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다
무지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다
  • 김기대
  • 승인 2011.10.04 01:5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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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대 목사의 '영화로 신학하기' [쌍생아], 인간의 본래성에 선한 것은 없다

일본에는 아직 4,000여 개 부라쿠(部落)에 300만 명 정도의 천민이 살고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나라를 자부하는 일본이지만 21세기에 아직도 천민으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법적으로만 보자면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이들에 대한 차별은 없다. 그러나 현대 일본 사회에서 부라쿠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은 지속되고 있다. 일제하에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우토로 마을에 대한 차별도 거의 부라쿠와 다름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영화 <쌍생아>.  
 

영화 <쌍생아>(츠카모토 신야 감독, 1999)는 일본의 중산층 사회와 부라쿠가 서로 쌍둥이처럼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2차 대전이 막 끝났을 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 유키오는 전쟁에서 훈장까지 받은 의사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눈높이를 맞추어 진료하는 그는 마을에서 명의로 존경받고 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팔이 잘려 나간 그래서 증오만 남았을 법한 귀향병사도 유키오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진료 받는다. 부상한 퇴역 군인이 패자라면 전범 국가의 훈장을 받은 유키오는 승자이기 때문이다. 전범 국 영웅의 냉혹한 모습이 유키오에게는 없다. 그는 많은 전범들이 전후 재판에서 궤변을 늘어놓았듯이 자신은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분석한 것처럼 아이히만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학살 명령을 수행한 사람일뿐이다. 아이히만이 이 정도라면 유키오에게 죄를 묻는 것은 무리다.

명의 유키오는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링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른다. 의사로서 배경 좋은 아내를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과거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일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은 화재로 인해 가족을 잃고 그 이전의 일은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키오의 부모는 이 며느리가 싫지만 고부갈등이 단골 소재인 한국의 드라마처럼 천박하게 며느리를 학대하지 않는다.

이 가족의 식탁은 서경식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소개한 일본화가 고이소 료오헤이의 "아침의 한때"를 연상시킨다. 서경식은 전쟁 당시 일본 중산층의 지극히 평범한 식탁을 그린 이 그림을 이렇게 평한다.

"어쩌면 일본 중산계급의 뱃속은 이만큼 깊은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타국을 침략해서 타민족을 살육하고 있었던 때에도 또한 전 국민이 신절이나 하는 허위의 미의식에 의하여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던 때에도 이 중류 상층계급의 가정에는 3세대에 걸쳐서 한결같이 조용한 아침이 되풀이 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중)

마치 이 그림을 보는 듯한 영화 속 유키오 가정의 식탁은 조용하다. 침묵을 깨기 위해 아들은 역시 의사였던 아버지에게 묻는다. "죽음이 확실한 환자를 치료하기 보다는 그냥 죽도록 놓아두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대답한다. "그것은 네가 독일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사람을 살려야 한다." 살리는 것이 의사의 책임이라면 어떤 경우에서든지 살려야 한다. 일종의 기계적 휴머니즘인 셈인데 식탁의 부자는 자신들이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이던 전쟁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망각한다.

행복하기만 한 이 가정에 어느 날 갑자기 어두움의 그림자가 찾아든다. 유키오는 알수 없는 시선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 집과 병원에는 닦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악취가 진동한다. 게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세상을 뜬다.

유키오의 부모가 떠난 후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급한 환자가 병원 창문을 급하게 두드린다. 유키오는 비속에서 아이를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부라쿠 출신의 여인에게서 품안에 안긴 아기가 페스트 환자라는 것을 직감한다. 페스트의 전염성, 천민출신의 환자라는 사실에 잠시 주춤하지만 간호사들에게 방역복을 준비시키고 환자를 받을 준비를 한다.

그 순간 병원의 문을 누가 급히 두드린다. 시장이 사고를 당해 직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누구를 먼저 치료해야 하는가? 이 순간 아내 링은 천민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키오는 시장을 먼저 치료할 것을 결정한다. 시장은 병원 정문으로 들어오고 천민 환자는 창문을 두드린다. 정식으로 문을 두드릴 용기조차 갖지 못한 신분의 사람들이 바로 부라쿠인들이라는 것을 감독은 암시한다. 이 일로 유키오와 링은 냉각기를 갖는다.

어느 날 유키오는 집 뒷마당에 있는 우물 근처에서 공격을 받는다. 그는 우물 속으로 떨어지면서 그를 공격한 사람의 얼굴을 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자기의 얼굴과 똑 같은 사람이었다. 우물 속에서 또 다른 자기가 우물 안으로 던져 주는 개밥보다 못한 음식으로 연명한다.

