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와 아벨의 피
'올드보이'와 아벨의 피
  • 신광은
  • 승인 2012.04.21 07:4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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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으로 영화 읽기(7)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 외 3편

영화 소개: 박찬욱은 복수라는 소재로 세 편의 연작을 만들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가 그것이다. '박쥐'는 그의 복수 연작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작품이지만 여러 면에서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복수 연작이 물음표라면, 아마도 '박쥐'는 그 물음표에 대한 마침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은 네 편의 서로 다른 스토리와 스타일의 영화들을 통해서 복수와 폭력,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심도 깊게 천착하고 있다. -필자 주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첫 번째 작품, '복수는 나의 것'은 피의 강으로 끝난다. 류(신하균)의 아킬레스가 잘려나간 발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온 강물을 붉게 물들이면서 말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박쥐'는 피바다 앞에서 끝이 난다.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는 피의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타죽는다. 피의 강에서 피바다로 이어지는 피의 이미지는 그의 네 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피는 박찬욱의 세계관이 투영된 이미지로 세상이 온통 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 그의 세계관이다.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건 다름 아닌 폭력과 복수다. 박찬욱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폭력과 복수의 화신들이다. '복수는…'에서 류(신하균)는 자신의 신장을 강탈해 간 장기매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동진(송강호)은 자신의 딸을 유괴한 영미(배두나)와 류(신하균)에게 복수한다. '올드보이'에서 우진(유지태)은 자기 누나를 상상임신시키고, 끝내 자살하게 만든 대수(최민식)의 사소한 말실수에 복수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이영애)와 납치 피해자 가족들은 유괴범 백선생(최민식)에게 복수한다. '박쥐'에서 라여사(김해숙)는 코마 상태에서도 아들(신하균)을 죽인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에게 복수의 칼을 간다. 바로 이러한 폭력과 피의 복수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염료다.

르네 지라르가 잘 얘기했듯이 인류 문명은 폭력이라는 위기 앞에 늘 불안하게 서 있는 존재다. 문명은 언제라도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려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깨지기 쉬운 유리잔 같은 것이다. 하여 문명은 폭력의 문제를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지라르가 예로 든 남미의 카인강족이나, 얼마 전 'W'에서 방영된 알바니아인들의 피의 복수는 폭력 앞에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 준다. 최초의 폭력, 그에 대한 복수로서의 폭력, 다시 그에 대한 폭력적 복수는 무한히 반복되다가 끝내 부족 전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야 마는 것이 폭력의 법칙이다. 박찬욱은 바로 이러한 폭력의 악마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의 길을 영화를 통해 모색하고자 한다.

인류는 어떻게 이 폭력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까? 과연 폭력의 악순환으로부터 문명을 구원할 방도는 무엇인가? 일부 크리스천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용서'뿐이라고 성급하게 답할지 모른다. 하지만 박찬욱은 용서를, 곧 기독교의 복음을 경멸한다. 박찬욱이 '친절한…'의 교도소 선교 장면을 그토록 희화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용서? 풋…, "너나 잘하세요." 금자는 늘 죽은 원모를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지만 상상 속에 원모는 금자의 입을 닥치게 해 버린다. 금자가 원모의 부모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가며 사죄를 구하지만 그것은 피해자 가족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용서가 얼마나 비효과적이고 부정의한지를 너무도 자주 목도한다. 일제 치하에서 온갖 친일 행위를 일삼고도 해방 후 여전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를 일그러뜨리면서 감히 용서와 화해를 운운하는 이들을 보라. 노예제 시행에 대한 진지한 뉘우침 없이 너무도 가벼이 용서를 떠벌이며 인종 간 화해를 주도하려는 미국 백인 크리스천들의 위선을 보라. 용서? 그것은 폭력의 조장이며, 범죄의 방기다. 용서의 복음은 사이코패스에게나 복음이지, 절절한 고통에 사무친 피해자들에게는 저주의 소리다! 하여 금자씨는 딸 제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 들어둬.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거야. 속죄 알어?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 알았지."

