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 도성과 에덴
가인과 아벨, 도성과 에덴
  • 이영재
  • 승인 2012.03.31 2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성 문명의 죄, 이기주의에서 성경으로 돌아가라"

   
 
 

▲ 에덴 추방의 결과는 도성의 건축으로 이어졌다. 도성의 건축자는 살인자였으며 불신자였다. 가인은 수면 위에 운행하던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존재를 휘감고 감동하고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다. (한국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총선 공천이 끝났다. 유권자들은 누가 좋은 후보인지 선택해야 한다. 무슨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할 것인가? 기독인들은 후보를 고를 때 성서의 말씀에 근거해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표의 원리를 읽어 낼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예수님의 선포가 후보 선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구약성경에서 나온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훼 말라크'인데 이와 유사한 말로는 '마믈레코트 하코하님' 또는 '말쿠트 하샴마임'과 같은 용어들이 있다. 이 말들은 공통되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장면은 오로지 창세기 1~2장에서만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곧 에덴동산 표상이다.

범죄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며 죄가 증대함에 따라 도성 국가가 출현하였고 폭력의 죄가 더욱 심화됨에 따라 세상에는 도시국가들이 즐비하게 번성하게 되었다. 이 모든 악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나라인 에덴동산으로 복귀하여야 한다. 에덴동산 추방기는 창세기 3장 23절에 보도되어 있다. 죄의 증대는 창세기 4장 2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제부터 이 두 본문을 공부해 보자.

가인의 악한 길

창세기 3장 23절은 창세기 4장 17절로 귀결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창 3:23)은 마침내 에녹성이라는 도성을 건설하게 된다(창 4:17).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도성의 건설'이라는 상이한 주제 사이에 무슨 연결점이 있는가? 에덴은 도성의 반대개념으로 제시되어 있고, 도성의 대안으로서 에덴이 제시되어 있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창세기 4장 2절이 가로 놓여 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라는 진술이 에덴동산 추방사건과 에녹 도성의 건설 사이에 들어 있다. 가인의 직업이 에덴과 도성 사이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창세기 3장에서 4장으로 넘어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창세기를 해석하는 종래의 시각에 좀 더 깊이 있고 새로운 관점이 드러나리라 기대한다. 이제부터 이 세 가지 본문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자. 우선 신약성서의 요한일서에 가인의 직업에 대한 평가가 아래와 같이 나온다.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동생을 쳐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요일 3:12[새번역])."

가인은 의로운 아벨과 대조되게 악하였다. 가인이 한 일은 악했다. 그런데 창세기 4장 2절에는 가인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요한은 농사짓는 일을 악한 일로 간주했다는 말인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창세기 4장 2절을 어떻게 읽었길래 가인이 악한 일을 하였다고 평가했을까? 또한 유다서에도 '가인의 길'이 저주받은 것으로 평가한다(유 1:11, 테 호도 투 카인). 농사를 지었던 가인의 생업이 왜 이토록 오랜 전승사에서 저주받은 길로 정착된 것일까?

가인의 육적인 삶

창세기 4장 2절의 히브리어 원문에 그 해답이 있다. 이 원문은 바로 앞의 창세기 3장 23절의 표현과 거의 동일하다. 이 두 평행되는 본문의 관련성을 해명해야 가인의 농사가 왜 악한 직업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래의 두 본문을 비교해 보자.

창4:2, <워카인 하야 오베드 아다마>
창3:23, <라아보드 엩-하아다마 아쉘 루칵흐 미샴>

위의 밑줄 친 구절은 동사 '아바드'에 목적어 '아다마'가 붙어 있는 어구이다. 이 어구는 '땅을 경작하다/땅을 갈다/농사짓다'라고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에서 단 한 차례 더 나오는데 농사짓는 행위를 가리키는 숙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창세기의 문맥에서는 '농사짓다'라고 번역하면 곤란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어구는 창세기 1~9장에서 무려 다섯 차례나 사용되어 사람의 타락 과정을 묘사하는 데 채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숙어가 사용되는 용례들을 나열해 놓고 비교해 보자.