 

   
 
     
 

자기와 똑같은 그는 누구인가? 유키오는 놀랍게도 공격한 자는 자신의 쌍둥이 형제 스테키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키오는 자신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테키치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쌍둥이 형제 중 허벅지에 흉물스러운 반점을 갖고 태어난 동생 스테키치를 냇가에 버린다. 가장 이성적인 의학을 공부하고 환자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을 가진 의사지만 그 기괴한 무늬가 보여주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버려진 아이는 부라쿠의 곡마단 배우에 의해 길러진다. 스테키치는 천민 마을에서도 소외된 채로 좀도둑으로 살아간다. 이중의 소외 속에서 외로운 스테키치 옆에는 같은 마을 출신의 연인이 있다. 스테키치는 점점 사람 아닌 사람(非人,히닝)이 되어간다. 일본인들이 부라쿠민을 부르던 비인이란 바로 사람 아닌 사람인 것이다.

좀도둑으로 스테키치는 부라쿠에서조차 쫓겨나며 연인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스테키치를 잊지 못하던 연인은 어느 날 자신의 목욕 모습을 보던 유키오와 마주하게 된다. 그녀에게 스테키치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스테키치를 찾아가지만 그는 유키오였다. 그 스테키치의 연인이 바로 링이었다. 링은 천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고 이야기하면서 유키오의 아내가 된다.

마을로 다시 돌아온 스테키치는 링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몰래 링을 지켜보던 스테키치는 유키오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언젠가 양아버지가 말해 주었던 출생의 비밀이 생각났던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스테키치의 출현이 유키오가 느끼던 불길한 느낌, 악취, 부모 죽음의 원인이었다. 이제 마지막 복수 대상은 유키오와 링이다. 링에 대한 스테키치의 사랑은 변함없지만 스테키치는 링이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키오를 우물에 밀어 넣고 링의 남편 행세를 한다.

링은 그가 유키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은 배신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기다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링을 믿지 못하는 스테키치는 끝까지 유키오 행세를 하며 오히려 그녀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냐며 링을 당혹하게 만든다. 스테키치는 점점 더 유키오를 닮아가고 문명의 상징이었던 우물 속 유키오는 비인이 되어 간다.

유키오가 스테키치는 생물적 쌍둥이지만 그것은 원시와 문명, 교양과 악마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한 개인의 모습이다. 오랫동안 우물에 갇혀 있던 유키오는 우물을 탈출해 스테키치를 죽인다. 스테키치는 유키오를 형이라고 부르며 죽어 간다. 군대 갈 자격조차 없는 천민 스테키치가 제 아무리 천민 마을의 건달이라 할지라도 2차 대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쟁의 한 복판에 훈장을 받은 유키오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링은 괴롭다. 자신과 잠자리를 한 남자가 유키오인지 스테키치인지 분명하지 않다. 유키오라면 자신의 과거를 다 말해 버렸다는 점에서 괴롭고, 스테키치라면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고백하고 배신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괴롭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 현상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링은 유키오를 처음 만난 그 냇가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이때 우물 속에서 지내면서 스테키치의 비인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유키오가 나타난다. 링에게 있어서 이 남자가 유키오인지 스테키치인지 불투명하지만 어쨌든 자신을 받아들인 그와 다시 가정을 이루고 둘 사이에는 아기가 태어난다.

인간의 이중성

유키오와 스테키치의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환자는 끝까지 살려야 한다는 ‘훌륭한’ 의사이지만 그는 단순히 흉한 반점을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을 버리는 비이성적 인물이다. 유키오에게는 잔혹성이 숨어 있었고, 스테키치에게는 순정이 숨어 있었다. 링은 유키오의 안정감과 스테키치의 야수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감독은 인간 모두에게 이러한 이중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세련된 교양 뒤에는 악이, 악마성 안에는 선함이 있다.

성서에서 가인은 아벨의 제사만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 것을 질투하여 아벨을 죽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살인자 가인에게 유랑의 벌을 내리면서도 그에게 표까지 주어가며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약속했다. 그 표는 죄인에 대한 구원의 상징인 동시에 인간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악마성의 표다. 그 악마성의 표지가 있기에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표다. 수많은 가인들이 이 두 가지 표지 중 좋은 것만을 가지고 싶어 하지만 결국 그것은 함께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표지다.