   
 
 

▲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복수가 없다면 정의도 없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복수는 단순한 감정적 보복이나 앙갚음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의 실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하여 복수는 신적 차원을 지닌다. 신의 최고 장기는 기억이 아닌가. 신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신은 심판한다. 하나님의 카인 심판을 보라. 카인의 살인은 완전 범죄였다. 물증도 없고, 증인도 없었다. 하지만 허망하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카인의 범행을 간과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벨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를 신원했다. 만일 아벨의 청원이 신에게 들려지지 않았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그런 신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다. 신은 심판하는 자요, 복수하는 자다. 이 때문에 복수는 신적 차원을 지닌다.

'복수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진(송강호)이 익명의 괴뢰 단체에게 처형당하는 장면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동진을 죽인 그들은 누굴까? 영미(배두나)가 속해 있던 무정부주의 단첸가? 그럴 리 없다. 그곳 회원은 영미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군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동진의 악행에 대해서 청구권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동진의 악행은 가슴팍에 붙여진 판결문에 나와 있을 테지만 관객은 알 수 없고, 죽는 순간까지 동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동진은 악을 행했고, 그 악행에 대한 청구권자가 정당하게 그에게 복수했다는 사실이다. '복수는…'의 동진(송강호)이 '올드보이'의 대수로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 모두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악행에 대해 합당하게 징벌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의 선언 그대로다.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3)."

복수로 신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아벨의 억울함을 풀어 주셨을 때, 그는 자신의 정의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이 자취방에서 끔찍하게 죽어 간 영미(배두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동진에게 죗값을 치르게 했다. 업보(카르마)라고 부르건 혹은 신의 심판이라고 부르건, 복수는 필연이다. 복수는 우주의 원리며, 하늘의 뜻이며, 신의 명령이다. 이것이 우리가 여러 종교 경전에서 복수를 명령하는 신의 음성을 듣는 이유다. 동해보상의 원리를 명시한 토라와 함무라비 법전과 알바니아의 카눈이 바로 그 예들이다.

복수는 신적 활동이다. 하여 복수 행위는 성스러운 제의가 된다. '복수는…'의 동진(송강호)이 류(신하균)를 강에서 처형할 때, '올드보이'에서 우진(유지태)이 대수(최민식)에게 복수할 때, '친절한…'에서 유가족들이 백선생(최민식)에게 복수할 때, 관객은 엄숙하고 진지하게 진행되는 밀교 의식을 관람하게 된다. 그 의식은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거룩한 제의다. 성스러운 제의가 시행되는 곳에서 물과 눈의 이미지가 자주 발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과 눈은 속죄의 완성과 구원을 상징한다.

그러나 박찬욱은 이러한 복수가 인간과 세상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통찰한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집요하고 주도면밀하게 복수에 집착하는 편집광들이다. 그들은 끝내 복수에 성공하지만 한결같이 구원을 맛보지 못한다. 우진(유지태)은 대수(최민식)에게 복수를 마치는 순간 더는 살 이유를 알지 못해서 자살한다. 금자(이영애)는 백선생(최민식)을 죽여 땅에 파묻었지만 여전히 원모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복수의 근원적 한계는 복수가 이미 저질러진 피해를 아무것도 복구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동진이 류를 죽여도 물에 빠져 죽은 딸이 살아나지 않으며, 우진이 대수에 대한 복수에 성공해도 죽은 누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희생자 가족의 말대로 백선생에게 복수한다고 죽은 애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복수의 포기, 소위 용서는 암흑과 혼돈만 초래할 뿐이다. 복수 없는 세상은 무법천지를 낳지만, 복수를 한다 해도 회복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복수의 딜레마다.

