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은혜'를 온몸으로 거부했던 자
'싸구려 은혜'를 온몸으로 거부했던 자
  • 김학현
  • 승인 2011.08.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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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메택시스의 [디트리히 본회퍼]를 읽고

월요일, 장장 827쪽짜리 하드커버 책 한 권이 내 손에 쥐어졌다. 택배 기사가 느닷없이 주고 간 책 한 권이 나를 얼떨떨하게 하고 말았다. 한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는 턱없이, 그것도 '비싼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몸부림친 한 신학자,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의 일생을 다루기에는 짧은 페이지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고려가 안 된 전기 한 권, 그러나 손에 잡자마자 읽혔다. 맞다. 그냥 읽히고 말았다.

   
 
  ▲ <디트리히 본회퍼> / 에릭 메택시스 지음 / 김순현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827면 / 3만 5,000원  
 
나치 치하라는 몰상식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 간 한 사나이에 금방 매료되고 말았다. 디트리히 본회퍼! 신학을 했던, 한다는, 하려고 하는 이는 누구든 들었던, 들어야만 하는, 그의 이름이다. 학창 시절 멋모르고 날뛰던 그때, <나를 따르라>, <옥중서신>, <윤리학> 등의 저자로 알고 있는 저항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그는 이제야 저자 에릭 메택시스의 수려한 문장의 도움으로 자신의 삶을 내 앞에 드러냈다.

부흥회가 있는 주간이라 길게 책을 잡고 있을 틈이 없었지만 새새 책을 읽으며 일주간 내내 이 사내와 호흡하며 그의 인생에 묻은 진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았다. 감히 남을 위한 삶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그의 신앙 정신은 이 시대 신앙을 취미로 아는 교인들에게 등불 하나 쥐어 준다.

인간, 디트리히 본회퍼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1906년 2월 4일, 아버지 카를 본회퍼와 파울라 본회퍼 사이에서 여덟 남매 중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귀족 출신으로 온 가족이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심지어는 토요일이면 가족 음악회가 열릴 정도였다. 루터교 집안으로 어렸을 때부터 신앙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란다.

본회퍼는 여행 또한 좋아했고 시를 쓰는 등 문학적 재질도 그의 책이나 서신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어머니 파울라 본회퍼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에 불과하다며 그런 게 바로 '싸구려 은혜'라고 가르쳤다. 후에 본회퍼가 '싸구려 은혜'라는 말을 유명하게 만든다.

튀빙겐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베를린대학교 졸업 때 '성도의 교제'란 졸업 논문으로 신정통주의의 거장 카를 바르트까지도 감탄하게 만든다. 25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보다 먼저 베를린대학의 신학부 강사로 임명을 받는다. 미국으로 건너가 유니언신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하는데 미국의 자유주의신학을 가치 있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1933년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나치의 독재와 국가사회주의에 항거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설교와 강연, 방송 연설을 통하여 독일의 제국교회가 침묵하거나, 히틀러에게 손뼉을 칠 때, 히틀러의 부당함을 말하다 제지당하기도 한다.

제국교회가 히틀러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권력자로 이해하고 있을 때 이에 반대하는 고백교회가 태동하게 되는데 본회퍼는 그 주요 멤버가 된다. 결국 그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1943년 4월 체포되어 수형 생활을 하다가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하여진다.

과감히 '싸구려 은혜'를 거부하다

본회퍼는 많은 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히고 학술적 의의를 갖기도 하지만, 로마를 여행할 때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씨름을 하는 등 그의 신학적 사고와 신앙적 삶에 보탬이 되는 여로였다. 본회퍼의 교회론은 한마디로, '보편적 교회', '개방적 교회'다.

"교회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독일이나 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96쪽)"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적 정체성이나 혈통에 제한을 받을 수 없다. 히틀러의 민족주의나 제국교회(당시 독일의 개신교)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교회론 때문이다. 그는 이런 교회에 대한 생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뛰어들어 헌신한다.

