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십자가 대신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
"우리는 십자가 대신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
  • 김성회·박지호·윤영석
  • 승인 2011.09.12 19:51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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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10주년, 미국 교회 신학자, 목회자들의 시각

'9·11 테러'는 21세기 세계사의 주요 '변곡점'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사건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이내 세계는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전쟁으로 수십 만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갈수록 커지는 보복 테러 위협은 여전히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10년 동안 2차 세계대전과 맞먹는 전쟁 비용을 쏟아 붓느라 미국의 경제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고문까지 허용하고, 유엔의 승인도 없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 도덕적 위기까지 자초한 셈이다.

여기서 미국 교회는 '전쟁이 유일한 대안인가' 하는 비판적 물음 대신 '정당한 전쟁론'을 내세우며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테러의 '원인'은 묻지 않고, 보복의 정당성만 언급하며 미국 교회의 신학적 위기를 증명했다. 탁월한 실천 신학자로 꼽히는 윌리엄 월리몬은 "9·11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가장 큰 기독론적(christological) 패배로 되돌아볼 것"이라며 "우리는 십자가 대신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소저너스의 짐 월리스 대표 역시 "미국 역사에 가장 긴 전쟁이 우리를 공격한 폭력을 해결하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예일대 윤리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는 "미국은 하나님보다 더 큰 충성을 요구하는 강력한 여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꼬집었다. 에모리대학교의 토마스 롱 교수(설교학)는 "예수의 용서는 폭력의 한복판에서 터져나왔다"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응징과 보복을 정당화한 미국 교회를 비판했다.

911테러 10주년을 맞아 미국 사회에서는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스탠리 하우워스 교수, 브라이언 맥라렌 목사, 릭 워렌 목사 등 미국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를 <미주뉴스앤조이>가 추려봤다. (편집자)

"역사는 9·11에 대한 대응을 기독론적 패배로 돌아볼 것" (짐 월리스, 소저너스 대표)

   
 
  ▲ 짐 월리스 대표. ⓒ <미주뉴스앤조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있는 많은 이들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아래 고통 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미국 역사에 가장 긴 전쟁이 우리를 공격한 폭력을 해결하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데 실패했다고 본다.

미국은 테리리즘의 만행과 복잡성을 권력의 오만으로 대응했다. 아마도 이런 오만은 최근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출판 홍보에서 뻔뻔하게 드러난다. 그는 그가 참여했던 어떤 중요한 결정에 어떤 후회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다. 이 결정들은 9·11 후 10년 동안 세계를 나누고, 비인간화시키고, 위험한 장소로 만들었다. 새로운 기독교 세대는 예수라면 동일한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을지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 윌리암 윌리몬 감독이 <크리스차니티투데이>에서 한 말에 동의할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9·11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가장 큰 기독론적(christological) 패배로 되돌아볼 것이다. 사람들이 상처받았을 때, 우리는 십자가 대신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

9·11 이후 10년 동안 장성한 많은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갈등에 부딪치면서 정부가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해 손을 내민다. 이들은 테러리즘과 워싱턴 정가의 뒤틀리고 실패한 도덕 윤리의 전쟁을 거부하며 불의와 폭력에 관한 문제에 대안을 구축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혐오에 찬 비난에도 불구하고 몇몇 목회자들은 그들의 이웃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해 그들의 원수조차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신앙 전통의 차이점을 얼버무리지 않으면서 사랑과 화해의 하나님의 본질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다. 우리는 분쟁이 가장 많은 지역에서도 기독교인과 모슬렘이 평화롭게 함께 사는 모범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모슬렘 공동체의 선한 이웃이 되라고 요청할 것이다. (9월 8일자 <소저너스> 짐 월리스의 블로그에서 발췌)

'고문당한 하나님' 예배하는 자들이 고문을 옹호?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대 윤리학)

   
 
