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가 초래하는 타락과 분열
은사주의가 초래하는 타락과 분열
  • 최태선
  • 승인 2011.12.07 18:42
  •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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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도 '악마의 변호인'이 필요할까

운전을 하다보면 지금도 가끔은 선전문구를 잔뜩 써놓은 차들을 볼 수 있습니다. 화요 치유집회, 목요 은사 집회 등등의 안내와 더불어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라!"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들이 빨간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아직도 저런 것을 보고 저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이 막다른 길목에 다다르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가게 되는가 봅니다. 지금도 여전히 방송을 통해 가끔씩 기도원들의 한심한 이야기들이 방영되는 것을 보게 되니 말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면 기적이나 은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전보다 돈의 힘이 더욱 막강해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계산적이고 약아진 것이지 기본적으로 기적이나 은사에 대한 이해나 사고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몇몇 사람들의 은사집회는 몇 년 전에 예약을 해야 가능할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금의 교회 정체라는 현실을 타개하려는 교회들의 몸부림과 맞물려 그것이 복음의 본질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종의 현실 타개책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기적이나 은사는 기독교 고유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들 안에도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샤먼과 같은 종교라 할 수 없는 무속신앙 안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신의 현현이나 신의 역사로 포장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모든 종교 안에 다 있는 폭력적 유혹이며, 그것은 그 종교가 진리라는 증거가 아니라 그 반대로 깊은 종교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에 대한 오해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가는 초입에서 마주치게 되는 곁길입니다. 깊은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하고 머물게 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종교 안에 있는 초능력과 기적
 
명상이나 기도 중에 특별한 은사를 체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있는 일입니다. 신비주의는 기적적인 능력 혹은 초자연적인 능력과 연관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의 의식 상태가 샤먼적인 의식 상태와 같은데 샤먼의 경우는 약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이즘도 그렇고 불교도 수행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이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게 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상적인 상태에서는 얻을 수 없는 특수한 능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 능력을 힌두이즘에서는 '싯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싯다'를 수행의 길을 가다가 만나는 도로 표시판 정도로 보고 계속 나가면 깨달음에 도달하지만, 이 능력을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거기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내 앞에 부처님이 나타나 진리를 설한다 해도 궁극 목표를 망각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거기에서 나오는 초능력 같은 것을 악용하면 끝장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기적을 행하실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제한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주목하는 한 기적 자체가 목표가 되고 복음과 복음이 말하고 있는 진리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샤먼의 경우에도 그 능력을 악용해 혹세무민하거나 돈벌이에 급급하다면 나쁜 샤먼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수행을 지속해 나가면 참된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샤먼에게 이 윤리적 차원이 결여되면 문제가 커집니다. 능력 그 자체를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탈윤리적이라 해야겠지요. 능력 자체가 탈윤리적이므로 이를 윤리적으로 변화시킨 수 있도록 하는 도덕적 수행이 다시 한 번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신비주의 수행에서 수반되는 인간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통상 흑마술과 백마술로 불리기도 합니다. 흑마술이 이기적 목적을 위해 비일상적인 능력을 사용한다면, 백마술은 이타적 관점에서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 명칭이 의미하는 바는 능력 자체가 다르다기보다는 그 능력이 어떤 동기에 의해 활용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마술적 능력의 개발이나 소유가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도리어 이 능력이 이기적 의도와 결합할 경우 얼마나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되는가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마저도 체험자 자신과 개인과 주변인의 삶에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경고와 지적들이 신비주의 전통 내부에서 오랫동안 제기되어왔다는 점을 간과한 채 신비주의자들을 초자연적 능력의 획득에 사로잡힌 비합리적 광신주의자들로 비난하는 것은 굉장한 편견입니다.

이 말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입니다. 은사 자체를 부인하거나 은사주의자들을 광신주의자들로 매도만할 것이 아니라 은사를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말고 사랑 실천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더욱 노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경우에 명상이 깊어지면서 생기는 능력에 휩쓸리지 말고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집중할 것을 강조합니다. 극단적으로 선불교에서는 개인의 체험을 비롯해 비일상적인 경험에 대해 아예 말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고승들의 이야기 속에는 기적을 행하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는 것은 이러한 전통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승불교의 경우에는 제자 이외에는 절대로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설파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초능력들이 행해지고 있음에도 그것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힌두이즘 전통은 '요가수트라'로 대표되는 명상이나 수행 과정에서 얻는 다양한 초자연적 능력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도의 구루들이 요가와 같은 수련을 통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동작들을 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고행을 통해 인체가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힌두교의 수행방법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 자체를 궁극적 목표로 삼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종교 전통마다 신비주의적 수행 과정에서 등장하는 비일상적인 능력들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한 능력이 곧바로 신비주의의 핵심으로 간주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즉 수행 과정에서 등장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만을 확대해석해, 신비주의를 비합리적 믿음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대단히 성급하고 부주의한 결론입니다. 조금만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많은 신비주의 전통들은 이런 현상들을 실재와의 합일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것으로, 수행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도, 신비주의를 그저 초자연적인 현상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태도입니다.
 
