을 끄집어낸 것은 진실 때문이었다. 특히 평생을 몸담았던 제도권 교회를 말년에 떠나 ‘종들의 모임’이라는 곳에서 신앙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거나 세례를 두 번 받았던 사건이 저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문제가 한국 교회에서 논쟁거리가 되기를 바라는 은근한 마음도 엿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칫 만신창이가 될 위험도 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 책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올 때나 함석헌이 책을 통해 세상이 알려질 때, 성적(性的)인 문제와 같이 논란이 되거나 흠집이 날 만한 것들은 아예 걸러지곤 한다. 어렸을 때 위인전집으로 읽었던 박정희와 나폴레옹의 날조된 이미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걸러진 헨리 나우웬과 함석헌이나 진실에서 그만큼 거리가 멀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노력으로 그려진 장기려 선생은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있는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오직 예수만을 사랑하고 그 삶을 좇아 살기만을 갈망하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장기려 선생의 평생은 예수와 가장 가까운 모습 중에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표현해도 별로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책을 잘 써준 저자가 고맙다.

리영희 선생의 글들이 무수한 젊은이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듯이 <장기려…>를 덮으면서 삶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서 밤잠 못 이루며 고민하는 독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진실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 이 책의 저자 지강유철. 인터뷰하는 사람의 말을 귀로 듣기보다는 눈으로 들으려고 하는 것 같다. 대답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표정, 호흡, 손짓에서 진실의 한 자락이라도 더 캐내려는 듯. (사진 제공 유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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