  ▲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예일대학교 윤리학). @ 예일대학교  
 
9·11의 정신적 외상의 결과로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어떤 잣대로 "더 나아졌다"고 가늠하는가. 2003년 39%의 미국인들은 이슬람과 모슬렘에 비호의적이었으나 2010년엔 그 숫자가 49%로 뛰어올랐다. 이런 증가 추세는 깊은 통찰력의 열매가 아니라 더욱 강해진 편견의 열매다. 편견은 거짓의 형태고, 거짓은 불의의 음험한 형태이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은 진실을 찾는 방법으로 고문을 용납한다. 2009년 설문조사에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의 54%와 60%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테러용의자에게 대한 고문의 정당화에 동의했다. 어떻게 "고문당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고문을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많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은 하나님보다 더 큰 충성을 요구하는 강력한 여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상숭배의 유형이다. 9·11은 영혼을 위한 도덕적 투쟁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나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악의 방식으로 악을 대항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보기로 제시된 삶 속의 도덕적 비전으로 반응적이기보단 긍정적으로 사는 길을 터득하길 바란다. (9월 7일자 <허핑턴포스트> 미로슬라브 볼프의 기사에서 발췌)

"예수는 심사숙고 끝에 용서한 것이 아니다" (토마스 롱, 에모리대학 설교학)

   
 
  ▲ 토마스 롱 교수. @ 에모리대학교  
 
9·11과 관련해 복음의 급진적이고 새로운 가르침은 우리가 단순히 용서하라고 권고 받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용서하라고 명령받았다. 이 모델은 예수 자신이다. 예수는 심사숙고 끝에 용서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폭력이 그에게 저질러지는 동안 용서를 선포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십자가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폭력의 한 복판에서 용서가 있었다.

용서란 폭력과 불의를 대충 넘기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용서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점차 목격할 수 있다. 기독교인과 모슬렘은 이제 더욱 가깝고 활발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서로 이야기하며 배우고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항상 신앙의 관점에서 국가적 사안을 논하는 역할을 맡아야한다. 오사마 빈 라덴의 암살이 복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민족주의적 복수극의 승리를 기뻐할 때, 신앙의 관점에서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 속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비극적인 면이 있음을 상기시켜야 한다. 나는 악과 불의를 밝히기보단 섭리의 역사 가운데 회복시키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길 원한다. (9월 2일에 있었던 PBS와의 인터뷰에서)

"무지함에서 돌이켜 예수의 비폭력의 지혜 품자" (존 디어 신부, 예수회)

   
 
  ▲ 존 디어 신부. ⓒ <미주뉴스앤조이>  
 
우리(미국)는 1991년 이래로 거의 빠짐없이 중동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에 참여했다. 우리는 세계에 창조적인 비폭력의 본보기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전쟁의 제국적 지배자다. 이것은 영속될 수 없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비폭력의 길만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눈 멀은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하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 탐욕과 전쟁의 길을 애써 외면한다. 이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깨어나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고 평화의 하나님께 되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 전 지구적인 풀뿌리 비폭력 운동을 구축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도리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9·11은 우리의 폭력, 탐욕, 전쟁발발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평화로 돌아서, 전 인류와 평화 가운데 생사를 같이 하도록 새로 준비하기에 좋은 날이다. 인생은 짧다. 우리의 무지함에서 돌이켜 예수의 평화, 사랑, 비폭력의 지혜를 품자. (9월 7일자 <내셔널가톨릭리포터> 존 디어 신부의 기사에서 발췌)

"죽이기보다 죽으려는 사람들이 교회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듀크대학 윤리학)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 ⓒ <미주뉴스앤조이>  
 
종종 새로운 세계통합주의라며 칭송받는 미국 제국주의는 두려운 권력 체제다. 무고한 이들에게 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을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주기 때문에 두렵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폭격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평화주의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이런 질문은 평화주의자들이 반드시 어떤 대안적인 외교정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평화주의자로서) 나는 어떤 외교정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훨씬 나은 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이기보다 죽으려는 사람들이 뭉친 교회다.

