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분리 하려면 일관되게 했어야
정교분리 하려면 일관되게 했어야
  • 김태훈
  • 승인 2012.02.28 0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방 후 한국교회사' 70, 80년대 기독교 사회운동 다뤄

   
 
  ▲ 이만열 장로는 청년들에게 정신 차려야 한다고 요구하였고 정교분리에 대한 일관성도 강조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강의 순서 바꾸면서까지 기독교 운동 자세히 다뤄

이만열 장로는 '해방 후 한국 교회사' 여섯 번째 강의에서 '무게중심을 조정'하면서까지 기존의 강의 순서를 바꾸었다. 원래 계획된 순서는 '성경 번역과 찬송가 편찬'이었는데,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선교, 인권 및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먼저 다루겠다는 것. 이에 대한 이유는 "(오늘 다룰 내용을) 먼저 할 필요가 있고, 마지막 시간에는 대화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또한 강의 진행에 대해 '한국교회가 그 당시에 사회운동을 어떻게 했느냐'에 중점을 두면서, '민주화, 통일 운동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노동 운동 분야'를 포함하되, "양이 많아서 페이지를 (빨리) 넘기며 필요한 것만 설명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전날에 배포한 강의안은 A4용지로 14쪽이고, 이 장로가 사진 자료를 첨부해서 준비한 파워포인트 강의안 슬라이드는 총 87쪽에 달했다. 평소에 비해서도 분량이 많았고 순서를 바꾸면서까지 힘주어 강조한 주요 사건들이 적지 않았고 또 그만큼 수강생들에게도 다가오는 배움도 크고 많았다.

본격적인 강의는 먼저 시대적 배경이 되는 박정희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려고 했는데, (정권에) 들어서 보니까 국고가 텅텅 비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경제개발에 힘쓴 것"이라고 운을 떼었고, "2차 산업이 늘어나면서 인권 침해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때 기독교가 어떻게 했느냐를 자세히 볼 것"이라며 강의의 방향을 잡았다.

   
 
  ▲ 해방 후 한국 교회사 여섯 번째 강의는 순서를 바꿔서 기독교 사회운동을 다루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당시 노동운동은 기독교가 선도했다

이 장로는 "당시 노동운동은 기독교가 선도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노동자와 빈민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교회가 경제성장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던 민중의 삶에 눈뜨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산업 선교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예배 및 전도지 배부 같은 과거의 전도 방식에서 벗어나 노동자 교육,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 노동조합 조직 지원 같은 노동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의 방향이 이처럼 전도에서 노동자의 권익 향상과 노동 사회의 발전으로 이동한 것은 노동 현실과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피부에 닿는 말씀 선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이 장로는 이러한 자각이 "기독교인이 섬겨야 할 그리스도가 곧 근로 대중임을 인식한 것으로, 민중신학 이전의 민중 신학적 사유였다"고 평가했다.

도시산업선교는 급속한 산업화의 부정적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반부터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서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결성과 교육 및 단체 행동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비방과 간섭이 계속되어 용공 활동으로 매도되기도 했는데, 이 장로는 "요즘 말로 하면 종북 좌파라 (매도)하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한편 당시에 정부나 산업자 쪽에서 공공연하게 "도시산업선교회(줄여서 '도산')가 가는 곳이면 도산된다"는 소문을 일부러 만들어 활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기독교적 사회운동은 기독교 영성 포기하지 말아야

노동자와 교회의 연대는 1978년의 동일방직노조 사건, 1979년의 YH 사건 등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동일방직 사측이 노조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불량배를 동원하여 여성 노동자들에게 배설물을 뿌린 것에 대해 이 장로는 "당시에 얼마나 폭압적이고 비인도적이었느냐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YH무역 사건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의미 부여하면서, "정부의 탄압이 절정에 달한 사건이며, 10.26까지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YH 사건에 도시산업선교가 배후에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9월 산업 선교를 빙자하여 근로자들에게 법을 어기도록 선동하는 '소수 목사들의 불법행위'는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정치 활동이라고 위협하며,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의 황주석·서경석·인명진 등을 구속했다. 이 장로는 "서경석·인명진 목사는 지금도 굉장히 자주 듣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뿐, 보수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둘 다 통합 측 계통이어서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당시 (그들이 활동했던) 새문안교회 청년부가 의식이 강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80년대 중반까지 지도적 역할을 많이 했으나, 그동안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도시산업선교회 대신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스스로의 권익을 찾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산업 선교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이 장로는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계속 나가야 하는데, 운동하는 동안에 기독교적 영성을 잃어버렸다"고 분석했다. "일반 노동자들이 하는 운동이나 다를 바 없게 되어서, 노동자들은 더 강하게 운동하는 사람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에 관해 "중요하게 발견하는 것은 기독교적 사회운동은 기독교적 영성을 끝까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도출했다.

