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마스크를 벗은 기자와 목사, '말'을 말하다
아이 마스크를 벗은 기자와 목사, '말'을 말하다
  • 지강유철
  • 승인 2012.02.15 0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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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손석춘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 손석춘·김기석 지음 / 꽃자리 펴냄 / 1만 5000원  
 
10년간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을 지낸 한종호 목사님께서 지난해 말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대한기독교서회'로부터 내쳐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는 모릅니다. 속 깊은 한종호 목사께서 자신의 아픈 내면에 대해 쉬이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수십 년 된 전통을 자랑하는 대표적 기독교 잡지 <기독교사상>이 한종호 목사 후임 편집장으로 기독 언론이나 출판계에 종사해 본 경험이 전무한 분을 세우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통해, 그동안 잡지를 만드는 기독교서회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따름입니다. 작년 말, 한종호 목사를 위로하기 위해 몇 사람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손석춘 선생과 김기석 목사의 글이 출판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꽃자리'란 이름의 출판사를 만든 한종호 목사님이 첫 책으로 손석춘·김기석의 대화란 부제가 딸린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를 출간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연락을 준 것은 지난 1월 하순의 일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기독교 관련 서적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아이 마스크'를 쓰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우리 시대의 문제를 신앙으로 풀어내지도, 세상을 너무 닮아 버린 개신교인들의 가치관이나 몰상식의 해결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다수 신앙 서적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혼자 뒤처질까 봐 조금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대형 서점의 기독교 코너를 가끔 들락거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서재 진열용 책 구입에 시큰둥해졌고, 교계에서 화제가 되는 책에 대해 무지해진 자신을 발견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냥 덤덤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책이 갖는 의미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세상의 이치나 구원의 도리가 책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든 깨우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종호 목사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며 들고 나온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책에는 예의를 갖추고 싶었고, 왜 첫 책으로 손석춘·김기석의 대화를 선택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물론 저도 <기독교사상>의 정기 구독자였기 때문에 두 분의 연재 글을 듬성듬성 읽긴 했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반응하지 않았다면 그 책은 읽은 것이 아니고, 그 저자는 만나지 못한 것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분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에서 두 분의 기자와 목사님이 구사하는 모국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무덤덤하게 지나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더 눈여겨 본 것은 아름다운 문장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글과 말에 대한 두 분의 생각이었습니다. 먼저 김기석 목사님은 "말을 다루는 이들이 먼저 변해야 세상도 변하는 것(47쪽)"이라면서 글을 쓰는 이들의 책임이 '제 집을 잃고 세상을 떠도는 말들의 제 집을 찾아 주는 일(75쪽)'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김기석 목사님의 문장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있다면 사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김기석 목사님의 마음이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거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 둔감한 영혼을 깨우는 말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11쪽)"이 되었다는 사실을 더 안타까워하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날카로운 비판은 종교 지도자들의 언어에 집중됩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예로 들면서 김기석 목사님은 나치가 유대인을 박멸하기 위해 언어의 규칙을 바꿨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실제로는 학살과 아우슈비츠로 이송 명령을 하면서도 '특별 취급'이나 '재정착'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더니 학살자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자기 직무를 수행했다는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나긋하기만 하던 김기석 목사님의 목소리는 천둥소리로 돌변합니다.

   
 
  ▲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종교적 언어의 오용입니다. 나치는 학살과 아우슈비츠 이송 명령을 하면서도 '특별 취급'이나 '재정착'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더니 학살자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자기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사진은 나치 수용소에서 비극을 맞은 유대인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종교적 언어의 오용입니다. 가장 거룩한 것은 자칫 폭력과 결합되기 쉽습니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때 나의 외부에 있는 이들은 오류에 빠진 이들이 되고,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순간 그들은 제거해야 할 적이 됩니다. …(중략)…하지만 위험한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는 다 위험합니다. 근본주의는 성찰과 질문을 거절합니다(120~121쪽)."