기독교인은 영웅이나 쇼핑객이 되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우리는 거룩하라고 부름 받았다. 거룩이란 개인적인 성취가 아니다. 거룩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정에 지배되는 삶을 거부한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살기 위한 '실천의 합'이다. 우리는 이런 (거룩한) 삶을 통해 우리의 비기독교 형제자매에게 (자기희생의) 죽음을 부정한 모든 정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 고백이야말로 희망이 없는 세상 속 희망의 신호라고 희망한다. 이것은 우리 평화주의자들이 9·11에 관한 어떤 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2001년 9월 11일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믿음을 증언하며 살아간다'고 답한다. 주후 33년, 부활절의 축제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Dissent from the Homeland: Essays after September 11>에서 발췌)

"9·11, 이방인들이 소통하는 기회 되길" (바트 캠폴로 국제 담당 코디네이터, 9·11워크)

   
 
  ▲ 바트 캠폴로. ⓒ Michael Wilson (출처: www.bartcampolo.com)  
 
9·11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사는 신시내티 시에서 나는 부인과 함께 모슬렘, 유대인 회당에 전화를 걸어 함께 걸을 것을 제안했다. 걷는 목적은 단순하다. 이웃들과 혹은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며 공통의 인간성에 대해 확인하고 공포와 오해와 증오 따위는 날려버리기 위함이다.

만약 9월 11일이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모슬렘과 서로의 경계선을 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함께 걷는 날이 된다면 멋있는 일이 되지 않겠나? 마틴 루터 킹의 날이 공동체 봉사의 날로 자리 잡은 것처럼 말이다.

9월 11일이 돼서 모스크와 교회와 회당 등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나와 그룹을 지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되겠나. 이런 걷기를 통해 9/11을 기억하고 낯선 이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소통하는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레드 레터 크리스찬 기고 글에서 인용)

 

"구약에서 금한 돼지고기는 먹으면서 전쟁은 왜 하나?"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

   
 
  ▲ 브라이언 맥라렌. ⓒ 미주뉴스앤조이  
 
구약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9·11 10주년을 맞아 대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질문이라 생각했다. 질문에 대답을 하기보다 내가 지난 일 주일 동안 가졌던 질문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과 구약의 전쟁에 대한 믿음이 무엇이든 간에, 또 지난 10년간 지속되어온 "테러리즘과의 전쟁"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됐는가에 대해 우리가 가진 의견이 무엇이든 간에 더 중요하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앞으로 올 10년이 어떤 10년이었으면 하고 바라는가? 더 중요하게는 예수님의 삶과 인생이 앞으로 10년간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할례"를 꼭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쳤는데 왜 사도 바울은 그것이 꼭 핵심은 아니라고 한 것일까? 하나님은 "안식일"을 엄수하라고 가르쳤는데 왜 예수님은 그것이 요점이 아니라고 말한 것일까? 하나님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 것을 포함해 많은 목록을 주셨는데, 그 식단이 왜 지금은 사라진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전쟁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2012년 9월에 출판될 나의 새 책 <예수, 모세, 부처, 모하메드가 바에 들어서다>에서 성경과 호전성과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 블로그)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을 탓하라" (릭 워렌 목사, 새들백교회 담임)

   
 
  ▲ 릭 워렌 목사. (자료 제공: 새들백교회)  
 
9·11이라는 끔찍한 학살을 목격한 우리는 모두 깊은 상처가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러니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그냥 두신 걸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하나님이 그토록 크고 좋으신 분이라면 왜 사람끼리 서로를 다치게 그냥 두시는 걸까?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자 재앙에 그 답이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동물과 우리를 구분하는 지점임과 동시에 많은 고통을 불러오는 원인이기도 하다.

죄악이란 결국은 이기심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죄는 단지 나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까지 다치게 만든다. 간단하게 가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의 능력을 박탈하시기만 하면 세상의 악은 없어질 것이다. 우리를 그저 꼭두각시처럼 만드실 수도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꼭두각시가 되길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그를 사랑하길 원했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길 원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이웃과 사랑하길 바랐던 것이다.