창2:5, <워아담 에인 라아보드 엩-하아다마>
창2:15, <와얀닉헤후 버간-에덴 러압다흐 울샴라흐>
창3:23, <라아보드 엩-하아다마 아쉘 루칵흐 미샴>
창4:2, <워카인 하야 오베드 아다마>
창4:12, <키 타아보드 엩-하아다마>
창9:20, <와약헬 노악흐 이쉬 하아다마>

위의 밑줄 친 부분이 모두 동일한 어구로 '아바드+아다마'로 이루어져 있다. 맨 밑에 창세기 9장 20절의 어구는 '하아다마'로만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아바드' 동사가 생략된 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어구는 첫 사람이 창조되던 시원의 때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의 시대를 거쳐서 마침내 노아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변천사를 암시해 주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사는 동안에 사람은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과 같이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아바드+아다마' 어구를 직역하면 '흙을 섬기다'가 된다. 이 표현을 좀 더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창조하신 땅의 질료를 이루는 흙에 사람의 존재가 투여되어서 그 흙에 생명력이 신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흙에 일하여서 흙을 살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때 '아다마'는 땅이 아니라 흙을 가리킨다. 땅은 공간개념이지만 흙은 질료개념이다.

창세기 2장 5절은 사람을 창조하게 된 하나님의 동기를 밝혀 준다. 사람이 생겨난 이유는 흙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일을 하는 동역자가 야훼 하나님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땅에서 생명창조를 계속 하시려는 하나님의 동역자 내지는 하나님의 종으로 활동하는 사명을 지니고 생겨났다. 이 일은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날마다 수행해야 할 작업이었다. 이것이 창세기 2장 15절이 의미하는 바이다.

참인간 : '타자를 위한 존재'

창세기 1~2장의 문맥에서 이 어구가 표현하는 바는 사람이 에콜로지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신장하는 핵심되는 존재로 활동하였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이러한 존재를 '에코-호모(eco-homo)'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싶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행동하였다. 하나님은 조물주이시니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작품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가장 보편성을 담보하신 분이시다. 사람이 이 하나님을 닮아 살았으니 이로써 모든 피조물이 사람을 통해서 복을 받고 생명이 번성하였다. 사람은 햇빛과 같은 존재였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 살 때, 참으로 보람되고 기쁨에 넘치는 노동의 삶이 사람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부터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었다. 이것이 창세기 3장 23절이 의미하는 바이다. 사람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질료로서의 흙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표상과 정반대가 된다. 인간중심주의가 사람의 삶에 출현하게 되었다. 아담은 이제부터 자신의 육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에덴 추방으로 대표되는 타락의 진짜 의미이다.

인간중심주의란 말은 영어로 ego=centrism이라 번역할 수 있겠다. egoism도 마찬가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타자를 중심으로 배려하는 사랑의 삶이 에덴동산 이후로부터는 깨어져 버렸다는 말이다. 선악을 알게 된 사람의 내면에서 이기적 욕망이 독버섯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숨을 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여 소통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사람의 속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영이 망각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육을 만족시키려고 일하는 존재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었다. 자기중심의 인간은 더 이상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에코-호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추방하신 까닭이다.

이 문맥에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대비하는 것은 맞지 않다. 서구의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부정하는 운동이 아니라 일그러진 인간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자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은 중세에 교회주의자들이 억압하고 있던 인권과 자유를 되찾으려는 인간 본성의 운동으로서 누구나 복되게 살면서 피조물의 생명력을 드높이라는 인간의 사명에 따른 운동이다. 휴머니즘은 성경적인 운동이라 하겠다.

가인은 추방된 아담의 뒤를 이어서 자신의 육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였다. 자기중심주의로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벨은 가인과는 반대로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다른 생명을 먹이고 살리는 일에 집중하였다. 아벨은 가인과 정반대로 살았다. 이 대조법이 창세기 4장 2절에 표현되어 있으니 비교해 보자.

