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길'
'낙타의 길'
  • 김영민
  • 승인 2011.10.01 10:25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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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1) A 장로의 독실함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A는 기독교인이다. 그는 최소한 지난 10년간 한 차례도 주일 대예배에 빠진 적이 없으며, 40대의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십일조가 성에 차지 않아 십이조(十二租)를 한 지도 7년 째에 접어든다. 수요일 저녁 예배에도 단골인데다, 매달 한 번 정도는 금요 철야기도회에서 찬양 인도를 맡아 자신의 성가(聲價)를 높이기도 한다. 참, 그는 옹골지게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다소 서둘러 밝히자면 이 독실(篤實)은, 옛 글에 흔히 보이는 독행(篤行)이나 독지(篤志)가 품은 늬앙스를 배신한다. 간단히 말해 그의 종교 이데올로기는 실존적 반조(返照)에 이르지 못한 채 상상적 지식(meconnaissance)과 습관의 상식에 의해 규제된 것이다. 그의 종교는 습속이 되었고, 그래서 꼭 그 습속만큼 충실하지만, 그 습속이 생성되는 지점을 반성적 실존의 선택과 일치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자고로 경전을 읽어 터득한 보람의 덕으로 신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팔만대장경을 독파한 후에 불제자가 되는 게 아니며, 예수의 말씀을 해독한 후에 교회에 출석하는 게 아니다. 무수한 사람들은 그저 이슬람교도로 태어나는 것이며, 다만 인접성으로 인해 유대교도로 길러질 뿐이다. 특히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주관성을 밑절미로 삼은 개신교의 경우에 이 사실은 매우 특징적이다. 신학이야 어떠하든, 실상 그들은 경전이라는 매개가 아니라 마음(신앙양심)이라는 무매개의 지름길을 최종심급으로 삼는다. 그래서 언필칭 ‘말씀의 종교’라지만, 실상 개신교인들의 신념이 융통되는 방식은 언어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이며, 그 종교적 지식은 상징적 교환의 변증법에 의해 벼려지지 못한 채 상상적으로 결절하기 쉽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제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이후에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믿지 않고는 사유(공부)할 수 없는 한국 신학의 독특한 풍경이 연출된다. 전술했듯이 성경을 읽고 그 문자적 진리를 납득·수용한 뒤에 예수(하나님)를 믿는 게 아니라, 먼저 믿고 그 믿음에 살을 붙이거나 혹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정당화하는 과정이 곧 신학하는 행위로 표현되는 셈이다. 나는 이 땅의 교회 안팎을 오랫동안 바장이는 중에 성경을 하나의 텍스트로 정밀하게 독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앙을 얻는 사람을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다. 내가 과문한 탓이기도 하겠으나, 한국의 개신교 세계에서 그같은 신자들의 수를 의미있는 통계치로 기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겪은 흥미로운 경험은, 문자의 간접성이 아니라 마음(심리)의 직접성에 의해 신앙생활의 근원과 토대(fons et origo)를 얻는 한국의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신앙이 없이 신학을 공부하던 몇몇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는 다음 기회로 돌리기로 하자.

아무튼 우선 마음으로 감(感)한 것을 이후의 제도적 교회생활이나 설교적 보충을 통해 이론화·정당화하는 관행은 신앙이 실존적 반조의 선택을 생략한 채 생활의 습관으로 굳어지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믿기에 존재한다(credo ergo sum)'가 아니라 ‘사유·의심해서 존재한다(cogito/dubito ergo sum)’는 변침(變針)을 통해 근대적 주체화의 철학적 논리를 설명하곤 하는 데서 보듯이, 잘라 말하자면, 그들의 경우에는 신앙의 ‘주체(화)’에 이르는 노역이 없거나 적은 셈이다. 주체화의 중요한 한 갈래는, (한나 아렌트 등의 지론처럼) ‘당대의 지배체제와 불화하는 정신의 수위와 근기’를 통해 결절하는 법이고, 우리의 스승인 예수야말로 당대의 지배구조와 불화하는 (동무)공동체적 결기 속에서 운신하며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펼쳐보인 바 있으니, 세속의 상식과 달리 실로 주체화의 노역이야말로 신앙의 알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번에) 올바르게 말하지 못하므로 주체가 된다’는 정신분석의 명제는, 과오와 개선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내부의 불안과 의심을 다스리며 쉽없는 재투기(再投己)의 노동을 통해서만 주체화의 길이 열린다는 뜻으로, 겉보기와는 달리 그저 평심한 상식을 재서술한 것일 뿐이다. 세속의 체계에 무지한 채 오직 자신의 심리에서 출발하는 부르주아지의 보수주의로는 신심의 주체화가 가능하지 않다. 혹은 좌익 극단주의이든 종교 근본주의이든, 단답식의 정서적 고착으로는 신사(愼思)도 명변(明辯)도 독행(篤行)도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주체가 아니라 경직된 에고 속에 머물 뿐이다. “자아없는 반복, 즉 단순한 행동의 끝없는 반복을 통해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는 것, 거기에 종교가 주는 쾌락이 숨어 있”(권재현)다는 뼈아픈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습관이 된 신앙은 ‘단번에 올바르게 말해버리’며, 따라서 주체화의 노역 대신 이데올로기의 체제에 손쉽게 호명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정과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