복수의 또 다른 문제는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를 해 가는 과정 속에서 폭력은 폭력을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폭력의 인과 사슬, 그리고 그것의 무한 순환은 마치 카르마의 수레바퀴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은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이 초래한 황폐함을 잘 보여 준다. 동진(송강호)은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류(신하균)를 찾고, 류는 영미(배두나)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동진을 기다린다. 결국 동진은 류를 붙잡아 강물에서 처형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정체 모를 조직에 의해 동진은 또 처형당한다. 물고 물리는 복수 혈전은 숱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이끌 뿐 정의의 실현은 한정 없이 유보된다. 그리고 복수의 무한 순환이 결국 모두를 공멸에 이르게 한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인류는 폭력과 복수의 무한 순환을 막기 위해서 희생 제의를 고안했다고 한다. 희생 제의는 폭력의 만장일치를 거둘 수 있는 하나의 희생양을 찾아 그에게 모든 혐의를 전가시킨 뒤 그 희생양을 죽임으로써 한순간 폭력의 순환 사이클을 정지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유사한 희생 제의를 '친절한 금자씨'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친절한…'에서 백선생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악마로 설정된다. 누구라도 그 악마를 제거하는 데 이견이 없다. 모두가 공모하여 백선생을 죽이는 거룩한 희생 제의가 눈 덮인 폐교에서 엄숙하게 진행된다. 지라르의 이론대로라면 백선생은 희생양이고, 그의 피는 일순간 폭력의 순환 사이클을 정지시키는 구속의 피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 제의는 일종의 기만술이다. 백선생의 뻔뻔스러운 말대로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모두가 죄인이다. 하지만 희생 제의는 악마로 설정된 희생양에게 모든 악을 투사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마치 선인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희생 제의가 폭력의 무한 순환을 정지시키는 사회적 순기능을 발휘하는 한에서 그것은 유용하지만 그것이 구성원들의 합의된 거짓과 기만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의하다. 하여 백선생을 희생물로 삼아 거룩한 복수 의식을 거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자의 영혼은 여전히 불안하다. 왜냐하면 그 역시 원모에게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진정한 딜레마는 복수에 참여하는 자가 결국은 가해자와 닮아 간다는 데 있다. '친절한…'에서 박찬욱은 매우 참신하고 흥미로운 악인을 창조해 냈다. 바로 친절한 금자씨다. 사실 악으로 똘똘 뭉친 백선생이라는 악인의 캐릭터는 다소 진부하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를 한몸에 결합한 금자씨야말로 정말로 참신하다. '친절한…'의 관객이 느끼는 불편함은 악인(백선생)을 징벌하는 주인공(금자씨 외) 역시 악인이라는 데 있다. 그의 영화는 악인을 응징하는 선한 주인공을 가정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투쟁, 곧 선악 이원론은 신화에 불과하다. 하여 악인을 응징하는 폭력은 결코 세상을 구원하는 구속적 폭력(redemptive violence)이 되지 못한다. 단지 악인을 향한 악인의 보복만 존재할 뿐이다.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피해자는 가해자를 닮을 수밖에 없다.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복수자도 악마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폭력과 복수의 모방 효과, 혹은 전염성은 '박쥐'에서 엠마뉴엘 바이러스로 묘사되었다. 뱀파이어는 복수가 초래하는 악마화의 상징이다. 복수의 사이클에 갇히면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차이는 소멸되며, 대립하는 두 세력은 동일화된다는 것이 르네 지라르의 '짝패'의 개념이다. '복수는…'에서 류(신하균)와 동진(송강호)이, '올드보이'에서 우진(유지태)과 대수(최민수)가, '친절한…'에서 금자씨(이영애)와 백선생(최민수)은 서로 짝패다. 특히 '박쥐'에서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가 서로의 몸을 물어뜯어 피를 탐하는 장면은 이러한 짝패 관계를 탁월하게 묘사한 명장면이다. 결국 복수의 참여는 악마화의 참여다.