하나님이 테러리스트들의 자살 공격을 막으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의 마음을 조종하셨다면 테러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하나님은 그 능력을 우리에게도 쓰셨을 것이다. 우리야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우리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은 드물게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 9·11 참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을 때 귀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 탓을 해라.

9·11 직후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 났었다. 재앙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기 마련이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을 목격한 수백 만의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오, 신이시여(Oh, God)!"였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길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의 슬픔 속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방향을 보여주실 계획을 다 가지고 계시다. 하지만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릭 워렌 목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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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2011-09-15 08:28:46
몇마디 더 하자면

바트 캠폴로는 진보주의 기독교를 주창하는 목사입니다. 그는 현대의 다원주의에 충실해서 예수 외에도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또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성경이 완전한 신의 계시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신학은 어찌 보면 완전히 짬뽕 신학입니다. 복음주의, 신복음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신정통주의 등의 혼합적 신학체계를 지니고 있는 기독교 운동의 리더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주뉴스앤조이가 이런 목사의 신학적 이념을 제대로나 알고서 기독교계의 리더라고 소개하고 있는지는 궁금하기만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대부분 복음주의를 가장한 근본주의 기독교인데 그런 근본주의자들의 눈에는 이단이라고 불리울 수 밖에 없는 캠폴로 같은 사람을 의견을 내보낼 때에는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신앙적 색깔 정도는 검토해보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9/11 사태를 보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화충돌이라고 보던 초기의 분석에 대하여 잘못된 분석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왔지만 역사의 흐름을 먼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바른 평가를 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정치적 형태가 완전히 발달되지 못해서 영주들의 권력이 국가의 주권을 넘볼 수 있던 때에는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그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서 서구 문명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1-12세기를 지나면서 서구의 국가들이 조금씩 중세봉건주의의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16-17세기가 되면서 국가의 지리적 영역은 물론이고 그 체제까지 완전하게 발달합니다. 따라서 국가는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종교의 힘을 구합할 필요가 없게 되고 그런 정치적 상황이 사회에 발효되면서 기독교는 정치와 갈들을 잃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 상황은 종교 개혁이 발생할 여건을 만들게 된 것이고 마키아벨리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정치론의 기준이 서구 사회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역사의 변화는 국가의 주권의 독립적 권위의 형성을 향해 달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국가간의 지리적 경계는 무의미하게 되고 경제적 팽창을 위한 통합 시나리오가 등장합니다. 우럽연합이 그것이고 각 대륙 내에서의 무역협정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더 이상 국가와 국가의 차이는 근세적인 의미를 완전히 주장할 수 없는 것이 세계의 변화의 주도적 물결입니다. 따라서 9/11은 이런 변화의 물결에 따라 미국이 아랍권과 아랍권을 통하여 유럽권을 견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사건이고 이 사건을 이런 식으로 바로 분석한 미 정부는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아랍권을 먼저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흐름속에서 전쟁이니 테러니 하는 것들은 단지 수단이고 도구일뿐입니다.

이 시대에는 전쟁은 더 이상 국가의 국경을 지키거나 혹은 적국의 자원을 획득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국가의 공권력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버린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전쟁은 윤리라는 것과는 관계없는 국가 존립을 위한 정당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어떤 전쟁을 해도 그 명목을 국민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여론 조작이나 선동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고 또 풍부한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하지 말라고 시위하고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기에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는 행위는 아무런 변화도 불러오지 못합니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위해 국민이 도구로 훈련받고 필요한 자원의 역할을 하는 국가조직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국가는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이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시민운동가가 아무리 떠들어도 구조 자체가 사용하지 않고는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기독교인을 떠나서 현대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이런 사실들에 대하여 눈을 떠야 하는 것이고 지식인이나 운동가들은 이런 역사적 상황의 전개와 함께 그것을 바로 보여줄 수 있는 역사관을 가져애 하는 것입니다.