A는 40대 후반의 약사로 근동(近洞)에서나마 명망이 높아 성업(盛業)으로 제법 치부(致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성실하게 환자들과 소비자들을 대하였으며, 그 댓가로 얻는 재력은 그의 가정을 돌보고, 대학생 딸 둘과 중학생 아들 하나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며, 그가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서 리더로서 냅뜰성있게 활동하고, 지역 사회에서 그 나름의 상징적 권력을 얻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교회에서도 돈은 있어야 사람구실을 해!’라는 내 어머니의 지론은 A의 경우를 통해서도 쉽사리 확인되는 셈이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새로운 낙타들의 등장일 것이었다. 그러나, 여담이지만,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로 꿈을 엮던 낙타”(‘그 때 낙타가 들어왔다’, 허수경)는 아니었다.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어려움이 그저 과거의 우화(寓話)로 실종된 일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베버(M. Weber)가 원칙(‘이념’)적으로 해명해 놓은 것처럼, 자본제적 세속과 그 합리적 노동은 개신교의 인준을 얻었고, 이후 상인 기독교는 초기 상인자본 특유의 근실성과 합리성을 내재화, 체질화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근현대 기독교가 번성하는 데에서 그 알짜를 이루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베버가 소상하게 해설한 것처럼 자본제적 세속의 구조변동에 떠밀린 목회공간은 그 변화한 사회적 노동과 재생산의 현실을 사후적으로 인준, 정당화하는 데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증여의 세계인 종교가 화폐교환의 세속에 대한 규제적 이념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는데, 실은 바로 이 무능과 태만이 미래 기독교의 가장 큰 재앙이 될 것이다.)

독실한 상인들은 비록 몰양심적으로 번 돈이라도 교회에는 양심적으로 돈을 바쳤고(가령,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되뇌었던 ‘지행합일’의 유교윤리적 이상과 달리 현실 기독교인의 상인 윤리는 종교의례적 최종심급에 의해 행복하게 분열된다), 교회는 그들의 돈과 노역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주다 못해 축원해 주었다. 부실한 개인의 양심이 집단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봉합되는 양식은 ‘실존적 반조’없는 당성(黨性)의 전형인 것이다. 이를테면, 졸부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부(富)는 그 부의 현실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법이다. 끝끝내 ‘상징적 존재’인 인간은 매사에 의미와 권리원천을 추구하며, 따라서 부자들은 부의 현실을 넘어 ‘부의 권리’까지 원하기 마련이다. 쉽게 예시하자면, 자고로 졸부는 새로 생긴 그 돈의 현실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법이며 반드시 그 현실이 자신에게 합당하다는 응보의 윤리까지 전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귀족들을 대체한 근대 부르주아지 계층에게는 귀족들과 달리 부의 현실과 부의 권리를 끝내 일치시키지 못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바로 이 콤플렉스를 해소시켜준 이데올로그들이 당대 개신교의 목회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잘 알려진 베버의 결론처럼, 상인 자본주의와 개신교 정신 사이의 친화성은 우연적이었으며, 후자는 전자가 중심을 이루면서 급속히 변화하고 있던 사회변동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우리의 독실한 A는 교회에서 재무부장으로 근실하게 봉사해 오고 있다. 그가 바치는 평소의 헌금액은 300명 교인 중에서 단연 꼭대기에 속하며 지난 해에는 해마다 늘어가는 노인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한 대에 수백만 원에 이르는 자동안마기 3대를 구입해서 교회에 헌납하기도 하였다. 교회 당국은 어느 수요 예배 중 별정의 격식을 갖추어 자동안마기 봉헌식을 거행하였는데, 의식(儀式) 중에 잠시의 시연(試演)까지 곁들여졌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A의 손이 마이더스의 그것이라고 추겨세웠고, 그 권리원천으로 신의 축복을 경건하게 지목했다.