본회퍼를 많은 이들이 오해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주의 신학자일 거라고. 그렇지 않다. 이런 오해는 사회참여를 하는 이들이 자유주의 계열인 우리로서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교회론은 개방적이지만,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보다는 정통주의에 가깝다. 하르낙보다는 카를 바르트에 가깝다. 본문비평을 인정하지만 자신이 본문비평을 하지는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싸구려 은혜'는 철저히 배척한다. 죄에 대한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나,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설교는 철저히 배격한다. 고난 없는 신앙, 고백 없는 신앙,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신앙, 성육신의 실천이 없는 신앙, 삶이 없는 신앙은 모두 싸구려 신앙이라고 한다.

헬무트 괴스의 말처럼, 본회퍼가 '자유롭고 비판적이며 독자적인 신학'을 했지만, 바르트의 계시신학을 존중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역설하고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 계시를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이 전혀 알 수 없는 분이란 점을 본회퍼도 그대로 따른다.

본회퍼는 '싸구려 은혜'로 살 수는 없었던 사람이다. 그의 신앙은 성경적이고 실천적이며 신앙과 삶이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신앙과 신학과 삶이 일치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제국교회처럼 극악한 히틀러에게 충성 맹세를 할 수 없었던 것이요, 분연히 일어나 악과 대항했던 것이다.

본회퍼, 그에게서 예수를 보다

본회퍼는 실제로 목회를 했고 신학자로 배우고 가르쳤다. 사상가로 독일 국민에게 악의 실체를 알리는 데 힘을 다했고, 운동가로 몸으로 자신의 사상을 실천했다. 무엇보다 한 신앙인으로 신앙과 삶을 일치시킨 참제자다. 2000여 년 전 유대 땅에 예수가 있었다면, 100여 년 전 독일에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대에 남에 의해 생이 마감되는 것도 어찌 그리 닮았는지.

예수께서 당시 대제사장, 바리새인, 율법사들의 비뚤어진 신앙에 매스를 들이댔듯,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라며 제국교회를 호되게 나무랐던 본회퍼. 당시 교권주의자들과 정면 승부를 마다하지 않았던 예수나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와 야합했던 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님과 나치가 함께할 수 없음을 말한 본회퍼는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라는 종교는 결국 유대인 등 이방 민족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한다. 그러나 당시 제국교회는 그것이 아리안 신학의 정통성이라고 믿는다. 유대 민족주의에 대한 대항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굳게 믿는 독일 제국교회에 더 이상 소망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떨까. 여전히 예수 때나, 본회퍼 때처럼 정치와 야합하는 교권주의자들이 판을 친다.

국가사회주의자가 될지 그리스도인이 될지 당장 결단해야 한다는 게 본회퍼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루터교 기득권자들의 집단인 제국교회는 나치의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다. 그들은 기어이 히틀러와 함께하기로 한다.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에 성공했을 때, 전두환 정권이 그랬을 때 악수하며 잘해 보자고 하던 우리나라 교권주의자들이 떠오르는 건 왠지.

본회퍼는 결국 고백교회라는 참교회를 탄생시킨다. 동조하는 목사들과 함께 히틀러를 제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교회가 극악한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려 했다. 고백을 넘어 악을 제거하는 적극적 행동가로 활동한다. 그로 인하여 결국 게슈타포에게 체포되고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까지, 그는 신앙과 신학과 삶은 이렇게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떠났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묵상하고 그렇게 삶을 살아 낸 사람, 그가 본회퍼다. 오늘날 진짜와 가짜가 뒤바뀐 상황을 살아 내는 우리나라의 신앙인들이 꼭 본회퍼를 만났으면 좋겠다. 진짜라고 착각하는 가짜도, 진짜 가짜도, 진짜도. 진짜는 더 진짜답게 신앙을 삶으로 승화시켜야 하겠기에. 가짜는 자신이 얼마나 가증한 사람인지 깨달아야 하겠기에.

*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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