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 김범수
  • 승인 2012.04.03 10:12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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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가 세운 헌금의 원리

십일조 논쟁과 느헤미야

십일조 논쟁이 여전하다. 어떤 이는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한다.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는 것도 세계적으로 드문 관행이라 하고 제사장과 성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제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한다.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며 십일조를 옹호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다만 성경적 근거는 있는데 대략적 언급만 있을 뿐 세부 사항은 명확하지 않다. 물론 먹을 것 입을 것 아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리는 정성은 한국교회의 미덕이다.

십일조 논쟁의 이유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님을 안다. 십일조를 거두어 엉뚱한 데 사용하고 회계도 불투명하기 때문에 십일조를 공격하는 것이다. 돈 밝히는 부흥사들은 십일조와 말라기 그리고 축복 강조 해왔다. 나도 그게 얄밉다. '교회를 바로 세우려면 삯꾼들의 십일조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는 심정도 이해한다. 교회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며 여태 드린 헌금도 돌려받고 싶은 심정도 이해한다.

반복되는 십일조 논쟁에 똑같은 논의 계속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십일조를 내는 이유’를 이야기 하고 싶다. 바로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정신이다. 느헤미야에 나오는 이야기다.

느헤미야의 십일조

모세 오경에 십일조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제사장을 위한 헌금인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모금인지 모호하다. 역사서에서 십일조는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철저히 십일조를 드렸다면 갖가지 시행세칙이 분명했을 것이고 그 사례들이 역사에서 발견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십일조는커녕 하나님까지 저버리고 멸망을 맞았다.

십일조는 포로기 이후 다시 등장한다. 해방된 이스라엘이 에스라를 통해 율법을 듣고(느헤미야 8장) 초막절을 지키기로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 이후 한 번도 초막절 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렇게 율법에 기록된 초막절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이라면 자기 수입을 기꺼이 나누어 십일조를 했을 리가 없다.

이스라엘이 에스라를 통해 회개한 후 율법을 지키겠다며 서약 하는 장면은 시내산 언약을 연상시킨다. 이 단체 서약에서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어 첫 소산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약속이 이어진다. 그들은 성읍을 다시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참 이스라엘 백성이 모인 율법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결의가 충만했다. 그러려면 레위인과 제사장을 세우고 그들의 생계를 돌봐주어야 했다. 이스라엘은 이 때 다시 십일조를 선택한다.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느헤미야는 율법을 따르되 문자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 여호수아 이후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파 중심의 체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성전 제사와 율법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십일조가 필요했다.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율법 정신에 따라 공동체를 세우는데 맞춰 사용하려 했다. 현대교회가 레위기의 십일조보다 느헤미야의 십일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교회를 시작하면서 세운 원칙 중 하나는 등록 교인의 경우 십일조를 약속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복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나와 후손들에게 지속적인 말씀이 선포되도록 하기 위해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를 모아 넉넉지 않지만 목회자 사례와 교회 운영비를 감당하며 사역을 돕는다. 대신 다른 명목의 헌금은 거의 하지 않는다. 첫 소산과 십일조만 드려도 공동체를 세우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간다.

십일조는 적지는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부담이다. 분명한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드리는 십일조는 더 이상 굴레나 짐이 아니게 된다. 십일조를 기꺼이 드리며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데 동역하는 진성 교인들이 많은 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든지 재건될 희망이 있다. 2500년 전 이스라엘을 재건했던 느헤미야 선배에게서 십일조를 배우는 이유도 이것이다.
분명한 목적, 즉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십일조는 더 이상 짐이 아니다. 십일조를 기꺼이 드리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동역하는 교인들이 있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희망이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재건한 느헤미야에게서 배우는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다.

김범수 목사 / 시애틀 드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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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rmed 2012-04-07 04:27:09
글쎄요... 요즘 목사들이 성도들 눈치보느라 십일조 제대로 가르치기나 할까요? 건축 헌금 이야기 나오면 교회 출석 인원이 격감 한답니다. 십일조 얘기 아차 잘못 끄내면 성도들 시험듭니다... 헌금없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성도들 앞에서 괜히 십일조 얘기 꺼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주지역 한인교회 담임목사 평균 사역기간이 2년도 안 된다고 합니다. 돈 이야기로 성도들 마음 상하면 머지않아 짤립니다.

행복하게살면좋겠다 2012-04-05 15:07:01
돈이 고프니 돈을 바쳐라...돈을 바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십일조,주일헌금,감사헌금,특별현금,건축헌금,구제헌금...또 머 없나...일천번제헌금...ㅎㅎㅎ돈을 바치는 그 댈 위해 내 복을 빌어주리다ㅎㅎㅎㅎ

바두기 2012-04-05 01:47:17
십일조는 너무도 적은 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는데 그 중 아홉을 갖고 하나만 달라고 하십니다. 정말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십일조는 너무나도 많은 돈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세금 걷듯이 10%나 바치라고 합니다.

이 두 마음가짐의 차이가 십일조를 많게도 만들고 적게도 만듭니다. 이 마음가짐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뭔지 아실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중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나"가 중심에 있습니다.

reformed 2012-04-04 05:19:06
"십일조" 라는 말이 듣기 거북하고 잘못 가르쳐져 왔으니, "연보," "헌금" 등으로 변역해서 사용하자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그렇게 합의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질을 복음사역과 구제사역을 위해 힘써 사용할 수 있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 의 의도와 의미를 그대로 살려서, 교역자와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십일조"를 약속하고 헌금하여 섬기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십일조"의 오용이지 선용이 아닐 것입니다. 김범수 목사님의 논지는 이런 의미에서, 어떻게 "십일조" 가 선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적, 실제적 예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2012-04-04 02:57:18
글의 설득력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즉 목회자의 급여나 공동체의 경비를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십일조라는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겠지요. 십일조라는 이름대로 소득의 1/10을 드리는 것이라면 20가정정도만 십일조를 드려도 목회자 한분과 기타 경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것이니까요.
그리고, 느헤미야의 십일조를 예로 들어서 공동체를 세우기위한 십일조를 강변하는 것도 논지가 부족해보입니다. 오히려 느헤미야가 당시의 시대에 맞게 헌금과 제도를 세웠듯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형편에 맞는 제도와 헌금이 연구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