순진한 예수(Jesus)라면 그리스도(Christus)가 세속의 권력(Caesar)과 열매를 축복하리라고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의 기독교’는 그런 식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권력과 사통하면서 자본이 애초부터 국가와 통혼(通婚)한 사실을 우리는 안다. 예를 들어 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국가의 문제를 조금 더 진지하게 사유하지 못한 채 ‘국제화’에 서두른 실책을 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급진성과 그 공동체적 생산성은 애초부터 권력의 자장에서 제외되면서 소수화하고 말았다는 사실도 안다. 마찬가지로, 예수 동무공동체의 아나키즘적 급진성(‘네 가족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도 중세의 카톨릭 제국-체제 속에서 아득히 몰각해 버렸다. 그런가 하면, 21세기의 한국 개신교회는 예수의 첫닭울이와 같은 메시지를 까마득히 잊은 채 강박적으로 붙들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기껏 ‘가족주의’다. 그리고 그 가족주의가 권력과 자본과 남성주의의 단말기로 기능한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제대로 지적되지 않는다.

'삼성' 재벌가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자본(기업)이 권력(국가)을 업거나 혹은 거기에 업히는 일은 우연한 사건사고가 아니라 ‘역사-체계적’(W. 월러스틴)인 필연성에 가깝다. 그러니까, 가령 이명박이라는 기업가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건은, ‘잘 살게 해주겠다’는 소식에 대한 개인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기 이전에, 최소한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나마 자본과 국가가 ‘구조적’으로 사통해온 갈래 속에서 한 분수령을 이룬 사건인 셈이다. 여기에 덧붙여 만약 소망교회 장로인 이명박씨가 자신의 세속적 성취와 영달을 (명개 먼지 한 알 만큼이라도) 그가 믿는 신의 뜻이라고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국정(國政)의 일차적인 책임자라는 그의 공적 자의식이 자신의 사적 신앙양심과 엇섞인다면, 그 역시 “돈(권력)의 현실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법이며 반드시 그 현실의 권리원천을 전유하려고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스스로를 ceo로 여기는 이명박 씨가 증거하듯이) 국가는 대자본의 현실을 돕는 안전망이자 심지어 여리꾼 노릇을 하고, 종교는 자본의 성취와 번영에 대해 뒷북을 치며 축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국가와 자본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데, ‘하나의 체계(세계)는 신화라는 지평의 테두리를 통해 완결된다’(니체)라는 격언 속의 ‘신화’를 종교(개신교)에 대입시켜 보면, 주중의 근실한 노동과 주말의 충량한 믿음을 통해 마침내 자본제적 삶의 형식을 완결시키는 종교의 역할을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요량할 수 있다. (그렇다면, A의 독실은 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성격은 무엇일까?)

