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가 '好世兒'에게
호세아가 '好世兒'에게
  • 김필회
  • 승인 2011.11.15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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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우리의 자화상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얼마간 다르기는 하겠지만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럽거나 바람직하지 않음에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교회가 좋은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는 드문 예외에 속한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교회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는 거리낌 없이 자행된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권력기관으로 변질된 교회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탈법과 폭력에 손을 내밀기도 한다. 사회는 정도를 넘은 교회의 윤리적 타락과 이기적 탐욕에 우려를 표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교회는 추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에 무관심하다. 종교개혁자들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았다면 아마도 그 가운데서 벌어지는 ‘무섭고 놀라운 일’(렘 5:30)에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부패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지난 이천 년의 교회사가 증거하듯 교회의 발전은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세속화 또는 오염을 초래했다. 어찌 보면 교회의 부패는 교회가 이 땅 위에서 짊어져야 할 [부정적인] 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느냐이다. 타인의 충고와 비판을 귀담아 듣고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다면 부패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다. 환자가 유능한 의사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 치료를 받고 병에서 회복하는 것처럼, 비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낮아짐의 겸손이 아직 남아있다면 밝은 미래가 한국 교회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비판과 경고를 신앙적 박해로 오도하면서 귀를 막고 자기 의를 주장한다면 예언자들의 선포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제 길을 가다 멸망당한 하나님 백성의 비극적 운명이 한국 교회를 뒤덮는 짙은 어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은 교회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책들이다. 메시아적 예언으로 간주되는 일부 구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다. 예언자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거절당했던 것처럼, 예언서들은 후대의 독자들에 의해 마찬가지로 버림을 받는다. 예언서들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과 냉대는 물론 이유가 없지 않다.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와 사회를 고발한 예언자들의 선포는 주로 개 교회와 개인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오늘의 교회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성전에 대한 비판과 공동체와 관련된 높은 윤리적 요구와 역사의식은 교회중심적인 삶에 차라리 비판적이다.

절대화된 목사의 권위와 유일한 목표로서의 교회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예언서는 먼지에 싸인 책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언자의 선포는 예나 지금이나 묵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로 남겨진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은 예언서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신다는 점이다. 예언자의 선포에 귀를 막았던 이스라엘이 멸망의 심판에 떨어졌다면, 예언서에 계속 눈을 감는 한국 교회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제 기원전 8세기 후반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활동했던 호세아를 통해 한국 교회에 주는 하나님의 경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공적 삶의 두 중심축인 정치와 종교를 한 묶음으로 고발했지만, 여기서는 주로 종교와 관련된 내용만 선택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또는 종교적 혼합주의

호세아를 포함한 예언자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개종과 같은 고백적 배교행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같은 주변의 다른 신들을 섬기기 위해 야웨를 부정한 경우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야웨종교 안에 주변 종교들의 신학과 세계관을 수용하려는 태도로, 요즘의 표현을 빌자면 종교적 혼합주의에 해당한다. 야웨만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과 함께, 또는 야웨를 가나안의 신 바알처럼 섬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였다.

   
 
  ▲ 고대 바알신을 상징하는 신상.  (출처 : 위키피디아)  
 
다양한 종류의 우상숭배가 있었지만 우기에 식물이 성장하고 건기에 시드는 자연계의 주기적 현상을 신화의 도움을 받아 제의화시킨 가나안의 풍요다산제의가 특히 위협적이었다. 바알이 주관하는 풍요제의가 산당예배를 통해 야웨종교 안에 자리를 잡자,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와 가나안의 신 바알의 구별이 희미해지면서 뒤섞여버렸다. 이스라엘은 서서히 야웨신앙의 독창성을 잃어버리고 야웨와 바알을 일치시키거나 또는 바알을 숭배하듯 야웨를 섬겼다. 호세아는 겉으로만 야웨께 드려지는, 바알화된 이스라엘의 제의를 음행 또는 간음으로 고발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연유에서 출애굽의 하나님께 만족하지 못하고 바알의 유혹에 넘어갔을까? 간단히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라고 말한다면 이는 너무 막연하다. 가나안의 바알종교와 야웨종교를 비교해보면 이스라엘이 ‘바알과 같은 야웨’를 선호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바알종교는 숭배자들에게 제의적 의무를 제외하고, 윤리나 공동체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았다. 제의가 모든 것이었기에 역사적-사회적 역할을 주장하는 야웨종교와 달리 계명 준수의 부담이 거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바알종교는 그 근본에 있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풍요제의에 속했다. 제의를 통해 인간의 기본적 관심과 욕망에 속하는 풍요와 번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또 제사를 통해 풍요를 주관하는 바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바알과 바알숭배자들은 상호의존적인데 반하여, 야웨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후자가 전자에 일방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야웨신앙에서 축복과 구원은 숭배자들의 제의적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야웨의 주권적 은총에 속한다. 은총이란 점에서 야웨의 행위는 독단적이고 임의적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사람들이 야웨를 경외하는 것과 바알을 숭배하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비교적 자명해진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숭배하듯 야웨를 섬겼다. 이스라엘은 야웨를 숭배한다고 주장하지만, 예언자의 눈에는 바알숭배에 불과할 뿐이었다.