이 책에서 손석춘 선생님의 목소리 톤이 가장 높아지는 대목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빚의 탕감'이라 번역해야 할 단어를 '죄의 용서'로 바꾼 복음서 기자들을 질타할 때입니다. 이는 언론에서 진실을 왜곡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나쁜 죄악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135쪽).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에서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이 책 밑을 흐르고 있는 겸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교만하다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기자와 목사의 책을 다 읽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첫 단어가 겸손이 되리라곤 저 자신도 예상치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를 무엇보다 겸손한 책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겸손한 기자와 목사를 만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저는 목사나 기자가 쓴 책 중에서 겸손함을 미덕으로 꼽을 만한 책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야심을 위해 겸손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뼛속까지 겸손한 사람들 중에서 글을 아름답게 쓰거나 책을 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목사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정독하는 동안 저는 본인에겐 실례가 되는 표현입니다만 김기석 목사님께서 징징거린다 싶을 만큼 반복하여 부끄럽다는 고백을 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처음엔 그 모습이 적응이 되지 않을 만큼 민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주변에서 자신의 부족을 그처럼 자주 진정성 있게 고백하는 목사님들을 쉬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생명적인 문화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뜻을 교회에서 실천하기 위해 1년간 육식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목사의 하루 24시간을 모르지 않는 저는, 1년이나 육식을 하지 않겠다는 그 결단으로 인해 본인은 물론 가족과 그 교회 식구들이 겪었을 불편함이 눈에 선합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것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목사란 그런 존재일 테니 말입니다. 십중팔구,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은 목사님 주변 사람들 보기에 그렇게 거룩해 보이거나 대단해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견뎌내야 하는 어려움에 비해 보상이 너무 적게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보처럼 그런 무모한 결단을 하는 김 목사님의 모습에서 저는 겸손을 읽었습니다. 손석춘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쓴 2011년 12월에 쓴 글에서도 김기석 목사님의 겸손함은 발견됩니다. 아직 크리스천도 아닌 손석춘 선생님이 보물인지도 모르고 소홀히 다루어 왔던 성경의 가르침을 닦고 윤을 내 우리 앞에 내놓았다며 "이제 성경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323쪽)"을 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연재를 다 끝내고 쓰신 게 분명한 '들어가는 말'에서도 이런 구절은 빛이 납니다.

"우리가 주거니 받거니 이어 온 이야기가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다(14쪽)."

이 밋밋한 문장과 소박한 기대를 한국 교회 목사님이 쓰신 게 맞나 싶더군요. 적어도 제겐 그랬습니다. 그것은 김기석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만났던 빛나고 아름다운 문장에서 느꼈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손석춘 선생님의 모습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감히 하느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은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에 이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는지, 또 무엇을 소망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중략)…김 목사와의 인연으로 어쩌면 신에게도 '지옥'이었을 '인간에 대한 사랑'에 한발 더 나간 느낌이다(326~327쪽)."

18개월 동안의 연재를 마치고 손석춘 선생님이 '나가는 말'에서 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를 가정하면서 이제까지 쓴 시사 칼럼과 정치 평론집, 커뮤니케이션 학술서, 소설들을 잔뜩 벌여 놓은 자신의 좌판을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단숨에 모두 엎어 버리지 않을까"라고 반문하는 비기독교인(?)을 아직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겸허 내지 겸손 말고는 손석춘 선생님의 그런 생각을 표현해 낼 단어가 제겐 없습니다.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에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추천사와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총무 김인국 신부님과 손석춘·김기석의 연재를 이끌어 낸 한종호 목사님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발문(跋文)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빼어난 신부님과 목사님의 글은 이 책을 더 잘 알릴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글이기에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책의 자세한 내용은 여백으로 남겨 두려고 합니다.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흐르고 있는 점이 죄송하긴 합니다만 이 책에서 얻은 소중한 가르침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 서평을 마치려고 합니다.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는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과 몸을 가지런하게 하고 읽은 신앙 서적입니다. 두 분의 글을 읽으면서 다짐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디서든 지식인 행세를 드러내놓고 한 적은 없지만 내면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던 지식인이라는 허위의식을 버리려고 합니다.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볼 때 지식인이라는 허위의식을 날렵하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수첩공주'가 울고 갈 만큼 빈약한 우리말 어휘를 구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쓰겠다는 욕망 또한 쉬 떨쳐 버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손석춘 선생님이나 김기석 목사님처럼 이미 내 일상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언론·그림·문학 작품과, 그것들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삶을 지탱할 수 없는 자연의 묵상을 통하여 삶과 신앙을 더 깊이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편지의 서두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습관적이고 관념적인 계절 인사에서 삶과 신앙의 의미를 배우는 법을 가르쳐 주신 두 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지강유철 /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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