70년대 빈민 선교 힘썼으나, 오늘은 자기 배 불리기에 급급

산업 선교와 함께 일어난 또 다른 선교 활동은 도시 빈민을 대상으로 한 선교였다. 1960~70년대의 경제개발 정책은 농어촌을 황폐화하고 공장 노동자 수요를 급증시켜 농어업 종사자들의 대규모 이주 현상을 유발시켰는데, 이주민의 대부분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몰려들어 판자촌으로 대표되는 도시 빈민촌을 형성했다. 이러한 도시 빈민촌의 확산은 교회에 도시 빈민을 위한 선교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었다.

빈민 선교에 대해서 이 장로는 "지금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라. 우리 교회가 이런 데 관심 갖는 데가 있냐"라며 강하게 반문했고, "(한국교회는) 자기 배 불리기에 급급하고 있다. 배가 불러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난한 자의 눈물에 동참하겠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라며, '지금은 다 죽어 있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또한 "선교비로 몇 푼 도와주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교회들의 소극적인 선교 활동에 대해 일갈했다. 한편 빈민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교회로 "광염교회 같은 곳이 몇몇 있다"고 소개했다.

도시를 중심으로 산업 선교와 빈민 선교가 진행되는 동안 농촌에서는 가톨릭농민회와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의 농민 선교가 전개되는 등, 교회는 급속한 산업화가 초래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산업 선교, 도시 빈민 선교, 농민 선교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 밖의 인권 및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사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연대별로 정리해서 간단하게" 뽑아 보았다. 이 장로는 "어떤 유형을 만들어서 서술해야 하는데"라며 강의안이 단순히 시대 순으로 서술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계속 사건이 반복되며 교차되어 나오니까"라고 말하며, 간략히 넘어갔다. 하지만 당시 활동했던 여러 인물 중에 홍성현 목사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했다. 대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알게 된 홍 목사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의식이 강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새문안교회 전도사하면서 교회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말했다.

한일협정 비준 반대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이것을 '군사혁명이라고 부르며 나라를 공산 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부패로부터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라는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조속한 민정 이양을 촉구하기는 했지만, 반공과 친미를 앞세운 쿠데타 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를 안타까워하면서 이 장로는 당시 한 교계 신문이 "권위 있는 정부 밑에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아부했던 사진 자료를 보여 주었다. 더 나아가 한경직·김활란 등 교회 지도자들은 쿠데타 직후인 6월 하순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도미했다고 소개했다. 이어서 당시의 미국에 대한 평가도 날카롭고 거침없이 이어졌는데, 정중하게 'off the record'를 요구했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일본의 자본을 통해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 정상화를 서둘러 타결하려 했다. 일본을 용서하기에는 때가 이른 데다 협정의 내용을 굴욕적이라고 판단한 교회는 한일국교 정상화 및 한일협정 비준 반대 운동에 가담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정치와 타협해 온 교회가 보인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일본이 강한 힘을 가지고 강제로 점령했던 것이다. 이제야 우리(나라)가 일본에 사과하라고 요구하는데, 그럴 것 없이 법 조항 하나를 넣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법 조항도 만들지 못하고 사과도 받아내지 못했으면서 너무 성급하게 국교 정상화를 해서 역사가 꼬였다는 분석이다. 또한 "한국교회로서는 당시 깨어 있는 그룹이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분통 터질 일이다. 신사참배로 너무 많이 고통을 받았다. 사과도 못 받고 국교정상화한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개탄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 강신명, 강원룡, 김재준, 한경직 등 215명의 교회 지도자들은 영락교회에 모여 구국 기도회를 열고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한 구국 기도회가 열려 굴욕적인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했지만, 한일협정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반대 운동 자체는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이 장로의 평가대로 이때의 경험은 '교회의 비판적 사회참여'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삼선개헌을 둘러싼 교계의 찬반 논쟁

한일협정 비준 반대 운동 이후 교회의 정부 비판은 박정희 정권이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하여 장기 집권을 강행하려 할 때 절정에 달했다. 김재준·함석헌·박형규 등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회 지도자들은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앞장섰다.