바알은 사라졌어도 풍요제의는 여전히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야웨와 바알의 구별은 부차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2:5) 주느냐였다. ‘누구에 의해서’와 ‘어떻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숭배자들에게 풍요로움과 안전을 가져다준다면 그가 참된 신이 된다. 풍요를 허락해주는 신은 누구나 야웨가 될 수 있었다. 물질적 풍요와 번영의 보장이 예배의 일차적 기능이자 유일한 목적이 된다. 신앙을 물질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평가하기에 눈에 보이는 축복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물질적-세속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 좋은 신이며, 축복을 받은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다. 야웨신앙의 핵심에 속하는 ‘하나님 말씀에의 순종’은 관심사에서 완전히 탈락한다. 출애굽의 하나님과 풍요제의의 바알을 구별하지 못할 때 결국 야웨신앙도 없어진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가나안의 신 바알은 성경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유물에 속한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상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우리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멸망에 빠뜨렸던 바알의 풍요제의의 위험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바알은 사라졌어도 풍요제의는 없어지지 않았다. 풍요제의는 축복의 옷을 빌려 입고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여전히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펴본다면 물질적 풍요가 신앙생활의 큰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회적 성공과 명성을 위해 교회 일에 열심을 낸다면, 양적 기준에 따라 성령의 역사를 평가한다면 이는 풍요제의의 변형에 속한다.

물론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2:8)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물질을 주니 순종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축복은 예배에 참석하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말씀 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다.(cf. 신 11:13-15)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 이외에 그분 손에서 축복을 받아낼 수 있는 남다른 비결은 없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기복신앙(祈福信仰)에 속한다. 무엇인가 그분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분을 찾거나 예배드리는 행위는 경건을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는 거짓 믿음이다.

백성의 죄를 즐기는 제사장들

하나님 말씀과 신학적 전통이 있었는데 어떻게 야웨와 바알을 구별할 수 없었을까?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일부 본문이 불확실하지만 호세아 4장 4-10절은 이스라엘이 야웨를 바알처럼 섬기게 된 무지의 원인을 제사장의 부패와 무능력에서 찾는다. 제사장은 제의 규정의 준수뿐만 아니라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성실해야 할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그분의 율법을 잊어버렸다.(6b절) 하나님 말씀에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않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헛된 기대에 속한다. 더 놀라운 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그분의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제사장의 수가 늘어만 간다는 사실이다.(7a절) 야웨 제사장들이 야웨를 무시할수록, 야웨께 죄를 범할수록 그 수가 더 많아진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지 않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찾게 되고, 성전이 양적으로 번성하기에 제사장직에 종사하는 자들이 늘어난다.