9/11은 어떻게 보면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이나 모두 패자로 만든 사건입니다. 아직도 9/11의 주범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미궁의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전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 라덴의 소행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9/11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전세계의 소시민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생존을 위해 살인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살인의 근원부터 제대로 볼 줄 아는 자가 예수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했었는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를 원하면서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기사에서 언급된 사람들처럼 빙산의 일각만 보고 세상을 평가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톰 2011-09-14 05:51:58
저희 동네에 맨날 맨날 퉁탕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집이 있었더랬습니다. 그집 아자씨가 얼매나 힘이 세고 난폭하던지 날이면 날마 다 맘에 안든다며 여편네도 패고 애들도 패고 그러니 아이고대고 곡성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요...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이고 저 집에 일본도도 있고 권총도 있다는지 저집 사람들 다 죽게 생겼네..."그러며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그러던 언날 이를 지켜보며 짐짓 인내하는 듯 하던 풋볼선수출신 아자씨가 그 집에 '흉기'가 있다며 경찰에 신고했는데요... 웽웽 백차가 와서 바깥살림 안살림 다 센타를 쳤는데 아무것도 없었고, '혐의 없다'며 그냥 물러갔지요... 이를 분 풋볼 아자씨가 '뭐 이런놈의 경찰이 있어...'그러며 워커끈 바짝매고 언날 그집에 들어가서는 주인장 아자씨를 찾아내 신나 두들겨 패고 밖에 내동댕이 쳤답니다. 대부분 동네사람들 하는 야그 "아이고 고놈 잘됐네!'그랬고, 일부는 "그래도 경찰에게 맡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배?"하기고 했지요... 그래도 우주알 공론은 '뭐 그런 싸가지 없는 가장은 죽어도 싸지' 그랬답니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답니다... 그 풋불 아자씨는 '그 집 체질을 아예 바꿔야 한다'며 그 집에 죽치고 앉아서는 그집 애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식구들도 네편 내편 갈라놓고 싸우게 만들었지요... 이걸 본 동네 사람들은 "마귀 하나 쫓아냈더니 입곱마귀가 들었군!" 그런 말로 수근대기 시작했더랍니다. 그래도 주야장천 눌러앉아 '감놔라 배놔라' 그러다 언날 동네사람들의 걱정스런 시선에 더 못견딘 풋볼 아자씨가 손 탁 털고 그집을 나오며 한 말 "이집 그래도 내 덕분에 쪼끔은 조용해 졌다, 훗날 날 매우 고마워 할꺼구만" 그랬더라는 옛날 야그 입니다. 끝.

Man 2011-09-13 15:08:17
미주뉴스앤조이가 선정한 미국 교회 지도자들?

스탠리 하우워스, 브라이언 맥라렌, 릭 워렌, 짐 윌리스, 미로슬라브 볼프, 토마스 롱, 존 디어, 바트 캠폴로.... 이 사람들이 미국 기독교의 지도자라고? 게다가 부제를 보니 '신학자들의 시각'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미국의 신학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신학자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네.

짐 윌리스나 릭 워렌은 별 설명이 필요 없는 자들이고 맥라렌은 이머징 교회니 뭐니 하면서 시대의 조류를 타면서 대중에게 기독교를 몽상적 종교로 주입시키는 일에 소질을 보여주고 있는 자라는 것 쯤은 원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텐데.

게다가 윤리학 교수 두 사람을 등장시키고는 기독교의 목소리인양 소개하는 것이 고개를 가우뚱하게 만든다.

하기야 이런 사람들보다도 못한 것이 한국의 목사들의 수준이니 그래도 이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릭 원렌의 말을 다시 적어 본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을 목격한 수백 만의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오, 신이시여(Oh, God)!"였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길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의 슬픔 속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방향을 보여주실 계획을 다 가지고 계시다. 하지만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사람들이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Oh, God!"이라고 했을까? 혹 그들이 말한 "Oh, God!"이란 한국 사름들이 흔히 말하는 "아이고 맙소사!"와 달랐을까? 그랬다면 그들에게 신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인간의 의지와 선택을 가지고 그는 말 장난을 하고 있다.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는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가 발현한 이후에 모든 철학자들이 동의하는 문제이다.