바로 이러한 복수의 한계와 딜레마로 인해 금자씨는 절망한다. 백선생을 죽였다.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금자는 원모에게 용서받을 수 없다. 금자는 이제 원모의 청구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무것도 회복된 것도 없다. 무엇보다 악마가 되어 버린 금자는 한때 교생 선생을 사모하여 가출도 마다않던 순진한 고딩녀로 돌아갈 수 없다. 새하얀 눈과 같은 제니나 근식(김시후)으로 영영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두부를 아무리 퍼먹고, 하얀 케이크에 아무리 얼굴을 파묻어도….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악마가 되지 않으면서 온전한 복수를 할 수는 없을까? '친절한…'에서 한 피해자 가족이 백선생의 처형을 금자씨에게 떠넘기려 할 때 우리는 사법제도의 출현을 보게 된다. 지라르에 의하면 사법제도는 희생양 제의를 제도화한 것이다. 복수의 무한 순환을 막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게 복수 기능을 위탁하는 것, 이것이 사법제도다. 즉 사법제도의 취지는 폭력적 수단과 복수 행위를 개인에게서 박탈하여 국가에게 위탁함으로써 복수의 무한 순환을 막고, 구성원들의 악마화를 피한 채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복수를 통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법제도는 꽤 영리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법제도의 무한한 허점 때문에 이 발명품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최반장'으로 통칭되는 박찬욱의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희생자 가족의 말대로 곤봉만 들었다 뿐이지 범인도 못 때려잡는 무능한 자들이다. '친절한…'의 최반장은 금자가 원모를 죽인 진범이 아닌 줄을 알고도 수사의 편의상 금자를 검찰에 넘기고 만다. 그런가 하면 '복수는…'의 최반장은 경찰이 되어 가지고 동진(송강호)의 돈을 받고 그의 사적 복수에 협조하는 한심한 경찰이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경찰들인가. '복수는…'의 영미(배두나) 자취방에 얼빵하게 서 있는 경찰 마네킹은 사법제도에 대한 박찬욱의 통렬한 조롱이다. 경찰 얼굴에 붙어 있는 파리는 분명 똥파리일 것이 분명하다. 경찰은 똥이다! 이러한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친절한…'의 희생자 가족들은 공적 복수 대신 사적 복수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우리는 왜 그의 첫 번째 영화 제목이 '복수는 나의 것'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선악과의 저주의 본질과 만나게 된다. 에덴 설화의 가장 신비하고 심오한 차원은 금단의 열매가 단순히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아니라 '선과 악 모두를 알게 하는 열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에덴 이야기를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내용의 가장 오래된 고대 바벨론 신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로 만든다.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 문명은 악을 추방하고 선으로만 구성된 도덕의 왕국을 추구해 왔다. 이것은 모든 선악 이원론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하지만 유독 성서 계시 속에 나타난 에덴만큼은 도덕의 왕국이 아니라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던 탈 도덕적 왕국이었다!

성서 계시에 따르면 에덴에서의 인간의 본래 상태는 단순히 선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악으로부터 초월된 상태였다. 이것은 선악 판단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융(Jung)의 탁월한 통찰대로 악은 선의 그림자다. 하여 선은 악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선에 대한 지식은 악에 대한 지식만큼 저주의 산물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알게 되었으며, 선악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재판관이 되었음을 뜻한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아담과 이브는 평가자, 곧 타인이 되었으며, 서로가 타인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 폭력적 시선 앞에 서로는 자기 존재의 폭력적 노출을 경험하게 되었다. 마샬 로젠버그가 잘 지적한 대로, 모든 폭력은 평가로부터 시작된다. 카인의 아벨 살해도 형의 아우에 대한 일종의 평가 행위로서, 카인이 사적 심판을 행사한 것이었다.
   
