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는 21세기 세계사의 주요 '변곡점'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사건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이내 세계는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전쟁으로 수십 만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갈수록 커지는 보복 테러 위협은 여전히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10년 동안 2차 세계대전과 맞먹는 전쟁 비용을 쏟아 붓느라 미국의 경제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고문까지 허용하고, 유엔의 승인도 없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 도덕적 위기까지 자초한 셈이다.
여기서 미국 교회는 '전쟁이 유일한 대안인가' 하는 비판적 물음 대신 '정당한 전쟁론'을 내세우며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테러의 '원인'은 묻지 않고, 보복의 정당성만 언급하며 미국 교회의 신학적 위기를 증명했다. 탁월한 실천 신학자로 꼽히는 윌리엄 월리몬은 "9·11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가장 큰 기독론적(christological) 패배로 되돌아볼 것"이라며 "우리는 십자가 대신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소저너스의 짐 월리스 대표 역시 "미국 역사에 가장 긴 전쟁이 우리를 공격한 폭력을 해결하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예일대 윤리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는 "미국은 하나님보다 더 큰 충성을 요구하는 강력한 여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꼬집었다. 에모리대학교의 토마스 롱 교수(설교학)는 "예수의 용서는 폭력의 한복판에서 터져나왔다"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응징과 보복을 정당화한 미국 교회를 비판했다.
911테러 10주년을 맞아 미국 사회에서는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스탠리 하우워스 교수, 브라이언 맥라렌 목사, 릭 워렌 목사 등 미국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를 <미주뉴스앤조이>가 추려봤다. (편집자)
"역사는 9·11에 대한 대응을 기독론적 패배로 돌아볼 것" (짐 월리스, 소저너스 대표)
▲ 짐 월리스 대표. ⓒ <미주뉴스앤조이> | ||
미국은 테리리즘의 만행과 복잡성을 권력의 오만으로 대응했다. 아마도 이런 오만은 최근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출판 홍보에서 뻔뻔하게 드러난다. 그는 그가 참여했던 어떤 중요한 결정에 어떤 후회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다. 이 결정들은 9·11 후 10년 동안 세계를 나누고, 비인간화시키고, 위험한 장소로 만들었다. 새로운 기독교 세대는 예수라면 동일한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을지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 윌리암 윌리몬 감독이 <크리스차니티투데이>에서 한 말에 동의할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9·11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가장 큰 기독론적(christological) 패배로 되돌아볼 것이다. 사람들이 상처받았을 때, 우리는 십자가 대신 성조기에 손을 뻗었다."
9·11 이후 10년 동안 장성한 많은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갈등에 부딪치면서 정부가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해 손을 내민다. 이들은 테러리즘과 워싱턴 정가의 뒤틀리고 실패한 도덕 윤리의 전쟁을 거부하며 불의와 폭력에 관한 문제에 대안을 구축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혐오에 찬 비난에도 불구하고 몇몇 목회자들은 그들의 이웃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해 그들의 원수조차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신앙 전통의 차이점을 얼버무리지 않으면서 사랑과 화해의 하나님의 본질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다. 우리는 분쟁이 가장 많은 지역에서도 기독교인과 모슬렘이 평화롭게 함께 사는 모범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모슬렘 공동체의 선한 이웃이 되라고 요청할 것이다. (9월 8일자 <소저너스> 짐 월리스의 블로그에서 발췌)
'고문당한 하나님' 예배하는 자들이 고문을 옹호?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대 윤리학)
▲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예일대학교 윤리학). @ 예일대학교 | ||
미국인의 절반 이상은 진실을 찾는 방법으로 고문을 용납한다. 2009년 설문조사에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의 54%와 60%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테러용의자에게 대한 고문의 정당화에 동의했다. 어떻게 "고문당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고문을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많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은 하나님보다 더 큰 충성을 요구하는 강력한 여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상숭배의 유형이다. 9·11은 영혼을 위한 도덕적 투쟁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나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악의 방식으로 악을 대항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보기로 제시된 삶 속의 도덕적 비전으로 반응적이기보단 긍정적으로 사는 길을 터득하길 바란다. (9월 7일자 <허핑턴포스트> 미로슬라브 볼프의 기사에서 발췌)
"예수는 심사숙고 끝에 용서한 것이 아니다" (토마스 롱, 에모리대학 설교학)
▲ 토마스 롱 교수. @ 에모리대학교 | ||
용서란 폭력과 불의를 대충 넘기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용서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점차 목격할 수 있다. 기독교인과 모슬렘은 이제 더욱 가깝고 활발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서로 이야기하며 배우고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항상 신앙의 관점에서 국가적 사안을 논하는 역할을 맡아야한다. 오사마 빈 라덴의 암살이 복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민족주의적 복수극의 승리를 기뻐할 때, 신앙의 관점에서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 속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비극적인 면이 있음을 상기시켜야 한다. 나는 악과 불의를 밝히기보단 섭리의 역사 가운데 회복시키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길 원한다. (9월 2일에 있었던 PBS와의 인터뷰에서)
"무지함에서 돌이켜 예수의 비폭력의 지혜 품자" (존 디어 신부, 예수회)