영화 마지막에 태어난 아기는 누구의 아이일까? 유키오의 아이일까? 스테키치의 아이일까? 그 아이는 유키오와 스테키치의 아이다. 선과 악의 아이다. 그런데 유키오가 선의 역할을 하는지 스테키치가 그런지 감독도 배우도 관객도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살아야 하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사회의 이중성

부라쿠는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전쟁 포로들, 도래인(재일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는 이론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의 연구들은 그것을 뒤집고 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촌락이 아니라 천황 제도가 생기면서 사람이 아닌 신격화된 천황을 만들기 위해 짝패로서 또 다른 사람 아닌 사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부라쿠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 부락해방연구소, <일본 부락의 역사>) 천민은 기득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 부라쿠는 없다고 일본 정부가 늘 주장하듯이 근대적 인권 개념을 법에 도입한 나라에서 천민은 분명히 없다. 그러나 기득권 보호를 위해 기득권자들은 우리들과 다른 그들(천민)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기득권이 구별되어야 할 이유로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짝패 계급인 것이다.

같은 학교를 다녀도 돈을 내고 밥을 먹는 아이들과 무료 급식을 하는 아이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밥값을 내는 아이들을 구별 짓기 위해서이다. 세금의 혜택을 받는 아이들이 있어야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시혜를 받는 사람들은 기득권자와는 다른 사람(비인)일 뿐이다.

장애자, 도시 빈민, 비정규 노동자는 모두 기득권자와는 다른 비인이다. 비인에 대한 개념은 더 넓게 퍼져 나간다. 9.11테러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슬픔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지만 대응 공격으로 중동 땅에서 죽어간 훨씬 많은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그만큼 크지 못하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도가니 때문에 새삼 장애자 학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당시 솜방망이 같았던 처벌에 대한 비난이 있는가 하면 사학법의 독소조항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며 사학법 반대에 앞장섰던 족벌 사학과 보수 정당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 그러나 이들만 회개하고 법만 개정되면 장애자들의 처지는 개선될까?

우리 사회에 정상인들에게 장애자들은 여전히 비인이다. 비인은 우리의 동정의 대상일 뿐 더불어 살 수 없는 부라쿠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특정 공간에 몰아넣고 가끔씩 동정하며 시혜할 뿐이다. 미디어 과잉의 세상에서 영화는 그 동정에 잠시 흥분을 더할 뿐,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을 비인으로 취급하는 인식에 대한 회개가 없는 한 우리의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 낸 부라쿠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영화에서 스테키치가 떠난 후 혼자 남겨진 링은 도둑질을 하다가 주인에게 잡힌다. 주인은 약점을 잡아 링을 겁탈하려 들며 "네 동네(부라쿠)에서는 강간도 다반사라며?"라는 말로 부라쿠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유키오가 모든 것을 알기 전 왕진을 갈 때 병원 앞에서 유키오를 비난하는 걸인이 있었다. 유키오는 뭔가 비밀을 말할 듯한 그 걸인을 항상 무시하고 지나쳤다. 이제 스테키치가 죽고 난 후 다시 유키오가 병원을 나설 때 그 걸인은 유키오에게 소리를 친다. 예전과 달리 유키오는 걸인을 돌아본다. 이 때 걸인은 예전과 달리 뭔가에 홀린 듯 유키오에게 압도당한다. 감독은 유키오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관객들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걸인이 아무 것도 모르는 유키오를 압도할 때 유키오의 눈빛은 선한 눈빛이었지만 아직 인간의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키오가 걸인을 압도할 때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눈빛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그의 눈빛에 괴짜 걸인은 두려워 떤다.

인간의 본성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것이 불교다.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해답을 찾을 필요 없이 그 양면성이 본래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가는 고뇌의 종교이며 모든 것을 알아버린 지혜의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교만한 인간이 끊임없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던 종교다.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던 것은 꼭 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정의를 실현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시비를 가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결코 혼자 힘으로 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인간의 본래성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처럼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기독교는 모든 것을 알아버린 불교에 비하면 무지의 종교다. 그런데 그 무지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리스도를 통해 뻔히 알고 있는 사실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함을, 나 혼자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도 결국은 나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는다.

비 오던 날 도움을 청하던 부라쿠민의 진료를 미루었던 유키오는 이제 그 마을을 향해 왕진을 나간다. 그런데 부라쿠로 가는 길을 모른다. 왕진을 기다리던 부라쿠의 아이가 ‘일반인’들의 마을 어귀까지 나와 유키오를 안내한다.

인간과 사회가 적대적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유키오지만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가야 할 길조차 알지 못한다. 나약한 어린이면서 천민인 이중적 취약성을 가진 그 아이는 그가 죽인 동생의 분신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인간의 양면성을 알고 나서도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유키오를 안내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 (고린도 전서 1:27). 어리석고 약해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인도되는 삶, 그것이 구원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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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ybear 2011-10-11 07:12:40
인간이 가진 양면성이라... 끝이 보이지 않는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와와/카/지/노★ w w w . w a 2011-10-19 19: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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