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아이, 혹은 증상의 미래
울고 있는 아이, 혹은 증상의 미래
  • 김영민
  • 승인 2011.11.15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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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2) 남편과 아버지를 대신하는 신

B 는 기독교인이다. 그녀는 교회의 권사직에다 봉사 부장까지 맡아 충량한 신앙생활을 하는 70대의 노파다. 노령에 이르러서도 기세가 등등한 그녀에게는, 젊어 청상(靑孀)이 되어 남자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궁핍하지만 당당하게 살아온 전력이 온 몸에 서슬 푸르게 드러난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남편이 있었는데, 부모의 반강제로 만나게 된 첫째는 전쟁 중에 빨치산이었던 게 드러나 인연이랄만한 게 아예 없었으며, 그 둘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나온 인텔리였는데 전쟁 이후에 곧 혼인하여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다.

B 는, 그 연배의 사람들에겐 드문 일이 아니었긴 하지만 유달리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니,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40대 후반에 들어 교회 생활을 시작하면서야 주고받아 보았을 정도로 그 말, 그 말이 열어준 세상은 지극히 낯선 무엇일 뿐이었다. B의 아버지는 시골의 무지렁이로 무능했으며, 무학(無學)인데다 장군 고집이었던 그 어머니는 폭군으로 매사에 폭언과 매질이었다. 성년이 된 그 여자는 전쟁 중의 화급한 상황에 떠밀려 혼인을 했지만, 지리산의 빨치산이었다는 그 남편은 하룻밤 속정을 남기고 입산해버렸는데, 전쟁 중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채로 처형당했다는 후문이다.

부친의 무능과 모친의 폭력, 그리고 첫 사랑의 환멸을 뒤로 한 채 도시로 나온 B는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우연찮게 한 남자와 만나게 된다. 그 남자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훤칠하고 잘 생긴 부잣집 맏이인데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업이었던 현직 교사였는데, ‘계급’이 다른데다가 이미 전쟁 미망인이었던 B였지만, 그녀는 워낙 뛰어난 미인이었다. 사랑에 휘둘리고 사랑에 굶주린 B는 그 남자와 동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임신을 했지만 그 남자는 중병이 든 아내와 아들을 시골의 고향에 숨겨놓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젊은 B는 그 남자와 재혼한 지 불과 수년 만에 이런 저런 사정을 겪으며 파경을 맞았고, 그 사이 낳고 기르던 남매를 데리고 그 남자의 곁을 떠나 여생을 홀로 살게 된다.

B 가 위자료를 수완도 종작도 없이 다 까먹은 뒤 남매 둘을 데리고 시나브로 떠밀려 든 곳은 도시의 빈민가였다. 1960년대 말의 도시 빈민가를 지배하던 영성(靈性)이란 게, 추석이면 동네의 어른 아이할 것도 없이 모짝 공터에 모여 앉아 보름달을 향해 떼지어 절하던 수준이었지만, 부흥회 운동을 앞세운 개신교의 전교 열풍이 이미 대단하던 시기였고, 그 운동의 주된 타깃은 도시 빈민들, 특히 그 중에서도 (사랑을 잃고 ‘아이’가 된 채로 울고 있던) 여인들이었다.

B 는 동시대의 수많은 장삼이사들처럼 워낙 불교 신도인 듯하게 살아왔다. 제도습속으로는 유교적이고 정서적으로는 불교적이라는 시속의 평가가 시사하듯이, 계급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교의 (번듯한!) 가부장제 시스템에 편입되지 못한 채로 도시의 외곽을 부랑하던 과부 B의 영성도 별스런 근거도 없이 ‘정서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의 부모들이 별 의식 없이 길게 절간 출입을 해오던 관습에 부응한 셈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여성의 상처에 쩔고 도시 빈민의 간난에 쉼 없이 되먹히면서도 ‘여자의 일생(!)’으로 응결된 그 억압된 울음소리를 틈틈이 내뱉기에는 산 속의 절이라는 곳은 아무래도 멀고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억압된 것의 이상한 회귀’(프로이트)가 집단적으로, 모방적으로, 그리고 여성에 우호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곳으로는 그 당시에 빈발(?)하고 있던 교회라는 기이한 ‘장소’가 한결 편했다.

물론, 거기에서도 설교라는 언어적 치유의 매개가 B의 외로운 심금을 치고 있었던 사실은 각별한 언급을 요한다. 여자들의 (살이 아닌) 말에 도통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다감한 치유의 언어가 빈약한 사회에서, ‘성도(聖徒)의 사랑’이라는 어휘를 남발하면서, ‘외롭고 괴로운 이들은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달콤하게 속살거리는 미남자(그것이 금발의 예수든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부흥사든!)가 주재하는 종교는, 두 명의 부모와 두 명의 남편에게 인정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채 세속의 각질(角質)에 내던져진 B의 심혼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한 주에도 몇 차례씩이나, 인간의 입술에 얹혀 전해지던 그 낯선 신의 음성은 1930년대에 태어나 왜정(倭政)과 끔찍한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를 겪으면서 (대표적으로) 불행해진 여인의 영혼을 돌이킬 수 없이 낚아 챈 것이다.