▲ 존 디어 신부. ⓒ <미주뉴스앤조이> | ||
우리는 눈 멀은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하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 탐욕과 전쟁의 길을 애써 외면한다. 이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깨어나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고 평화의 하나님께 되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 전 지구적인 풀뿌리 비폭력 운동을 구축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도리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9·11은 우리의 폭력, 탐욕, 전쟁발발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평화로 돌아서, 전 인류와 평화 가운데 생사를 같이 하도록 새로 준비하기에 좋은 날이다. 인생은 짧다. 우리의 무지함에서 돌이켜 예수의 평화, 사랑, 비폭력의 지혜를 품자. (9월 7일자 <내셔널가톨릭리포터> 존 디어 신부의 기사에서 발췌)
"죽이기보다 죽으려는 사람들이 교회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듀크대학 윤리학)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 ⓒ <미주뉴스앤조이> | ||
기독교인은 영웅이나 쇼핑객이 되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우리는 거룩하라고 부름 받았다. 거룩이란 개인적인 성취가 아니다. 거룩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정에 지배되는 삶을 거부한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살기 위한 '실천의 합'이다. 우리는 이런 (거룩한) 삶을 통해 우리의 비기독교 형제자매에게 (자기희생의) 죽음을 부정한 모든 정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 고백이야말로 희망이 없는 세상 속 희망의 신호라고 희망한다. 이것은 우리 평화주의자들이 9·11에 관한 어떤 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2001년 9월 11일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믿음을 증언하며 살아간다'고 답한다. 주후 33년, 부활절의 축제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Dissent from the Homeland: Essays after September 11>에서 발췌)
"9·11, 이방인들이 소통하는 기회 되길" (바트 캠폴로 국제 담당 코디네이터, 9·11워크)
▲ 바트 캠폴로. ⓒ Michael Wilson (출처: www.bartcampolo.com) | ||
만약 9월 11일이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모슬렘과 서로의 경계선을 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함께 걷는 날이 된다면 멋있는 일이 되지 않겠나? 마틴 루터 킹의 날이 공동체 봉사의 날로 자리 잡은 것처럼 말이다.
9월 11일이 돼서 모스크와 교회와 회당 등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나와 그룹을 지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되겠나. 이런 걷기를 통해 9/11을 기억하고 낯선 이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소통하는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레드 레터 크리스찬 기고 글에서 인용)
"구약에서 금한 돼지고기는 먹으면서 전쟁은 왜 하나?"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
▲ 브라이언 맥라렌. ⓒ 미주뉴스앤조이 | ||
앞으로 올 10년이 어떤 10년이었으면 하고 바라는가? 더 중요하게는 예수님의 삶과 인생이 앞으로 10년간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할례"를 꼭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쳤는데 왜 사도 바울은 그것이 꼭 핵심은 아니라고 한 것일까? 하나님은 "안식일"을 엄수하라고 가르쳤는데 왜 예수님은 그것이 요점이 아니라고 말한 것일까? 하나님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 것을 포함해 많은 목록을 주셨는데, 그 식단이 왜 지금은 사라진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전쟁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2012년 9월에 출판될 나의 새 책 <예수, 모세, 부처, 모하메드가 바에 들어서다>에서 성경과 호전성과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 블로그)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을 탓하라" (릭 워렌 목사, 새들백교회 담임)
▲ 릭 워렌 목사. (자료 제공: 새들백교회) | ||
죄악이란 결국은 이기심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죄는 단지 나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까지 다치게 만든다. 간단하게 가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의 능력을 박탈하시기만 하면 세상의 악은 없어질 것이다. 우리를 그저 꼭두각시처럼 만드실 수도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꼭두각시가 되길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그를 사랑하길 원했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길 원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이웃과 사랑하길 바랐던 것이다.
하나님이 테러리스트들의 자살 공격을 막으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의 마음을 조종하셨다면 테러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하나님은 그 능력을 우리에게도 쓰셨을 것이다. 우리야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우리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은 드물게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 9·11 참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을 때 귀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 탓을 해라.
9·11 직후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 났었다. 재앙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기 마련이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을 목격한 수백 만의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오, 신이시여(Oh, God)!"였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길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의 슬픔 속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방향을 보여주실 계획을 다 가지고 계시다. 하지만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릭 워렌 목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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