그러나, 예를 들어, 히틀러(‘체계’) 탓에 살해(‘사건’)당한 이들을 장례하거나 고작 애도하는 게 사제(司祭)의 노릇일 수 없다는 본 훼퍼(D. Bonhoeffer)의 신념은 단지 특정한 역사적 파시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세속의 지배적 체계를 겨냥하는 종교 수행자의 일반 이념으로 제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 볼 때, 상인 기독교, 기업 기독교, 그리고 재벌 기독교의 시대에 재부(財富, mammon)가 이룬 성취의 성격과 가치는 어떻게 평가되고 자리매김되어야 할까? 그의 목사가 A의 화폐적 성취를 신의 뜻이자 축복이라고 추겨세웠듯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단지 한 체계를 완결시키는 신화의 지평이 될 뿐으로 조찬기도회나 벌이면서 부자들의 들러리 이데올로기를 자임하는 노릇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체계 속의 불행을 의례적으로 애도하는 짓으로 사제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던 본 훼퍼의 신념은 그 모든 종교적 주체의 일반 이론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죄(罪)있는 곳에 은혜도 깊어진다’는 아이러니가 상식으로 둔갑한 곳에서 영성의 타락은 시작된다. 그러니까 적지 않은 상인 기독교인들은 ‘죄의 틈과 사춤 속에서마저 생동하는 은혜’라는 역설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위해서는 차라리 죄라도 좋다’는 식의 자가당착에 이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투박하게 말해, 기독교인이 인구의 30%를 점하든 오 할에 이르든 세속이 그 평균적 타락의 수위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핍박 속에 신앙이 견결해지고, 억압이 오히려 당성(黨性)을 키운다는 식의 사고를 가리켜, 가령 스피노자나 제임스(W. James)는 병(病), 혹은 '병든 영혼(sick soul)'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었던 지난 날의 낙타들은 새롭게 부활하였고, 놀랍게 번성하였다. 특히 막스 베버 이후의 낙타들은 태양계의 범위에서부터 나노(nano) 수준의 기계적 공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에 걸쳐 떼떼하게 무사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카이사르냐 예수냐(Tut Caesar tut Christus)'라는 문제의식은 바야흐로 '카이사르=예수'라는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적 정식 속에서 완전히 실종 내지 와해되고 말았다. 우리의 A는 그런 식으로 ‘독실’한 것이다.

김영민 / 철학자, 한신대학교 교수

* <기독교사상>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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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1-10-06 21:33:54
에이~ 아래 몇분도 지적하셨다시피 김영민의 글은 평범하고 쉽게 쓸 수 있는 말을 틀어서 해놓는 습관이 있는 듯 합니다.

글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부터 괴상한 표현들이 난무하기 시작하는데요...

가령,

"...독행(篤行)이나 독지(篤志)가 품은 늬앙스를 배신한다."

"...독행(篤行)이나 독지(篤志)가 품고 있는 뉴앙스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정도로 쓰일 수 있을 거 같고,

"...상상적 지식(meconnaissance)과 습관의 상식에 의해 규제된 것이다."는 표현은

"상상을 통해 얻은 지식과 습관을 통해 형성된 상식에 얽매인 것이다" 정도로 해두면 될 듯 한데요,

우리말 쉽게 잘쓰기를 강조하신 이오덕 선생님이 보신다면 속이 좀 울렁거리지 않으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도 '들녘의 백합화를 보라' 그러며 쉽게 쉽게 말씀하셨는데요...

에이~, 어떤 주장을 하기위해 존경하는 분의 말이나 글의 소스를 밝히고 솔직하게 말하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리차드 기어츠(저에게는 익숙한 학자이지요)같은 분의 야그를 꺼내 놓은 건데, 이해 좀 해주요. 쩝쩝.

atom 2011-10-06 05:01:01
흠... '마땅한 내용'의 분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신앙을 갖는다거나, 그 안에서 나름 '성장'한다는게 그렇게 공식적으로 이것 다음에 저것... 그렇게 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앙을 갖게되는데... 이걸 잘 설명해 준 분이 리차드 기어츠라는 종교심리학자이죠. 기어츠는 한 개인이 (어떤 종교의 신앙이든)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어렷을적부터 부딪치게 되는 각종 '심볼'들에 의한 작용이 크다고 분석했지요...

글... 글을 쓴다는게 무리없는 소통을 전제로 해야될 거인디... 혼자만 알아먹거나 현학자들만 잘 알아먹을 수 있는 글쓰기 '안'했으면 좋으련만.

아쉽습니다 2011-10-05 22:37:43
글을 읽는데... 인내심이 많이 필요하네요.
현학이 무학보다 낫다고 믿습니다만...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또한 배움의 덕스러움이라 여겨집니다.

교수님의 글을 끝까지 읽으려고 애를 썼는데 중도포기하고 글을 적습니다.

교수님, 고운 우리말, 잘 안쓰는 단어 전도사를 자처하시고자 하심이 아니시라면 쉬운 말, 좋은 우리말 단어를 써주십시오.
배움을 얻고자 애쓰다가 슬픔마음을 가지고 글을 남깁니다.

2011-10-05 02:32:26
기독교사상에 실렸던 글이면 소위 먹물냄새가 나도 괜찮은 것 아닌지요. 김영민 선생 홈페이지에 지난 2월에 이미 올라왔던 글이고, 왜 이제야 이글이 올라오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기에 왜 아직 다다르지 못했느냐고 비아냥거릴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