제사장들과 백성이 야웨를 모를수록 성전은 야웨께 제사를 드리려는 자들로 넘쳐난다. 야웨종교가 내적으로 부패할수록 제의산업이 외형적으로 번창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처럼 보이는 성전제의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번성은 야웨종교가 얼마나 심각하게 부패하고 타락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야웨와 상관 없이 야웨께 드려지는 제사는 그분께 죄를 더할 뿐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잊은 제사장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을까?”이다. 제사장들은 하나님 백성의 죄를 먹고 살면서 저들이 죄짓기를 열망한다.(8절) 히브리어로는 동일한 단어이기에 개역개정의 ‘속죄제물’도 가능한 번역이지만 문맥에 따라 ‘죄’로 옮기는 것이 더 좋다.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다”는 직역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구멍을 저들의 죄를 향해 들어 올린다”가 된다. 제사장들의 죄는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욕망에서 나온 적극적-의지적 악행이다. 제사장들은 백성이 죄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이들이 죄를 짓도록 방임하거나 부추긴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서 찾는 것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만(4:1), 제사장들로부터 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한 백성은 형식적인 성전제의를 통해 그분을 만나려 한다. 이들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성전을 찾거나(5:6) 제단을 많이 만들거나 주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으로(8:11; 10:1) 자신의 경건을 과시한다. 야웨신앙이 성전중심적인 제의적 경건으로 왜곡됐기에 백성이 죄를 많이 지을수록 제사장들에게는 더 많은 물질적 혜택이 돌아간다. 희생제사와 소제의 일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졌기에, 제사를 드리려고 성전을 찾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들의 수입도 더 많아진다. 백성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자신들의 삶이 더 윤택해지기에 제사장들은 백성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둔다.

제사장들로부터 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백성의 면책사유가 될 수는 없다. 종국에 가서는 제사장들이나 백성이나 모두 멸망을 당한다.(9-10절 cf. 사 9:16) 하나님은 부패한 제사장들에 이끌려 멸망의 길을 가는 당신 백성에게 연민을 느끼시지만(6a절), 그렇다고 이들의 죄에 눈을 감지는 않으신다. 백성이 제사장들에 의해 오도됐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죄가 없지는 않았다. 제사장들이 직분상 더 큰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들을 따른 백성도 자신의 선택과 참여에 책임을 져야한다. 제사장들처럼 백성도 각자의 행실과 행위에 상응하여 징벌을 받아야한다.(cf. 12:2, 14) 백성의 무지는 처음에만 해당한다.

나중에는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쉽게 대속할 수 있는 성전제의를 즐겼다. 가끔 찾아가 드리는 성전예배로 신앙적 의무를 모두 완수할 수 있었기에, 약간의 물질로 자신의 경건을 드러낼 수 있었기에,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 죄와 벌의 굴레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었기에, 부패한 제사장들이 주도하는 성전중심적 제의종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야웨신앙이 죽은 제의종교로 전락한 까닭

호세아가 제사장들을 고발한 근본 이유는 이들이 살아있는 야웨신앙을 죽은 제의종교로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제의를 야웨종교의 근간으로 주장하면서 다른 말씀들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성소의 제사로, 이스라엘은 제의규정의 준수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성전중심적 제의신학은 사람이 범죄를 해도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리면 그분께서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고 가르쳤다.

이들이 묵인하거나 조장한 제사행위를 통한 죄의 자동적 용서는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야웨종교에 치명적이었다. 먼저 죄의식의 약화를 가져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속죄제물만 드리면 단번에 죄를 사면 받을 수 있기에 굳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어졌다.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속죄제물에 쓰일 좋은 짐승을 드리는 일에 관심이 집중됐다. 다음으로는 죄를 용서하는 주체가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사행위 또는 제사장에게로 옮겨졌다. 하나님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를 무조건 받으시고 제물을 가져온 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셔야 했다. 하나님과 제의의 관계가 완전히 전도된다. 하나님께서 당신께 나아올 수 있는 통로로 허락하셨던 제의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됐다. 하나님께서 제의에 종속되면서 성전과 제사장의 역할이 압도적으로 중요해졌다.

성전과 제의와 제사장이 독점적 역할을 담당했던 호세아 시대와 우리 시대를 직접 비교하기에는 얼마간 무리가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도 교회와 예배와 목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예배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최고선은 아니다. 하나의 수단에 속하는 예배가 목적이 될 때 하나님의 자리는 없어진다. 하나님은 당신께 드려지는 예배를 무조건적으로 받으셔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의 존재이유를 결정한다. 예배드리는 행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상응하여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가 신앙생활의 중심부에 놓여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독점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교회를 위한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교회를 섬기는 것이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한다. 호세아가 고발한 우상숭배가 극복된 과거에 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구약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평신도의 신앙이 여전히 목자에 의존적임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목자는 말씀 선포자와 교사로, 신앙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 신앙인의 귀감(龜鑑)으로 교인의 신앙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목자의 건강한 말씀선포와 가르침은 교인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만, 목자의 물질적이고 업적주의적인 설교는 교인의 마음을 만족할 수 없는 탐심과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으로 가득 채워버린다.