왜 선한 사람이 그런 9/11과 같은 일 때문에 고통 가운데 죽어야만 하는가? 신은 인간이 스스로 신을 선택하여 신에게 다가가기를 원해서 인류 역사 가운데 그렇게도 많은 전쟁과 폭력을 허락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목숨을 잃는 것을 허용했단 말인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신에게로 돌아갔는가?

앞으로 인간 세상에 얼마나 더 많은 폭력이 있고나서야 신은 인간의 폭력에 대하여 개입할 것인가?

인간은 정말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맺어진 존재일까?

정말 그럴까?

릭 워렌의 말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의 수만 증가시킬뿐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통해 엄청난 돈을 거머쥔 그에게는 당연하겠지만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가 말한 내용이 얼마나 먹혀들어갈지는 의심스럽다.

9/11 사건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라는 것이 어떻게 들려질까?

남의 고통을 가지고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용기가 참 가상할 따름이다.

이 기사에서 한마디씩 던진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슬람에 대하여 기독교가 보다 더 관대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며 그들보다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처럼 위선을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조국인 미국의 죄악에 대하여 비판의 언사를 내뱉고 있지만 적정선의 위험 수위는 지키면서 자신들이 마치 진보적이고 진정한 애국자이며 자유와 정의를 기독교의 이름 아래 수호하는 자처럼 말이다.

이들 가운데 9/11 이후에 미국이 전쟁을 선포할 때에 비폭력과 대화와 포용과 용서를 말하며 미국 정부에 대항하였는가?

9/11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태러단체의 소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에 의해 몇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미국은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군대가 동원하여 테러와 관련도 없는 한 국가의 선량한 국민들을 죽음으로 그리고 공포로 수년간 몰아넣었다.

이들이 십자가 대신에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고 말하며 기독론적 패배를 시인하는 모습을 보인다고해서 기독교의 정신이 되살아난다고 생각하는가?

기독교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죄를 짓고는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에 오히려 상대가 마치 먼저 죄를 지은 것처럼 행동하고 자신은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관용과 아량을 지닌 것 처럼 위선을 행하였다.

기독교는 이런 부분부터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이 역사는 10년 100년 의 일이 아니다.

16세기의 네덜란드의 도르트 회의를 보아도 그렇고 중세의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그리고 2-3세기의 정통주의자들의 무소불위적 종교 폭력을 볼 때에 기독교의 발생 이래로 역사에서 끊이지 않았다.

전 인류를 부패한 기독교적 교리를 바탕으로한 문화적 헤게모니를 즐기는 동안에 인류의 역사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시인하라는 말이다.

아래 아톰님은 "윌리엄 윌리몬 교수가 '우리는 십자가 대신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며 미국 보수교회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구호라는 생각이 듭니다. "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이것은 미국 보수주의 교회의 영적 상태가 아니라 기독교가 초기부터 지녀 온 배타주의를 버리지 않는한 영원히 지속될 종교적 이데올로기 인 것이다.

정치적 확장을 위하여 팽창주의를 주장하던 중세의 정치의 등에 엎혔던 로마 카톨릭이나 그 이후 팍스 로마나의 제국주의적 영광의 부활을 꿈꾸는 미국의 힘에 편승하려는 기독교적 이데올로기란 말이다.

문화적 헤게모니의 사슬을 끊어버린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죽어가듯이 미국도 유럽과 같은 사상적 변화의 물결이 점령하게되면 그 때에는 이런 식의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의 종교적 윤리를 가장한 행동은 누구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완전히 판을 뒤엎고 새로 짜는 것이다.

헐리우드 액션 같은 말 가지고 용서란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말라.

용서는 기독교에서 펼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의 첫 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