이후, B의 삶을 지배한 것은 종교(개신교)였다. 그것은 망망대해에서 만난 거북의 등짝과 같은 은총의 우연이었다. 현실적으로 남자(들)와의 리비도적 결속 관계가 멀어진 채 두 자식을 먹이고 키우며 하루하루의 운수에 일희일비했던 그녀에게 이 새로운 종교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리비도적 결속과 그 쾌락의 대체물이었다. 굳이 프로이트의 낡은 말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적 관계는 그 근본에서 확장되고 희석되어(verdunnt) 승화된 리비도적 결속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선물의 발생에 대한 데이비스(Natalie Z. Davis)의 논의에서 에둘러 엿볼 수 있듯이, 워낙 가족이나 종교와 같은 공동체라는 것은 자본주의나 관료제와 같은 교환-체계에 대한 반동적•대안적 결속의 뜻이 강하다. (물론 이것은, 가족이나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내부적 결속이 강화되는 계기를 논급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부모와 남편과 자식(아들)으로 이어지던 전통적인 여인의 의지처에서, 신(神), 남자-신, 그것도 어쩌면 “오직 여인들만을 위해서 기적을 베풀던 (미남 청년) 신”(르네 지라르)의 존재와 카리스마 넘치는 개입은 ‘(무익한) 열정(passio)의 존재’(사르트르)이자 ‘수고(passio)의 존재’(포이어바흐)인 여자, 혹은 사회적 약자이면서 동시에 개인적 약자인 어느 한국 여성의 삶에 결정적인 전기(轉機)가 된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쉽사리 ‘사랑’으로 회귀한다. 사랑이 문제였고, 사랑이 해결이었으며, 사랑이 환상이자 환멸이었고, 사랑이 또 다른 희망인 것! 부모라는 사랑의 환상, 남편이라는 사랑의 환상에 좌초한 B는 일견 사랑이라는 구심력적 리비도의 환상으로부터 종교라는 원심력적 초월의 환상으로 옮겨간 듯 보였다. 그녀는 부모와 남자의 사랑을 대신할 대체(Ersatzbildung)를 구할 수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증상적인 가치를 지닌 영역으로 내몰려 간 셈인데, 사실 이 경우에는 (남한의 유례없이 폭발적인 ‘여자 개신교’ 현상이 시사하듯이) 종교라는 환상, 혹은 환상이라는 종교의 영역만큼 동뜨게 맞춤한 곳이 없었다. 일찍이 청년 예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곱게 씻었던 팔레스타인의 여인으로부터 시작하여, B와 같은 한 많은 여인들이 한국의 도시 빈민 교회를 메웠던 시절을 거쳐 조용기나 김선도의 교회를 채우고 있는 부르주아 개인-여인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환상의 장소는 여인들의 삶이 거듭나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문제는 종교적 욕망의 구조 역시 사랑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종교라는 게 제 아무리 ‘초월(超越)’이라는 문짝을 달고 있어도, 대개의 종교적 주체는 키에르케고르의 바람과는 달리 단독자가 아니라 군중의 일원(das Mann)일 뿐이다. 즉, 그들은, 예수와는 정반대 편에 서 있던 존재들, 다시 말해서, 간음한 여인을 가운데에 놓은 채 한결같이 돌을 들어 던지려고 했던 바로 그 모방적 군중일 뿐인 것이다. 아울러 신앙의 구조라는 게 내성(內性)을 출발점으로 삼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자들의 심리적 공명(共鳴)에 쉽게 얹힌다는 데 문제의 알짬이 있다. 당연히 B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기에, 부모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소외된 애정은 심리적 공명을 통해 신이나 그 매개자/대리자인 목사에 고착되는데, 개인주의자의 내성적 주체란 지젝의 말처럼 상상적 자기동일화에 함몰된 채 ‘윤리적•상징적 배신’을 일삼거나 기껏해야 이자관계(relation duelle) 속에서 증상적으로 안정화할 뿐이다.