한편 이 장로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개인사적으로 중요한 날짜와 맞물려서 기억을 잘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삼선개헌안이 발표된 1969년 9월 14일의 하루 전에 큰아들이 출생했고,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72년 7월 4일의 다음날에 둘째 아이가 출생했다는 것. 이에 대해 이 장로는 "하나는 나쁜 날 하루 전에, 다른 하나는 좋은 일 하루 후"라며 재미있게 해석했다.

하지만 삼선개헌을 둘러싼 교계의 찬반 논쟁도 있었다. 이 장로는 이 논쟁이 "교회가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보수 세력과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진보 세력으로 확연히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유신 체제가 시작되자 진보적 기독교 지식인을 중심으로 정권을 무조건 지지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비민주적인 정치 현실을 비판했으나, 대부분의 교회는 적극적 혹은 묵시적으로 지지했다. 국민들을 동원할 때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1973년의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나 한국그리스도인선언 등 기독교인들의 저항적 실천도 있었다.

유신 40년과 이 정권을 살아가는 청년들, 정신 차려라

이 장로는 "(유신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잘 모를 것"이라고 운을 떼면서, 유신 체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선거를 통해 2/3를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고, 긴급조치법은 일반 형법보다 무시되었다. 또한 올해가 유신 40년이 된 해라고 하면서, "정신 차려야 한다"고 일축했다. 이어 수강생들에게 "여러분들!"이라고 부른 후 강력한 역사적 메시지를 길게 설파하였다. 연로한 신앙의 선배가 후배들에게 역사를 바로 알아 의식 있는 역할을 당부하기 위해 단호하게 염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이어 4·19 운동을 간략히 다루면서 "(이 정권이) 4년 동안 실정하면서 법 어기는 것을 예사로 하고 있는데,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뭐하고 있나"고 따져 물었다. "그 당시는 더 어려웠는데, (청년들이) 이런 거 했다"면서 같은 청년들에게 도전을 던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그런 (엄청난) 일을 해서, 그 뒤에 산업화의 축복이 왔다"며 다소 단순화시켜서 평가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오늘날은 순서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또한 "최근 4년 동안 대학생들이 등록금으로만 데모했던 기억밖에 없다"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학교에서 쫓겨난 쓰라린 경험

1974년에는 '유명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이 4월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중·민족·민주선언' 등을 발표하고 연합 시위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사전에 당국에 알려진 사건이다. 이 장로는 "요새 60대 전후 사람들 가운데서 국회의원이나 정치 운동 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정부의 인권 탄압이 심해지고 기독교인 구속자가 늘어나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에 '인간 존엄성에 관한 성서적 신앙'에 의거하여 '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수행할 인권위원회를 창설하여, 기독교계의 인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 기소자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비롯된 목요 기도회로 이어졌다.

이 장로는 "이때 중요한 것은 NCCK 총무 김관석 목사였다"고 말했다. "이런 분들이 굉장한 노력을 했고, 갖은 협박과 고난을 받아 가면서, 이런 분들이 있어서 NCCK를 뜻있는 기관으로 만들어 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김 목사를 "독일 원조금을 다른 목적으로 썼다는 이유로 집어넣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회안전법, 민방위법 등을 만들고, 교육 관계법을 개정하여 교수 재임용제를 실시하도록 했다. 이는 대학교수들의 비판적인 기능을 억누르고, 정권에 비협조적인 교수들을 축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6년 2월 문교부는 전국 대학에 교수 재임용을 실시하여 총 416명의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에 대해 이 장로는 "이러면 교수들이 벌벌 떨어서 (비판적인) 발언과 행동을 못 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 장로도 축출된 경험이 있다. "7월 말에 합동수사본부에 잡혀 들어갔고, 4년 1개월 동안 학교에서 쫓겨났다"며 민주화 운동 관련되어 학교에서 해직된 경험을 밝혔고, 이에 대해 '쓰라린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정교분리를 하려면 철저히 일관되게 해야 한다