목자의 성실하고 진실된 모습은 교인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지만, 목자의 왜곡된 모습은 교인에게 실망과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목자가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성경과 성령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 전달할 때 교인의 신앙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목자는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서 교인들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목자는 자신의 잘못으로 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음을,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추궁 당할 수 있음을 언제나 유념해야 한다.

죄의식의 지나친 강조도 신앙을 왜곡시키지만, 아마도 더 큰 위험은 ‘값싼 은총’에 근거한 죄사함의 남발일 것이다. 교회 예배나 개인적 회개를 통해 언제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연한 결과로 많은 교인은 죄를 멀리하기보다는 쉽게 용서받는 길로 눈을 돌린다. 말씀을 따르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말씀과 무관하게 살다가 주일에 교회를 찾아가 은총의 하나님과 화해하는 간편한 방법을 선택한다. ‘죄의식의 약화’와 ‘죄사함의 가벼움’은 교인에게서 윤리의식을 빼앗아버린다. 세상에서 굳이 하나님의 자녀로 힘겹게 살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교회에서는 성도로, 교회 밖에서는 세상적으로 사는 이중적 삶이 아무 모순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국 교회에 유행했던 일천번제 헌금.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죄의 용서와 구원을 매개로 한 교회중심적 신앙생활은 그 결과물로 교회의 양적 팽창을 가져오기도 한다. 교회는 신앙생활을 교회 생활로 축소시켜줌으로써 교인들에게서 무거운 짐을 벗겨준다. 교회가 요구하는 눈에 보이는 몇 가지 기준들(예를 들면,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교회봉사 등등)을 만족시키면 그는 믿음이 좋은 교인으로 인정받는다.

신앙인의 사회적-역사적 의무와 책임은 그 중요성을 박탈당하고 품위 유지에 필요한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세상에 살면서 범한 죄를 쉽게 용서 받을 수 있기에, 부담감 없는 설교로 위로 받을 수 있기에, 값싸게 선포되는 축복으로 부자가 될 수 있기에 사람들은 즐겨 교회를 찾는다.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던]”(10:1) 이스라엘처럼 거저 주어진 구원과 축복에 감사하여 교인들은 교회에 물질을 바친다. 교회와 교인은 서로를 의지하며 각자의 감춰진 욕심을 채워간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모든 교회에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교회 성장이 목자와 교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불의한 결합일 수도 있음을 지적할 뿐이다. 두껍게 덧칠한 화장이 추하게 일그러진 본 모습을 언제까지나 감춰주지는 않는다.

호세아 시대처럼 지금도 죄를 준엄하게 고발한다면서 사회적-윤리적 의무를 강조하는 메시지는 고운 음성으로 부르는 ‘사랑의 노래’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겔 33:32) 교인들에게 환영 받지 못할 것이다. 세상적-물질적 가치관과의 단호한 결별을 요청한다면 그는 아마도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른 자기희생적-실천적 삶을 선포한다면 그는 아직 목회적 현실에 눈이 어두운 사람으로 취급될 것이다. 사실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무거운 메시지를 듣기 위해 교회를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동체가 듣기 원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선포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서로 충돌될 때가 자주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냐에 따라 앞에 놓여진 길이 달라지기에 힘겨운 결단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아는 야웨 하나님

이스라엘은 어떤 근거에서 풍요제의의 우상숭배를 고발하는 호세아의 선포를 거절했을까? 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우상숭배자들이라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자기평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호세아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이스라엘을 고발하지만, 이스라엘은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8:2) 하고 자신들은 야웨를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호세아의 선포는 이스라엘의 귀에는 이방의 언어처럼 ‘이상한 것’이었다.(8:12) 부패한 제사장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야웨와 호세아가 선포하는 야웨는 이름만 같았을 뿐, 전혀 상이한 존재였다. 호세아 6장 1-3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깊이 혼합주의에 빠졌는지를 볼 수 있다.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당신 처소로 돌아가시자(5:15) 이스라엘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1절) 이스라엘은 병을 치료하려고 앗수르 대왕을 찾았다가 고치지 못하고 사태를 더 악화시킨 후에야 야웨께로 돌아온다. 병을 주신 분이 병을 치료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야웨께로 나아온다.

