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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기복 신앙과 감정 과잉이라는 샤머니즘의 토양 위에 서 있다는 지적은 유동식 교수(<한국종교와 기독교>, 1965)에 의해 이미 연구된 바 있다. 이미 상식이 되어 있는 샤머니즘의 우상은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곯고 또 곯아 터질 지경이다.
거의 모든 설교에 기복 신앙이 중심이 되어 있다. 성경 인물들을 보면 물질적인 복은커녕, 목 잘려 죽은 세례요한, 돌 맞아 죽은 스데반의 일생도 있다. 나치즘에 대항하다가 사형당한 본회퍼, 시험용 주사 맞고 죽은 윤동주의 삶도 분명히 축복이며, 골고다로 향했던 예수의 걸음처럼,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 37:23)"실 축복이건만, 이러한 설교는 거의 듣기 어렵다.
대신, 이런 설교만 횡행하고 있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카네기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는 그 (물질적) 소원을 다 내려주십니다."
"건축 헌금을 위해, 하늘의 것에 쏟아붓는 자는 하늘이 모두 채워 주십니다."
이 말대로 하자면, 지금 경제적으로 못 사는 이들은 축복을 못 받은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 내가 출석했던 교회는 토요일마다 열리는 우에노 홈리스 예배와 미얀마 평화교회였다. 홈리스 곁에서 지내면서 걸인들과 함께했던 2,000년 전의 그분을 느끼곤 했다. 미얀마 교회는 아웅산 수치와 민주주의를 응원하면서 작은 헌금이라도 보탰다. 그런데 내가 사랑했던 우에노 광야교회의 홈리스들이나 미얀마 교회 교인들은 요즘 기복 신앙만 강조하는 한국 교회의 설교를 따르면 저주받은 공동체가 된다.
샤머니즘에서 감정의 과잉은 무당에 대한 충성으로 모인다. 무당에게 절대 충성해야 한다. 샤머니즘에서 도덕적인 윤리 기준은 전혀 필요 없다. 삼일교회에서 성폭력 문제로 잠시 물러난 당회장 전 목사에 대한 충성도를 보며 이와 비슷한 지나친, 윤리성이 삭제된 사랑을 느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일찍 문제를 지적하고, 당사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자숙하면 그때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에는 예수를 전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전하기보다 "우리 교회 나오세요. 목사님이 좋아요"라던 영화 '밀양'의 김약국 약사처럼 교회를 믿고 목사를 신앙하는 것이 아닐까? 허름한 예수님은 교회에 묵을 처소가 없는 게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샤머니즘적인 설교를 하는 교회들이 타 종교를 가장 많이 비방하고 공격한다. 재작년 물의를 일으킨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이 그 사례다. 땅 밟기의 성서에 따른 근거를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돌기를 들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성을 돌 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처럼 소리 내지 않았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수 6:10)"고 했다. '들레지 말며'라는 것은 들뜬 마음으로 야단스럽게 잡담하지 말라는 뜻이다. 혀끝 하나 잘못 놀려도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전도 방식은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었다. 사마리아인처럼 상처 받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조용한 선교, 그것이 전도의 가장 큰 방식이 아니던가.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전도 방식은 이토록 '잠잠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면 욕을 청하는 것이다. 사회와 이웃을 잘 섬기지 않고, '건물 우상', '기복 우상'에 갇혀, 그것만을 추구하니, '개독교'라는 신흥 종교로 평가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김응교 / 시인, 숙명여대 교수
* 이 글은 월간<기독교사상> 2010년 12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