1970년대 이후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며 박정희 정권과 유착하는 모습을 보였던 교회의 지지와 순종은 설교나 성명서, 기도회 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1973년 5월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서 한국대학생선교회의 김준곤은 10월 유신을 '정신 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운동'으로 규정하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것이 성공하기를 기원했다. 이 장로는 "교회와 정치권력이 합작해서 만든 이와 같은 조찬 기도회가 불의한 정치권력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정교분리를 철저히 하면 이해가 간다"며 말문을 열었다. "용기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러려면 일관되게 해야 한다"면서 "정권에 비판을 하지 않으려면 손뼉 칠 때, 조찬 기도회 오라고 할 때에도 일관되게 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판할 적에는 안 하고, 찬성할 때에만 참여하는 것은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에도 편향적이지 않는 일관성을 강조했는데, 보수 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이어서 "(수강생 중에) 목사님들도 계신데, 죄송하다"고 운을 떼며 "조찬 기도회에 가는 것을 빙자해서 (교인들에게) 고급 차를 달라고 하는 목사도 있다"고 말하면서, "세상에 이게…더 이상 말을 못 하겠다"고 뒷말을 잇지 못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했다.

아울러 교회와 군사정권의 협력 관계는 전두환 세력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다시 나타났다. 초헌법적 기관으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축복하기 위해 열린 1980년 8월 6일의 조찬 기도회에 대해서 "기독교 역사에 오래 기억될 수치스런 행사였다"고 평가했다.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만행을 축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종교들 중에 최초로.

일반 민주화 운동 단체들의 주도권이 강화되면서 이전에 비해 영향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사회참여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김명혁·손봉호 등 보수적인 교역자와 신학자들이 1981년 조직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도 시국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협의회는 보수 진영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이 장로는 "신군부를 지지한 목사가 고문으로 있는 한국복음주의협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서 진보와 보수의 역할론을 제시했다. "진보적 기독교가 한국 기독교의 체면을 세워 주었고, 수적 발전은 보수에서 감당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에 손봉호 교수가 "보수적 입장에서 그때 부끄러웠다. 양해가 된다면 진보는 민주화 운동에 힘썼고, 보수는 교회 성장에 힘썼다고 정리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마라

시간이 다 되어서 애초에 계획된 '통일 운동'에 대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하기로 했다. 이 장로는 긴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기독교가 '도산', '빈민 선교'에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의 인권 민주화 운동에 대해 역사적으로 굉장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음을 계속 강조했다. 심지어 "가톨릭보다 훨씬 강했다"라며 "한국 기독교가 굉장히 선도적 역할을 했음"을 거듭 강조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장로의 역사적 평가는 계속 이어졌다. "거듭 말하지만 투옥당하고 고난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분들이 희생되어 줌으로써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자유, 민주화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또한 수강생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희생됨으로써 우리가 이 정도의 인권, 민주화 누리고 있다면 10~20년 후의 후손들을 위해서 (일정한) 값을 지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책임 있는 역사의식을 요구했다.

한편 이 장로는 강의 당일 오후에 시위를 겸한 기자회견을 하고 왔다. 북악산 산중턱에 군부대 막사 설치하는 공사에 항의하는 2월 7일 자 한겨레 사설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역사에 무임승차하는 사람 되지 마라. 그것은 부끄러운 역사이다"고 말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질의응답 시간은 따로 갖지 못했다. 대신 뒤풀이 모임을 강의실 아래에 있는 한 카페에서 진행했는데, 역대 가장 많은 수강생들이 참여했다. 강의의 무게중심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교회사를 공부했더니, 수강생들도 자신의 삶의 무게중심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특히 처음 뒤풀이에 참석한 수강생들도 많았는데, 그 엄청난 무게감을 혼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함께 나누어지자는 무언의 요청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그랬다. 혼자 지고 가는 짐은 무거우나, 함께 지면 가볍다고. 게다가 가는 길에 함께 가는 이들을 새롭게 만나면 더욱 신나고 즐겁기까지 하다. 뒤풀이 참석자들은 모두 즐거운 표정으로 '삶의 중심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역사적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이 일상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등을 길게 나누면서, 앞으로 계속 잘 공부하면서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지기로 했다.

   
 
  ▲ 이번 뒤풀이에 가장 많은 수강생들이 함께했다. 각자의 삶의 중심을 돌아보고 감동과 고민, 질문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