이스라엘은 야웨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구원이 주어지리라 생각한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2절) 이들의 사고에 따르면 ‘돌아감’이 치료와 구원을 결정한다. 이스라엘의 결단이 야웨의 구원의지에 우선한다. 상응해서 이들의 관심은 치료행위의 주체인 의사 야웨보다 ‘조속한 치료’에 집중된다.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음에도(5:12-14; 6:1) 이들의 구원확신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야웨에 관한 바른 지식이 없기에 이들은 가나안적 풍요제의와 야웨종교를 구별하지 못하고 치료와 구원을 돌아감 또는 제사에 종속시킨다.

이들의 야웨 이해가 가나안 사람들의 바알 이해와 별로 다르지 않았음이 3절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야웨를 알자고 서로 권면하며 결심하지만, 뒤따르는 이스라엘의 고백은 호세아의 야웨와 이스라엘의 야웨가 전혀 달랐음을 보여준다. 반복적이며 순환적인 자연현상에 비유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해는 이들이 힘써 알고자 했던 야웨가 누구였는지를 보여준다. 어둠이 지나면 반드시 새벽빛이 나타나는 것처럼 당신 얼굴을 숨기셨던 야웨께서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나오신다.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는 5장 15절과 함께 살펴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진다.

당신 처소로 돌아가신 야웨는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간절히 찾기를 기다리시지만, 이스라엘은 야웨를 전심으로 찾기보다는 그분께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나오실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부재(심판)와 현존(구원)의 교체가 어둠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처럼 자동적이며 순환적이다. 심판의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계적으로 다시 구원시대가 시작된다. 야웨는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러 오시는 분이다. 그분은 뿌린 씨가 성장할 수 있도록 겨울에 비를, 건기를 앞두고 늦은 봄에 단비를 내려주셔서 땅의 풍요를 보장해주시는 신이다. 이스라엘이 야웨께 바라는 것은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주관하는 바알의 역할이었다.(cf. 7:14)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6장 1-3절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과도하게 넘쳐나는 구원의 확신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구원해주실 것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실하게 믿는다. 교회에서 자주 좋은 믿음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인 구원이 구원받는 자의 믿음 또는 확신에 종속된다.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확신하는 것과 그분께 나아가기만 하면 곧 구원이 주어지리라는 신념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이질적인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의사이심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기도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치료해주시는 그런 분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당면한 위험으로부터 구해달라고 부르짖으면 언제나 개입하셔서 도와주시는 그런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지만 우리가 달라고 간구하면 자동적으로 복을 내려주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나 욕구를 채워주시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믿음은 자기가 원하는 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제 생각을 하나님의 의지로 주장한다.

제의중심적 경건인가 야웨신앙인가

신약성서에서도 두 번 인용된(마 9:13; 12:7) 호세아 6장 6절은 호세아서 전체 메시지의 요약이자 핵심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나 번제와 같은 제의적 경건 위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왜곡된 신앙양태를 고발하는 말씀이다. 제사와 번제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들이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체할 수 없다. 열심히 성전을 찾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이웃과 함께 사는 삶을 대신하려 한다면 그러한 제사는 그분께 용납될 수 없다. 제의중심적 경건은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를 형식적 관계로 변질시키고, 민족의 역사와 개인의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야웨를 성전의 좁은 울타리 안에 유폐시킨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야웨종교는 가나안의 바알종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다.

교회가 알고 있는 하나님/예수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예수가 동일한 분이실까? 동일한 분임을 전제하고 신앙생활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호세아의 하나님이 서로 달랐듯이, 실제로도 그러한지는 전혀 다른 문제에 속한다. 답변이 단순하지 않기에 관점을 달리해서 질문해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며 사는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한 번 반문해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호세아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한국 교회의 답변은 어떠할까? 교회와 예배는 구약시대의 제사와 번제와는 다르다고 답하지는 않을까? 또는 교회가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까?

김필회 교수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구약학

* <기독교사상>에 실린 글을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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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wa 2011-12-02 15: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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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형 2011-12-01 06: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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