 
 

▲ 모든 폭력은 평가로부터 시작된다. 카인의 아벨 살해도 형의 아우에 대한 일종의 평가 행위로서, 카인이 사적 심판을 행사한 것이었다. 사진은 아벨을 살해하는 카인.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야훼의 뜻이라는 공통 기반(common ground)은 해체되고 최종 심급은 사유화되었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심판자가 되고자 하며, 신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사적 복수의 내적 메커니즘이다. 즉 사적 복수는 신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자기 우상화다. 하지만 자기 우상화는 또 다른 사람의 자기 우상화 주장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모두가 신이기를 주장하는 한 복수는 멈출 수 없다. 사적 복수가 초래하는 복수의 무한 순환, 복수자의 악마화와 우상화는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된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길은 이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박찬욱은 '박쥐'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네 번째 작품, '박쥐'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박쥐'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다소 황당하다.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가 라여사(김해숙)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를 태양빛에 노출시켜 타죽는다. 악마는 사라지고 라여사의 원한은 풀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죽음이 해법이라는 말이 아닌가? 박찬욱은 그것을 순교라고 불러 주기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설령 그것이 순교라고 하더라도 세 편을 통해 제기한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변치고는 너무 피상적이고 빈약하다.

창세기 4장의 카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신원을 청구하는 아벨의 핏소리는 하늘에 상달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벨을 신원하신다. 이것은 한을 품은 망자의 원귀가 죽어서도 복수를 하고야 만다는 한국식 전설과는 상당히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아벨은 신원을 하나님께 맡긴다. 유대-기독교의 전통에 따르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적 복수를 하는 대신 하나님께 신원을 요청함으로써 정의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를 대신해서 복수하게 하심으로써 복수의 무한 순환을 끊는다. 더불어 피해자의 악마화 및 우상화를 방지한다. 하나님의 복수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룬다. 성서의 선언대로 "야훼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리로다(렘 51:56)."

이것은 사법제도의 메커니즘과 사뭇 비슷하다. 히브리 성서의 전통에 따르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재판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신 1:17), 원수 갚는 일도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롬 12:19, 히 10:30). 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폭력적 수단과 복수 청구권을 하나님께 위탁한다. 그리고 아벨이 핏소리로 신원을 요구하듯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원한을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것이다. 이것이 시편의 저주시의 신학적 근거다.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사실 복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은총이다. 즉 사적 복수는 피해자를 복수의 무한 순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으며, 복수의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복수자의 악마화 및 우상화라는 2, 3차 피해를 막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복수는 복수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복수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복수의 궁극적 목적을 온전히 실현하신다.

하여 카인 이야기는 비극적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하다. 카인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벨을 신원하시면서도 동시에 카인을 향한 은총도 거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인자를 색출하여 죄를 묻고, 징벌하심으로 아벨을 신원하셨으며, 일찍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한창 꽃다운 나이에 죽은 아벨과 동일시하심으로 아벨이 허무한 존재(헤벨)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셨다.

동시에 하나님은 카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 그에게 미리 경고하심으로써, 아벨 살해 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우의 행방을 물으시며 자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카인에게도 은총을 베푸셨다. 결국 범죄를 부인하는 카인에게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죄를 직면시키셨다. 그리고 죄에 대한 대가로 추방령과 땅의 저주를 내리셨다. 카인은 그가 살던 곳에서 쫓겨나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했고, 땅은 그에게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혹독하나 '동해보상'의 원리에 비추어 보면 크신 은총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생명에 대한 값으로 카인의 생명을 요구하셨어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두 아들 모두를 잃고 싶지 않으셨다. 홍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후회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를 죽이는 것, 곧 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종말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추방령을 들은 카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며 두려워한다. 카인의 두려움은 복수의 무한 순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마치 낯선 자들이 뜬금없이 나타나 동진(송강호)을 처형하듯, 카인은 자신도 아우의 피에 대한 청구권자에 의해 갑자기 보복당할 수 있음을 막연히 알고 두려워한다. 그때 하나님은 카인에게 표를 주시며 카인을 보호해 주시마 약속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복수의 순환 고리를 끊고 카인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이 약속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복수는 응징이 목적이 아니라 죄인을 살려 다시 당신의 자녀로 얻기 위함이 목적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균형점이며, 복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구원의 길이다.