기독교 안에서의 기적 이해
 
기독교 전통은 종교적 수행 과정에서 개발되거나 발견되는 비범한 능력에 대해 힌두이즘과 같은 종교 전통에 비해 그 이해나 체계화의 측면에서 많이 부족합니다. 그나마 가톨릭에는 오랜 세월 동안 발전되어온 '악마의 변호인'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쉽사리 기존 교회를 비롯한 기성 체제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톨릭은 '악마의 변호인' 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신심이 깊고 논리적인 이성을 충분히 갖춘 신부들을 전문가로 훈련시켜 기적이 발생했다는 지역에 파견하여 그 현상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 명칭을 '악마'의 변호인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적을 대하는 가톨릭의 기본적인 시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적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기적을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기적으로 인정하여도 그것을 대개 악마의 능력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 판정을 하는 사람들을 악마의 변호인이라 부를 정도로 엄격하게 기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전주 교구에서 율리아나라는 여인이 기적을 행해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미혹시키고 있는데 그 기적의 내용을 면밀히 조사하여 그것을 용인하지 않고 이단적임을 밝혀 미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의 종교체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 역시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서, 이른바 종교 체험의 춘추전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끊임없이 새로운 개신교 교파가 등장하는 데에는 이처럼 '종교 체험'이나 '기적'이 폭발적으로 점증하고, 개신교가 이를 제도화하는 데 어느 정도 실패한 것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실패' 때문에 신자들의 종교적 열정이 자유롭게 분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무분별한 은사주의가 횡행하는 어지러운 현실을 초래하여 기적 자체를 믿음의 유무(有無)나 다소(多小)로 인정하는 범하지 말아야 할 큰 오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현재에도 은사를 내세우는 한 교단의 선교가 아프리카나 제삼세계에서 일으키고 있는 문제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락과 기독교 분열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라는 말로 포장된 기적에 현혹되고 있는가를 보면 은사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와 이론적, 제도적 정립이 시급한 과제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적은 목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능력이 나타났을 때를 위험한 시기로 보고 그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비윤리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러한 능력을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관점이라는 것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혹세무민하는 샤먼의 길을 걷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할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마주치게 되는 교통 표지판과 같은 것이지만, 그 자체를 목표로 삼거나 거기에서 멈춘다면 영적 여정은 거기에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자랑하거나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과정으로 절대화 하는 경우 그 자체가 도그마가 되어 분열의 빌미를 제공할 것이며 대중을 지배하는 폭력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의 은사를 대하는 태도는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것을 자랑하거나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한 도구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일에 전념함으로써 남아 있는 신앙의 여정을 향해 가는 길을 멈추는 어리석음 역시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클 몰리노스는 주님과 함께 더 깊은 곳으로 동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음의 네 가지를 포기하고 이들에게서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피조물들
2. 현세적인 것들
3. 성령의 은사들
4. 자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갈2:20)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은사를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말하고 있는 동일한 내용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우리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영성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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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소리 2012-01-23 01:27:25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전파하셨는데 당신은 제자가 아니군요.비판자.버려야 할 성령은사- 성령하나님도 버릴사람이군요.

장로빈슨 2012-01-21 12:12:58
하나님의 손과발이 되어 오늘도 변함없이 동명노인복지센터를 방문하여 주셔서 치매 및 중증어르신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현경 2012-01-05 16:25:15
축 최초 3억 출/금자 탄생! (운영자님죄송요)
w w w . G U Y 0 4 . C O M 배팅만하세요
(유사 사이트에 현혹되지 마세요) 즐겨찾기 추가!
(접속시 사용자가 많아 로딩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가입방법,방법 되네 안되네 하지 마시고 모르시면 채팅,전 화
주세요 070-7951-4982
연예인,운동선수,정치계쪽에 종사하시분들이 인정하곳
강원랜드 이용하시던 회원분이 선호하곳

리플리 2011-12-28 04:22:14
교회역사학적으로 극단으로 불리는 사역이 지나면 균형을 찾아갑니다
요즘 많은 성력사역자들은 극단에서 균형으로 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한 제자사역과 성령사역을 통한 인격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왜 성령사역에 광풍이 불겠습니까?
제자사역이라는 이름하에 머리만 큰 성도 부패와교회분열이라는 상처만
안고 있는 교회에 새로운 대안이 될까하고 하는 바램떄문은 아닌지
성도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 목회자들이 먼저 각성해야 합니다!!

리플리 2011-12-28 04:20:03
좋은글 감사드리면서 나중에 기적에은사중지론이나 방언은사중지론을
어떡해 생각하시는지 글을 올려주세요
어떤분이 교회에 와서 방언한다고 강조한다고 난장판을 만드신 목사님이
계시다는 소리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성도들은 실제로 살아나고 삶에 변화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열매를 나타내는데 목사님이와서 방언한다고 사탄이라고 하는 분들 보면
안타깝습니다. 왜 다같은 은사인데 사랑의은사와전도의은사만 최고고
기적의은사는 중지되고 방언을 경멸하고 경기를 나타내는지 ...
방언은 은사에 하나고 하면 좋다고 강조해도 방언에 이상한 신학적견해를 가지고 경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