이혼의 위자료로 받은 얼마간의 돈도 그녀를 (가령 프로이트 교육학적 권면이나 보부아르의 여성주의적 권면과는 달리) ‘세상 속으로 초월’하게 할 수는 없었다. 워낙 ‘상처는 어리석음’(아도르노)이며 어리석음의 형식은 강박적 반복이라, B에게 있어서 초월이라는 종교는 진정한 외부성의 체험이 아니라 내성적 자기동일화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던 것이다. 다만 사랑의 상실로 집약되는 과거의 상처 속에서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울고 있던 그 여자는 자기 자신을 종교라는 새로운 환상의 무대 속으로 옮긴 뒤에 그 욕망의 상대를 부모나 남편 대신 신(神)이라는 환상적 대상선택(Objektwahl)으로 교체했을 뿐이었다.

폭력적이거나 무능한 부모와 변덕스러운 남편 대신에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이라면 어떨까? 더구나 주로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자들에게 은혜와 기적을 베푼 절대남성적 표상의 신이라면? (이와 근소하게 관련되는 여담이지만, 다시 태어나도 함께 살겠니 마니 하는 따위의 설문에 응한 부부들의 통계를 보면 압도적으로 아내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물론 이 통계는 악자의 위축된 사회성을 반영하는 지표일 뿐이긴 하지만, 한편 거꾸로 이들 ‘사회적’ 약자의 신세와 처우를 개선해 줄 ‘영웅적이며 헌신적인 남편’을 향한 환상적 투사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당연히 B에게 종교는 부재했던 사랑에 대한 보상적 환상이 집결하는 장소였고, 세속적 체계 속의 기능적 ‘공간들’로부터 소외된 채 특정한 ‘장소’에 집착하게 되는 사회적 약자의 본능처럼 그녀는 그 장소에 집착한다. (가령, 사람-주인이라는 대타자를 배경으로 업고 있는 개와 달리 ‘사회적’ 약자인 고양이는 사람을 대신해서 ‘장소’에 집착하는 것이다.) B는 주일 대예배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은 사라진) 주일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금요일 철야 기도회, 그리고 매일의 새벽 예배에 마치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해설처럼) ‘강박’적으로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절기나 이런저런 행사, 그리고 부흥회가 있을라치면 B는 어김없이 집을, 그래서 두 아이를, 내팽개치고 밤을 새며 교회의 살림에 전력투구하곤 했다. B는 잡히지 않는 하느님보다 ‘보이는 애인’(아벨라르)을 택한 엘로이즈는 아니었던 것이다.

B 는 자신이 그 부모들로부터 배운대로 -즉, 부친의 무능과 모친의 폭력을 대물림하여- 두 남매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부모와 1960년대의 자식들 사이의 관계가 종종 그러하듯이, 자식들은 변화한 세대의 계몽주의에 얹혀 그 무능과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 자신들의 독립과 자존을 키우며 B의 품을 넘어 아득하게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남은 것은 신, 오직 감각에 부재함으로써만 더욱 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실존하는 그 사랑과 강박의 신뿐이었다.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억압적 보호장치는 아득히 잊혀지고 내팽겨진 터에, 부모와 남편과 자식의 존재가 사랑의 현실이 되지 못한 그 도시의 빈 자리에 대신 찾아온/불려온 것은 신이라는 그 매혹적인 부재(不在)였다. 또 다른 부재가 부재했던 사랑의 역설적 보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 모든 ‘존재’가 개인으로 내던져진 약자에게 등을 돌릴 때에 그 ‘부재’의 환상은 존재의 현실을 숨기며 삶을 대리하게 마련.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종교라는 환상의 형식을 차용한 B의 사랑은 당연히 어떤 ‘증상’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것은, 가령 우리의 스승 예수가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써 뚫어낸 ‘시대의 증상’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정신분석의 낡은 진단처럼 그 여자는 그 증상(유아기적 체험을 강박적으로 반복함으로써, 탈각의 위기에 처한 자아를 보호하려는 퇴행적 표현들)을 결코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증상이야말로 그 여자에게 남은 (‘無’가 아닌) 마지막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대표적 환상 -나르시시즘, 연정, 종교- 은 그 형식에서 정확히 일치하며 그 알짬은 ‘사랑’이다. 찢겨진 삶을 가상적으로 미봉하는 증상, 그리고 상처받은 자의 마지막 도피처로서의 증상, 그러니까, 사랑의 환상을 주는 증상으로부터 B는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 마지막 남은 사랑의 증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할 리가 없는 것이다. B가 종교의 이름으로 선택한 사랑은 20세기 한국사의 풍진 세속에서 대표적으로 불행했던 한 여인에게 가능한 마지막 형식이었던 것이다. 종교만큼 세속의 것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만큼 완벽하게 반증불가능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환상 속에서나마, B라는 노인 속의 작은 여아(女兒)가 그 오래된 울음을 잠시라도 그칠 수만 있다면!

김영민 / 철학자, 한신대학교 교수

* <기독교사상>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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