신광은 / 얼음터교회 담임목사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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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2012-05-03 04:14:55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고 한다. 왜? 아마 방법적인 면에서 공의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위정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공의를 행하실 것을 명하셨다. 따라서 복수는 하나님이 세우신 법을 따를때 공의가 실행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공의대로 흐르는가? 그래서 필자는 르네 지라르의 말을 인용하고 궁극적으로 복수는 신에게 맡겨야 온전하게 이루어진다고 쓴다. 나아가 신의 복수는 복수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구원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예가 십자가 사건이라 한다. 정말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모순됨 없이 나타난 사건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악된 사람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을 멸망 상태로 둘수 없는 절절한 사랑을 갖고 계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를 통하여 사람들의 죄를 씻음으로 공의를 이루셨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수라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복수(원수 갚는 일)는 악한 영에게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베푸시는 것이다. 누가 카인인가? 우리 사람들? 누가 아벨인가? 예수 그리스도?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복수하셨다면 누구를 죽인 사람에게 복수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죽이셨나? 아담의 선악과 사건이 하나님을 죽인 것인가? 그래서 복수 하시려고 예수를 죽이셨나?우리가 카인과 같은 존재라면 카인을 구원하기위한 예수님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막연하면서도 몇 단어로 대비시킨 결과다.

philip im 2012-05-02 06:49:47
신학으로 영화 읽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는 글인 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신학적 바탕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에덴의 설화나 카인에게도 은총을 베푸심,하나님의 복수는 응징이 목적이 아니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에덴 창조는 신화적인 이야기에 불과한가? 카인에게도 은총을 베풀었다함은 일반은총인가 특별은총인가? 카인에게 표를 주심이 카인을 영적으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인가? 이 땅 위에서의 육적 생명의 보호하심과 영적 구원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다섯 구절은 심한 비약이 되었다. 특히 마지막 두 구절은 더 심하다. 아벨의 피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카인에게 복수하셨다.땅에 저주를 내리고 유리하는 자가 되게하셨다. 그러나 카인에게 표를 주신 것은 카인이 애원했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구약에 보면 도피성의 경우 오살자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지 의도된 살인자에게 베푸신 것이 아니다.마지막 두 문장을 비교해 보라. 하나님의 복수와 십자가. 서로 통하는가? 아무리 필자가 논리적으로 결국 하나님의 복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이끌어 왔을지라도 십자가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성도들이 핍박받을 때 복수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는 궁극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용서해야한다. 필자는 무엇 때문에 친일자들을 예로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일전에 필자가 용서와 관련하여 쓴 아미쉬에게서 용서를 배우라는 글이 생각난다. 오히려 이 영화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은 그 글이될 것이다. 물론 위의 영화들 속에 나오는 용서하지만 이중적인 모습의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모습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고 실천해야한다.

임마누엘 2012-04-26 17:22:49
글 잘읽었습니다. 한번쯤 생각해보고싶은 영화들이었는데, 잘 설명해주셨네요. 그런데 글에 보면, '카인이 사적 심판을 행사하였다'고 하셨는데, 카인의 살인 행위을 '심판'이라는, 어떤 정당한 이유에 의한 집행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카인은 그 스스로의 질투에 의해 살인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적심판이라는 개념을 들어 곧 복수와 상통한다고 한다면, 만약 억울한 누명으로 인한 복수와 자신의 질투와 악한 생각으로 인한 행위를 구별할 수 가 없게되네요.

오늘날에 사회에 대해 심판? 혹은 복수?하고자 분노하자는, 분노해야한다는 그런 취지의 글들이 많은데(이 글은 아니구요), 과연 그 배경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하네요.. 여튼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바두기 2012-04-23 20:15:50
에덴에서의 인간의 본래 상태는 단순히 선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악으로부터 초월된 상태였다. 이것은 선악 판단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윗 문장 하나만으로도 저는 이 글을 읽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 글 전체의 통찰력과 가르침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신광은 목사님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합니다!