창4:2전,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와여히-헤벨 로에 촌>
창4:2후,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워카인 하야 오베드 아다마>

위의 두 문장에서 밑줄 친 부분은 정반대되는 개념을 표현하다. '로에 촌'은 '양을 치다'라고 번역했고 '오베드 아다마'는 '농사하는 자'라고 번역했다. 이것을 다르게 번역하면 아벨은 양을 먹이는 일을 하였지만 가인은 그와는 달리 흙을 섬기는 일을 하였다가 된다. 이때 '흙(아다마)'는 창세기 3장 23절의 '흙(아다마)'을 가리킨다. 가인은 맏아들로서 에덴에서 추방되어 타락한 아버지를 계대하여 육을 소욕에 따라 살았다. 그러나 아벨은 둘째 아들로서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고 자신도 구원받기 위해서 원인간의 모습을 따라 타자를 먹이며 살리는 일을 하고 살았다. 가인과 아벨의 삶은 이런 점에서 극명하게 대조가 된다.

이러한 나의 성경 읽기는 성경의 최종 본문을 문학비평의 방법으로 읽어 본 결과이다. '아바드+아다마' 어구의 말놀이(word-play)는 창세기 초입에서 매우 영적인 묵상의 깊이를 요청하고 있다. 이 어구는 바울의 고백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 말놀이의 영성은 사도 요한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으로 간략하게 정리되었다(요 6:63).

도성 문명의 우상숭배 : 이기주의

하나님의 영을 알지 못하고 육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그래서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에덴으로 복귀하는 구원은 인간의 육에 편중된 삶의 태도를 버리고 영육이 잘 조화를 이루는 신앙생활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육의 공로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인론(내지 칭의론)의 단초가 에덴동산 추방의 이야기에 깃들어 있다.

이제 가인이 건축한 도성 에녹을 보도하는 창세기 4장 17절에로 시선을 돌려보자. 에덴 추방의 결과는 도성의 건축으로 이어졌다. 도성의 건축자는 살인자였으며 불신자였다. 가인은 수면 위에 운행하던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존재를 휘감고 감동하고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다. 가인에게 영적인 감응력은 부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도성의 문명을 구가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가인의 후예들이 도성을 발전시키다가 노아홍수를 당하고 말았다.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은 셋을 주셨다. 셋의 후예들은 아무도 홍수의 심판을 당하지 않았다. 최장수의 므두셀라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 곧 홍수가 터지던 해에 죽었기 때문이에 셋의 후예 중에 대홍수 심판을 목격한 사람은 노아뿐이었다. 그러나 영웅적 엘리트들이 폭력으로(창 6:10) 지배하던 도성들은 다 진멸당하고 말았다.

폴리스에서 성경으로

정리하자면, 오경은 도성 문명의 시발을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된 결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도성은 에덴의 반대개념으로 제시된다. 이제부터 도성의 이야기가 오경을 줄기차게 가득 채우게 되며 성경전서에 걸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게 된다. 도성은 히브리어로 '이르'이며 그리스어로 '폴리스'이다. 영어성경은 일제히 city라고 번역했다. 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도시화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폴리스'는 도시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며 히브리어 '이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도성마다 왕이나 영주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도성의 본질은 영웅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삶의 자리이다. 이것이 곧 국가의 본질이다.

총선을 앞두고 시끄럽다. 저마다 국가와 도시의 번영을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정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국가 없이 교회 없다'는 슬로건을 내건다. 이 슬로건은 전혀 성경의 근거가 없는 세속주의 사상이다. 성경은 거꾸로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는 국가는 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이다.

창세기는 더 나아가서 '자기'를 죽이지 않는 사람은 도성 내지는 국가라는 폭력 단체를 넘어서 에덴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말씀한다. 총선에서 우리 기독인들은 후보자들이 참으로 진실하게 타인을 섬기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는지 그의 이력을 살펴야 할 것이며, 또 그의 공약이 지역 개발이나 국가 번영이나 부국강병이 아니라 상호 호혜와 평등과 평화의 가치를 얼마나 절실하게 호소하는가를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무장해제와 군대 해체를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평화통일을 방법적으로 잘 구사하려고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물질 숭배에 빠지지 말고 사랑의 가치에 몸을 던진 인물이 정치 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적합한 인물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어떻게 할까? 우리 기독인들은 교회 안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 신앙 공동체의 삶 속에서 사랑과 평화의 삶을 꽃 피우어야 할 일이다. 세상은 본디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늘 그렇게 죄인의 이기적 이해가 충돌하는 현장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영재 목사 / 전주화평교회, 전주성경학당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